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분배와 복지에 대한 해법은 과연 있는가?

▲ 임양택 교수

 한국의 국가적 당면과제와 해결방향

북한의 핵무기로 인한 한반도의 위기상황은 본 연구의 논리 전개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차치하더라도, 한국사회는 사실상 총체적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계층간 갈등과 노사간 갈등은 마치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말하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서 첨예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또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가 지적하였던 ‘투쟁 · 갈등 · 불분명한 충동’은 심히 전율적이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이유 없는 ‘사이코패시(Psychopathy)적인 살인’은 간간히 언론보도에 오르고 있다.

OECD 국가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OECD 국가들의 평균자살률이 10만 명당 11.2명인 것에 비하여 한국의 그것은 10만 명당 21.5명이다. 자살의 동기를 보면 사업실패와 빈곤을 비판한 자살 유형이 가장 높다. 노인자살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청 · 장년층의 ‘고독사’(孤獨死)의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2011년 6월 말 현재 가계부채(가계대출액과 판매신용, 즉 카드사 및 할부금융사 외상판매액의 합계) 규모는 876조 3천억 원으로서 당해 연간 가처분 소득의 1.5배가 넘는다(한국은행, 2011. 08. 22 발표). 한국의 가계부채 규모는 선진국의 그것에 비해 높은 수준이다.

2009년 기준으로 비교해보면,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53%(9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134%)을 크게 넘어서고 있다. 미국(132%)과 일본(130%)보다도 높다.

상기의 천문학적 규모의 가계부채는 한국 사회의 ‘시한폭탄’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부동산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물가 안정을 위해 금리 인상을 실시하면 부채를 갚지 못하는 가계가 증가하게 되고, 이로 인해 금융회사들은 부실화될 것이며, 이것은 한국발(發) 금융위기를 유발할 수 있다.

가계부채 연착륙을 위하여 정부가 발표한 종합대책(2011. 06. 29)은 부채구조를 바꾸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골자는 현재 은행들의 대출 가운데 5% 남짓한 고정금리와 비(非)거치식 분할상환대출 비중을 5년 후인 2016년까지 30%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주택 규모의 대출 이자에 대한 소득공제 한도를 올리고, 변동금리 대출과 거치식 대출에 대한 공제한도는 줄이기로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중금리가 오르면 이자를 더 내야 하는 변동금리 대출을 고정금리 대출로, 돈을 빌린 뒤 이자만 내다가 만기 때 한꺼번에 원금을 갚는 거치식·일시상환 대출을 처음부터 원리금을 함께 갚아나가는 비(非)거치식·분할상환 대출로 바꿔나가겠다는 것이다.

저금리 체제가 정상화되면서 금리 상승으로 이자 상환 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 결과, 금융회사의 가계대출과 관련된 전산망이 차단됐다. 당장은 가계부채가 늘어나지 않도록 가계부채 총량을 관리하면서 서서히 줄여나가는 수밖에 없지만, 급전(急錢) 마련에 쫓기는 서민들이 고금리의 사채(私債) 시장에 더 크게 의존하는 사태를 유발시키고 있다.

금융당국은 좌충우돌하고 있다. 저자는 가계부채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경제성장을 통해 양호한 직장(decent job)을 창출하여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증대시키는 것 외에 다른 왕도(王道)가 없다고 생각한다.
2003년 카드 사태의 재발 가능성이 무척 우려된다.

가계부채의 천문학적 규모는 통화정책을 무력화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가계가 금리인상 능력을 감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가계 저축률이 급속도로 하락하고 있다. 2010년 한국의 가계저축률은 OECD 평균의 5분의 2 수준인 2.8%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았고, 1990년 이후 가계저축률 하락 속도는 OECD 국가 중 가장 빠른 수준“이다. 가계저축률이 1%포인트 하락하면 경제성장률이 0.15%포인트 둔화하는 것으로, 총고정투자율은 0.36%포인트 하락하고, 국내총생산(GDP)대비 민간소비 비중도 0.25%포인트 감소한다. 이 결과, 고용은 더욱 더 감소할 것이다.

또한, 120만 명의 체감 실업자와 33만 명의 청년 실업을 생각하면, 최근 ‘런던 폭동’(2012. 08. 06)을 서울에서도 곧 볼 수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왜냐하면 한국의 청년 실업자들과 비정규직 종사자들이 사회의 불만세력으로 결집되어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발로 사회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런던 폭동’의 가담자들은 빈민계층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에 대하여 반기를 든 청년세대였다는 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의 청년층은 현대사에서 시대정신(예로서 4·19혁명과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졸업하자마자 ‘신용불량자’와 실업자가 되어버리는 한국의 대학생들이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선거 공약이었던 ‘반값 등록금’을 지키라고 2011년 5월 말 ~ 6월 11일 기간 동안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게다가 연이어 터지는 공직자들의 비리와 부패는 분노를 넘어 좌절을 안겨주고 있다.

모름지기, 청년은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며 나라의 기둥이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의 최대 피해자는 바로 청년이다. 취업의 문은 실로 ‘좁은 문’이 되었다.

청년 실업은 그 자체만으로 개인과 가족의 크나큰 고통이지만 국가적으로도 자원의 낭비이자 성장잠재력의 훼손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불타는 열정으로 한창 일해야 할 청년들이 직장을 못 구해 방황하고 자조 혹은 체념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의 장래가 밝아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마다 매년 졸업생들을 쏟아내고 있다.

실로,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가 갈파하였던 인간의 ‘불안과 절망’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1979년 이후 한국의 대학 강단에서 한 평생을 보내온 저자는 최근 수년 동안 제자들을 보기가 매우 민망하다.

심지어, 저자는 마치 에밀리 브론테(Emily Jame Bronte)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1847)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때로는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1902~1968)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69)에서 오클라호마의 땅을 뺏기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25만 명 빈농(貧農)들의 행렬을 보는 듯하다.

설상가상으로, 간신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였는가 싶더니만, 이젠 글로벌 경제위기가 쓰나미(tsunami)처럼 미국과 유럽으로 확산되고 있다.

저자는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서구의 몰락’,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교수의 ‘미국주식회사의 몰락’(The Fall of America Inc., 뉴스위크, 2008. 10. 13),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의 ‘자유주의의 위기론’, 맨큐 올슨(Mancur Olson)의 ‘국가 흥망성쇠론’, 모한데스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의 ‘국가 패망론’을 뒤적이고 있다.

전술한 배경 하에서, 저자는 경제학자로서의 시대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시도로서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전략적 목표를 “최대다수 최대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에 두고 다음과 같은 한국 사회의 당면과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당면과제로서 다음과 같이 10가지를 지적한다.

저자는 한국의 국가적 목표로서 3가지, 즉 ① 대내적으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Human Capitalism)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며, ② 대외적으로는 동(東)시베리아 및 극동 러시아 지역의 에너지·자원 공동개발과 동북아 경제권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며, ③ 민족적 차원에서는 한반도의 통일과 한민족의 번영을 제시했다. 상기한 민족적 및 대외적 국가목표의 실현은 대한민국을 ‘섬나라’(위에는 북한이 가로막는) 혹은 ‘반도 국가’(만주와 시베리아로 진출하지 못할 경우)를 뛰어넘어 ‘대륙 국가’로 진출 내지 웅비하자는 것이다(임양택, 2007).
즉, ① 재정수지 적자 및 국가채무의 누증, ②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기능적 연계 약화, ③ 경기침체로 인한 저조한 기업의 설비투자와 과도한 가계부채로 인한 내수시장의 침체, ④ 대량실업과 청년실업의 폭증 및 비정규직의 대량 해고로 인한 노동시장의 불안정, ⑤ 만성적인 대(對)일본 무역수지 적자의 급증, 대(對)중국 및 대(對)미국 무역수지 흑자의 급감에 따라 경상수지의 불안정, ⑥ 환율 및 외환시장의 불안정, ⑦ 국내 금융산업의 상대적 낙후, ⑧ 사회보장제도(국민연금제도 및 의료보험제도)의 재정위기, ⑨ 소득분배의 불공정 심화와 소득양극화의 악화로 인한 사회불안의 고조, ⑩ 금융자산·토지·주택소유의 극심한 편중으로 인한 계층간 갈등의 심화 등이다.

상기한 10대 당면과제는 국가발전의 2가지의 축: ① 경제발전과 ② 사회발전의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전자의 핵심적 목표는 국가경쟁력의 제고인 반면에 후자의 그것은 사회보장제도의 개혁과 건실한 복지재정의 확립이다.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은 한국의 고질적인 4가지 갈등구조 즉 ① 이념간 갈등 ② 계층간 갈등 ③ 노사간 갈등 ④ 지역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장·분배·안정을 동시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고용창출형 성장’(Job-Creating Growth)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고용은 생존의 기본수단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기본조건이다. 가족을 거느리고 있는 가장이 직장을 갖지 못하고 있으면 과연 자녀 교육은 커녕 가족과의 대화를 제대로 나눌 수 있을까? 나아가, 사회에서, 이해관계가 첨예한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까?

비버리지 보고서(Beveridge Report, 1948)에 명시되어 있듯이, 완전고용은 가장 합리적인 ‘선진 복지사회’에로의 진입을 위한 기본 조건인 것이다.

고용은 소득을 창출하며, 이것은 다시 소비의 원천이 되어 내수기반을 형성함으로써 대외경제의 충격을 완화해준다. 따라서 ‘선진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완전고용을 달성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비록 실업수당은 없더라도 양호한 직장(decent job)이 ‘최상의 복지’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거리가 멀다. 한국의 실업률 통계에서는 제외하였지만 취업 포기자, 군 입대자, 진학 및 유학자 등은 모두 제외되지만, 공식적 실업의 정의 및 조사방법을 인정하더라도, 정부가 발표한 실업자 수가 96만 명(2009년 6월 기준)이지만 ‘실질’ 실업자 수(2009년 2월 현재)는 329만 5천명(경제활동인구 237만 9천 명 중 실업자 84만 8천 명 + 18시간 미만 추가 취업 희망자 15만 2천 명 + 취업준비자 52만 9천 명 + 구직단념자 등 그냥 쉬었다는 사람 176만 6천 명; 통계청 자료 인용)이다. 이들을 합한 체감 실업자 수가 무려 117만 명(2009년 6월 기준)이다.

특히 청년 실업자 수가 32만 8천 명(2009년 6월 기준)이다. 청년 실업률은 8%로 OECD 국가 중에서 낮은 수준이지만, 실제 취업자 비율을 나타내는 청년 고용률은 40.3%로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이다.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다. '미국식‘ 신(新)자유주의(New Liberalism) 혹은 미국 언론의 호칭인 ’자유주의‘(Liberalism)와 심지어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의 사유 패러다임에 의거하여, 상기의 330만 명의 ‘실질’ 실업자들에게, 과연 당신들(실업자들)은 원초적 능력이 부족하고 자기개발에 소홀히 하였던 결과, 스펙(specification)이 열위이므로 실업 상태를 승복할 수밖에 없다고, 또한 가난은 개인의 책임일 뿐 사회 전체의 책임은 아니라고 각각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에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상기한 실업자들의 생계 유지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하여 고용으로 흡수할 수 있는 성장 메카니즘은 무엇인가? 나아가 537만 명(2009년 3월 기준)의 비(非)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존 롤즈(John Rawls)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 1971)에서 지적하듯이, 공정성(fairness)의 핵심은 운(fortune)의 ‘중립화’(neutralization)이다. 즉, 그들의 사회적 · 자연적 여건을 그들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도록 우연성의 결과 등을 무효화시켜야한다. 이 경우, ‘공정한 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John Rawls 교수의 「정의론」(1971)은 한국과 같은 ‘적당주의’의 척박한 풍토에서 뿌리를 내리기에는 너무나도 ‘고고한’ 철학이다. 아마도, 그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국가’인 미국에서도 정의(正義)가 착근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1953~현재) 교수의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 1982)는 John Rawls 교수의 「정의론」(1971)을 비판한다. 그러나 저자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비판은 철학적 개념의 정의(正義)와 일반 사회현상이 상충되는 상황에서 실천 가능한 정의(正義)의 개념을 재(再)정립하기 위한 시도일 뿐, 존 롤즈 교수가 주창한 정의(Justice)의 철학적 본질을 파기하거나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 임양택 한양대 경제금융대학교수<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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