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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고함<4>[기획특집]분배와 복지에 대한 해법은 과연 있는가?
임양택 한양대 경제금융대학 교수 | 승인 2011.09.01 15:55
   
▲ 임양택 교수

 한국사회의 보수(우익)와 진보(좌익)의 대립

세계가 당면한 글로벌 경제위기의 극복 방안으로서 신(新)자유주의인가 혹은 케인지언인가를 두고 경제사상적 논쟁을 벌이고 있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상기와 같은 ‘고상한’ 경제철학적 논쟁은 차치하고 보수와 진보의 ‘밥그릇’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다소 고상하게 표현하면, 계층간 · 세대간 · 지역간 · 노사간 · 이념간 갈등이 활화산처럼 분출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보수(우익)와 진보(좌파)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심화 및 확산되고 있다.
지난 17대 대통령선거(2007년)에서 보수 진영은 유효 투표수의 63.75%(이명박 48.67%+이회창 15.08%)를 얻으며 권력의 시계추를 좌(左)에서 우(右)로 돌렸다. 보수 진영은 지난 17대 대선을 한국 현대사의 흐름이 바뀌는 계기로 판단했다. 진보 진영조차 패배를 자인한 터였다.

그로부터 1년 뒤. 이념의 시계추는 방향을 잃고 멈춘 듯 보인다. 보수 진영은 2008년 4월 총선에서도 압도적 승리를 거뒀으나 곧이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촛불 시위’ 앞에서 정국 주도력을 잃었다.

동년 하반기 들어서는 세계적인 ‘금융 위기’ 앞에 경제 성장으로 가는 길을 잃었다.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스킨십 외교’는 짧았고, ‘진보적 자본주의’를 내세운 오바마 정부의 등장을 맞아야 했다.

이명박 정부라는 본격적 신자유주의 정권이 등장했으나 세계적으로는 신자유주의(New Liberalism)의 위기가 도래했다. 

한국사회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대결구도를 최근의 각종 선거투표 결과를 갖고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당시)가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온갖 비난을 무릅쓰면서 뒤늦게 뛰어든 명분은 ‘보수강화론’ 혹은 ‘보수보완론’이었다. 당시 대선 결과는 이명박 48.7%, 이회창 15.1%로 보수가 63.8%였던 반면에 진보는 정동영 26.1%, 문국현 5.8%, 권영길 3%로 모두 합쳐 34.9%였다.

즉, 보수가 진보보다 약 2배가 많았다.

그러나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광역의원 정당득표율을 보면 한나라당 39.6%, 선진당 5.3%로 보수가 44.9%이던 반면에, 민주당 34.6%, 민주노동당 7.3%, 국민참여당 6.3%, 진보신당 3.1%로 진보가 51.3%였다. 즉, 2007년 12월 대선 후, 2년 6개월 동안, 진보가 보수보다 많아진 것이다.

한편, 한국사회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성향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보수세력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인정하고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지향한다.

이와 반면에, 진보세력은 대한민국을 인정하고 시장경제체제에서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복지국가를 추구한다. 그러나 친(親)북한 좌파 세력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실패의 역사, 부도덕한 역사, 기회주의가 성공한 역사로 폄하한다.

과거에는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이 대(對) 북한정책에 관하여 대립하였지만, 최근에는 소득분배의 불균등과 양극화가 심화됨에 따라 한국사회의 복지 문제로 대립하고 있다.

사실, 그러한 대립도 잠깐이었다. 왜냐하면 2012년 총선 및 대선을 코 앞에 두고 우선 정권부터 유지 혹은 탈환하자는 것이 여·야 모두의 본색(本色)이기 때문이다.

한편, 대외적으로 보면, 바로 2012년에는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정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되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 중국과 러시아의 국가 지도자 교체가 각각 예정되어 있고, 일본의 정권 교체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북한 권력의 성공적 승계 여부는 아직 확언할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 주변에 권력의 공백 내지는 회오리 상황이 곧 전개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 사회는 중심축을 잃어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덩샤오핑(鄧小平, Dengxiaoping, 1904~1997)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의 경제적 번영을 가져온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실용주의(實用主義)로써 10년간(1968~1978)의 문화혁명을 종식시킴으로써 이념의 질곡에 빠져 있던 중국 인민을 해방시켰고, 개혁․개방을 통하여 중국이 고도성장을 구가할 수 있도록 사상적 기초를 닦아주었으며, 오늘날 G2시대의 개막을 위한 무대를 준비해주었다.

이와 반면에, 중국보다 훨씬 앞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보여주었던 한국은 오히려 중국의 과거처럼 이데올로기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간 채, 헤어날 줄을 모르고 있다. 그 결과, 이념간 갈등(보수와 진보)의 골은 더욱 깊어져 있으며, 주어진 절호의 역사적 기회를 유실한 채, 사회불안은 만연되어 가고 있다.

이 기회를 빌려, 저자는 60 평생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잠꼬대’와 ‘마녀 사냥’을 다음과 같이 2가지(최소한)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베를린 장벽이 1989년 무너지고, 소련이 패망(1991년)하기 전에 다니엘 벨(Daniel Bell)은 그의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 1960)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주도하는 세계가 곧 끝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어서,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교수는 그의 저서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en, 2006)에서 공산주의의 몰락을 예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지식인들은 아직도 이념 논쟁에 ‘마치 즐기듯이’ 몰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공자(孔子)의 ‘중용’(中庸) 철학이 수천 년 동안 자리를 잡은 이 땅에서 ‘중도’(中道)를 표방하면 그냥 ‘회색분자’라고 매도당하고 누가 쏜 줄도 모르게 ‘저격’당한다.

이러한 ‘마녀 사냥’이 무서워, 대다수 지식인(지성인이 아닌)들은 오른편이든 혹은 왼편이든 간에 ‘줄을 서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아니면,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성숙한 시민의 모습이고 현명한 처세로 자리 잡고 있다.

둘째, 저자가 더욱 개탄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소위 지식인들(특히, 소위 대학 교수들)이 무엇이 보수(우파)이며 무엇이 진보(좌파)인지에 대하여 명확한 개념 및 정의(定義)도 하지 않은 채, 또한 정치 · 경제 · 사회 현상에 대한 구체적 대안도 없이, 마치 ‘3류 단편 소설가’ 혹은 ‘길거리에서의 3류 가수’처럼 마구 무책임하게 지껄인다는 점이다. 모두 ‘헷칠한’ 사람들이다.

모름지기, ‘보수’는 어떠한 가치를 어떻게 지키고 발전시키겠다는 비전과 전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진보’라면 역사 발전을 저해하는 제반 요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모두 그러한 양심적인 노력은 하지 않고 ‘말장난’만 일삼는 것 같다. 이러한 모습은 특히 정치지도자들에게 쉽게 발견된다.

게다가 공동체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운동단체(NGO)들의 모임에 간혹 참석해보면 전직 장관들이 초청 연사로 나와 재직 당시의 자기 과오에 대해 변명 혹은 미화(美化)하면서 ‘높은 곳으로 향한 몸짓’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저자는 대학생들에게 경제성장론을 강의할 때, 모든 생물체의 ‘신비’는 구조적 및 기능적 균형(balance)을 갖도록 창조되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하면서 ‘균형성장 및 발전’(balanced growth / development)의 의미를 설명한다.

이 창조의 ‘신비’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전형적인 예로서, ‘두 팔’은 균형(balance) 속에서 ‘몸통’을 유지하라는 조물주의 배려이다.

따라서 오른 팔과 왼 팔은 각기 다른 기능을 갖고 있지만 한 몸을 위하여 모두 동시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팔의 손이든지 간에, 손은 반드시 깨끗해야 몸통의 건강이 유지된다는 점이다.

즉, 좌 · 우익의 사상적 대립은 역사관에 따라 도출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 그들의 인격체와 조직이 청결해야 몸통, 즉 국민과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상기의 시각에서 보면,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우파와 좌파는 항상 공존하는 것이며 보수와 진보는 ‘동태적으로’ 상호보완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사회의 위기는 보혁간 사상적 대립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 및 부재로 비롯된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보수’와 ‘진보’가 생산적으로 논쟁하고 투쟁해야 할 대상은 한국 사회에서 ‘사회정의’(Social Justice)를 구현하는 범위와 속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잠시, 한국의 현대 정치사를 예로 들어 보자(저자는 과거 유년 시절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지만 경제학 교수이지 정치학 교수는 아니다). 우선, 극우 · 보수인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만들어냈고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서 그 ‘보수적 가치’를 지켰다.

다음으로, 극좌에서 극우로 변신하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적 틀 속에 경제발전이라는 하부구조를 다졌고 곳간을 채웠다. 朴 대통령이 ‘보수’였던가? 아니다. 그는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진 ‘진보’였다. 그의 경제발전전략을 사사건건 반대했던 세력은 바로 ‘보수’(오늘날 한나라당)였다.

한편, 극우 · 보수였던 김영삼 대통령은 진보세력도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매우 호기롭게 ‘금융실명제’를 도입 및 정착시켰다. 그러나 무능한 ’보수‘ 세력으로 둘러싸였던 YS는 IMF 경제위기를 자초했다.

누가 한국경제를 망쳤는가? 그것은 진보가 아닌 보수였다. 저자는 경제학자이기 때문에 IMF 경제위기의 원인과 그 파급효과는 잘 알고 있다.

그것에 관한 논술을 차치하고, 저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IMF 경제위기는 선량한 한국인의 가정과 영세 중소기업을 무수히 파괴했다는 점이다.

사실, 단 한 명이라도 사람을 죽인 자는 살인자이듯이, 1997년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492명과 2003년 1,157명의 자살을 유발시킨 당시의 정책 당국자들은 비록 ‘간접적 대량자살 방조범’들이라고 칭할 수는 없더라도, 한국의 인구감소 추세에 다소 기여한 분들이다.

그들은 아직도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못 느끼고 백주에 활보하고 있으니 한국사회의 도덕과 사회정의는 이미 죽은 것 같다(임양택, 2007).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 필자는 1997년 말 IMF 경제위기 전·후로 나름대로 정책 당국자들에게 한국경제의 위기상황을 지적했다. 예로서, 임양택(1991), “한국경제 위기의 본질과 대책”,〈한국경제신문〉, 1991.9.30 ; 임양택(1995),「비전 없는 국민은 망한다」, 매일경제신문사 출판부 ; 임양택(1999), “제2외환위기 가능성과 대책”,〈한국경제신문〉, 1999.2.8.을 들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97년 10월 IMF 외환위기 한 달 전, 한국금융연구원, 산업연구원, 삼성경제연구소, LG경제연구원, 대우경제연구소는 “1998년 경제성장률이 1997년보다 더 높을 것”으로 전망했다(〈조선일보〉, 1997.9.29, 13면). 이어서, 1997년 10월 9일(바로 IMF 경제위기가 발발했던 시기) 한국은행, KDI, 삼성경제연구소, 현대경제연구소, 대우경제연구소, LG경제연구원, 선경경제연구소는 “1998년 탈불황(脫不況) 시대에 본격 진입할 것”으로 전망했다(〈세계일보〉, 1997.10.9). 우리 모든 경제학자들도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비단 IMF 경제위기뿐만 아니라 모든 ‘정책실패’에 대해, 정책수립가는 물론 모든 경제·경영학자들(저자를 포함)도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사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순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 편으로 비운(悲運)의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였지만 보수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한·미 FTA’를 타결(2007. 04. 02)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가 기록에 남기고 싶은 것이 있다.

저자가 어느 공식 모임(CEO Network 조찬포럼, 2007.03.23, 팔레스호텔)에서 초청 연사로 강연을 마친 후, 참석 인사 중에서 K씨가 ‘한·미 FTA’를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를 질문했다. 저자는 “노무현의 칼을 이용하여 한·미 FTA를 타결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설혹 우익 정권(이명박 정부)이 들어서더라도 不가능할 것이다”고 답변했다. 한·미 FTA는 노무현 정권에 의하여 2007년 4월 2일 타결됐다.

역사는 저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이후, 무려 4년이 경과해도, 한·미 FTA는 양국에서 국회 비준이 되지 않고 있다.

또한, 그는 정치적 ‘과오’(예를 들어,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권 이양시기를 2012년으로 당기면서 한·미 군사동맹 체제를 위태롭게 한 ‘설익은’ 민족주의 행위 등)도 많이 저질렀지만 선거법을 개정하여 부정부패선거 가능성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이러한 ‘혁명적 쾌거’를 과연 어느 ‘보수’ 대통령이 할 수 있으랴! 만약 노무현 정권이 선거법을 개정하지 않았다면, 이 나라는 ‘돈판 선거’로 이미 거덜 났을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참고로,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또한, 2008년 노무현 정부는 65세 이상 노인의 70%까지 연금(1인당 월평균 9만원 ; 부부는 14만 4,000원)을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제도’를 도입했다. 이 결과 비록 적은 액수이지만, 기초노령연금은 상당한 ‘사회안정망’ 구실을 하고 있다. 상기의 ‘기초노령연금제도’ 마저 없는 한국사회는 존립 가치조차 없다.

왜냐하면 한국사회는 현대판의 '고려장‘ (高麗葬)을 일삼는 야만인이 사는 동네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초노령연금제도‘ 하에서도 노인 자살률이 OECD 국가들 중에서 한국이 1위이다. 누구에게나 노(老)부모가 있을 수 있고, 누구나 모두 늙어가기 마련인데, 모두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명박 대통령은 분명히 보수 속(현대그룹)에서 성장하여(물론, 가난한 유년시절은 있었지만) 보수의 이익을 한껏 향유했다. 특히, 2009년 12월 대선에서 무려 530만 표의 차이로 보수세력에 의하여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보여준 물가, 금리, 환율, 유가, 산업 정책을 보면 과연 시장경제주의를 신봉하는 보수 · 우익의 정권이라고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박 정부는 진보 혹은 좌익은 결코 아니다.

예로서 ‘MB물가지수’라는 것이 발표(2008. 03. 18)되었는데, 저자는 경제학 교수로서 2011년 현재까지 33년 동안 봉직하고 있지만, 이 물가지수가 어떻게 기안 · 작성 · 적용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또 다른 예로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당시)의 고유가 대책이다. 그는 10조 4,930억 원을 1,380만 명의 근로자와 자영업자에게 6만~24만 원씩 세금 환급(사실상 현금 지급)을 하겠다고 발표하였다(조선일보, 2008. 6. 11). 10조 4,930억 원의 현금지급 대상인 1,380만 명은 근로자 980만 명으로서 전체 근로자(1,300만 명)의 78%, 자영업자 400만 명으로서 전체 자영업자(460만 명)의 87%, 상기한 1,380만 명(근로자+자영업자)은 경제활동인구(2,400만 명)의 57.5%이다.

사실, 상기한 고유가 대책은 ‘좌파 분배주의자’일지라도 내놓고 하기 힘든 낯부끄러운 포퓰리즘(populism)이다.

한편,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10조 원을 고유가 시대에 더욱 절실해진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사용한다면 1기에 2조 5,000억 원이 들어가는 원전을 4기나 더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에너지 자주개발율(자국 기업이 참여한 에너지 개발)은 4.2%이다.

일본의 19%, 중국의 26%에 크게 뒤떨어진다. 정부 관계자는 “해외 유전의 광구를 사들이는데 보통 1조 원이 넘는 돈이 들어가는 데 이번 고유가 대책에는 해외 유전 개발에 1조 1,000억 원만 배정된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조선일보, 2008. 6. 11).

이러한 ‘선심성 정책(?)’은 미국산 쇠고기 사태로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되지만, 이러한 천문학적 국고(10조 5천억 원)를 그렇게 낭비한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아예, 그 국고를 적립금이 고갈된 국민건강진흥기금에 투입했다면, 요즈음 얼마나 유용할 것인가! 아마도, 이 지혜로운 결단으로 요즈음 복지 포퓰리즘을 잠재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경제살리기」를 위하여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정책 청사진 즉 “엠비노믹스(MBnomics)가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화석처럼 굳어져 가고 있다. 성장주의인지 혹은 좌파 분배주의인지, 시장경제를 하자는 건지 혹은 관치(官治)를 부활시키자는 건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 정책의 이념도, 또한 철학도 분명치 않다”(조선일보, 2008. 6. 14).

물론, 이명박 대통령 취임사(2008. 2. 25)에서는 ‘실용주의’가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실용정신은 동․서양의 역사를 관통하는 합리적 원리이자 세계화 물결을 헤쳐나가는 데에 유효한 실천적 지혜”라고 정의하면서 “우리는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가야 합니다”(p3)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협력과 조화를 향한 실용정신으로 계층 갈등을 녹이고 강경투쟁을 풀겠다”(p4)고, 또한 “남북관계는 …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실용의 잣대로 접근하겠다”(p13)고 각각 약속했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의 실용주의 철학은 어디로 갔는가? ‘실용주의’(實用主義)란 ‘최대다수 최대행복’의 철학이지, 이해득실을 노리고 추구하는 ‘실리주의’(實利主義)가 아닌 것이다.

이젠, 느닷없이, ‘초과이윤 나누기’와 ‘동반 성장’에 이어 ‘공생 발전’이 등장하였고, 최근에는 ‘균형 재정’이 강조되고 있다.

한편, 집권 보수세력인 한나라당이 2011년 7월 10일 최고위원 · 정책위 연석회의에서 대학 등록금 완화 및 대기업 규제 강화, 법인세 추가 감세 철회를 거의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이것은 이명박 대통령 경제정책(MB노믹스)의 핵심에 해당하는 내용(법인세 감세와 기업규제 완화)이 바로 여당 지도부에 의하여 파기된 것이다.

이것은 집권당이 현직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대부분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2008년 2월 총선 당시 530만 표의 차이로 압승하였던 이명박 대통령의 인기 물결 속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젠 이명박 대통령이 ‘토사구팽(兎死狗烹)’당한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좌파’(‘사이비’ 좌파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좌파)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은 좌파의 시조(始祖)인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근본적인 오류이다. 저자가 수년간 연구 · 조사한 바에 의하면, 마르크스 생애를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장기파동과 관련지어 보면 그의 자본론은 재구성 내지 폐기되어야 함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사망년도인 1883년 공황기(1873~1883)의 종점임과 동시에 회복기의 시발점으로서 그는 매우 불행하게도 제2차 산업혁명의 기술혁신(제강법, 합성연료, 플라스틱, 인공염료, 인조섬유, 증기기관, 전동기, 가솔린 내연기관 등)을 통하여 자본주의 경제가 회생 내지 더욱 번성될 수 있다는 것을 육안으로 목격하지 못하고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크스(Karl Marx)는 기술혁신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지만 기술혁신 자체가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계급투쟁을 통한 자본주의 착취구조의 종식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붕괴된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였다. 이 역사적 사실이 1989년 미·소(美·蘇) 몰타(Molta)선언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당시 고르바쵸프(Mikhail Gorbachev)는 1945년 얄타(Yalta) 회담 이후 44년간 존속되어 왔었던 냉전체제를 1989년 몰타(Molta)선언으로 ‘양심 고백’을 한 셈이었다.

또한, 세계인류 문명사에 Marxist의 대부(代父)로 칭송받고 있는 멘델(E. Mendel)은 그의 「후기 자본주의」(Late Capitalism, 1972)에서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장기파동 이론을 거부함에 따라 경제사의 중요한 전환점들인 1940년대의 자본주의 부흥과 1970년대의 쇠퇴를 예측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러한 거부가 바로 마르크스주의를 취약하게 만든 오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 경제이론과 대칭적인 정통(보수 혹은 우익) 경제이론도 고전경제학 → 케인지언 경제학 → 신고전학파 경제학 → 화폐론 → 합리적 기대론 → 공공측면 경제학 → 신케인지언 경제학 등으로 부단히 수정 및 보완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심리학을 경제학에 적용시켜 ‘준(準)합리적 경제이론’(Quasi-Rational Economic Theory)을 비롯한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이 대두되었다.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200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 1934~현재)을 들 수 있다.

그가 제시한 「주의와 노력」(Attention and Effort, 1973)과 「불확실성 하에서의 판단」(Judgement Under Uncertainty: Heuristics and Biases, 1982) 등에서 주장하는 ’준(準)합리적 경제이론‘(Quasi-rational Economic theory)은 이성적이며 이상적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를 전제로 한 정통 경제학과는 대조적으로 실제적인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여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 학파는 인간이 이성적 혹은 합리적(rational)이라는 정통 경제학의 기본 전제에 도전한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힌다. 즉, 저자는 신고전학파나 신케인지언도 아닌 슘페테리안(Schumpeterian)과 롤지언(Rawlsian)이다.

왜냐하면 ‘최대다수 최대행복’은 완전고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고용 증대는 장기적으로 보면(요즈음 그것도 제품 수명주기가 짧아져서 단기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산업발전과 함께 ‘신기술 → 신산업 → 신시장’이라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에 의하여 ‘양호한 직장’(decent job)이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고용은 단기적으로 재정지출(케인지언)이나 통화량(화폐론자)의 증대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인간은 결코 ‘돼지’가 아니기 때문에 ‘소득’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동물’(단순히 ‘경제적 동물’이 아니라)로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회연대를 갈구한다.

이것은 인류 사회의 역사적 발전과정(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전쟁 등)에서 보듯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저자는 ‘롤지언’(Rawlsian)이다. 그리고 마이클 센댈(Michael Sendal)처럼 정의(正義)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마이클 센댈(Michael Sendal, 1953~현재), 「자유주의의 한계와 정의」(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 1982)는 John Rawls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 1971)을 반박하였다.

자유(효율)와 평등(정의)과 안정을 포함한 신(新)실용주의(Neopragmatism)를 제창한다.

전술한 바와 같은 보수와 진보 혹은 우익과 좌익의 부질없는 논쟁 속에서 일반 대중은 분노를 넘어 허탈해 있다.

그들의 죄(罪)라고는 오직 이 시대에, 이 땅에 태어난 것 외에는 없다. 그러한 가운데, 국가와 민족의 에너지는 고갈되고 있다.

그러나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하듯이, 역사는 ‘깔딱고개’를 넘어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저자는 믿는다. 그러한 하늘의 소명(召命)을 실천할 메시아(messiah)를 기다린다.  글/ 임양택 한양대 경제금융대학교수<계속>

 

임양택 한양대 경제금융대학 교수  jdp8064@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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