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제철소 영업이익 10% 내놔라"는 민주노총의 협박정치⑥

 민주노총,금속노조,통합진보당,진보연대가 지난 7일 광양제철소 소본부 앞에서 '함께살자'며 벌인 시위
작고(作故)하신 박태준 포철 회장을 회고할 때마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 하나를 떠올린다.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서의 임무 완수에 대한 보고를 올리던 장면이다.

- 각하! 불초(不肖)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로 시작되는 이 보고문은 지금도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을 울린다.

혁명 이후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철’이 필수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종합제철소’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구상하였고, 이 프로젝트의 실행을 맡은 인물로 박태준을 지목하였다. 

그러나 세계무대에서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가 채 안 되는 한국에 선뜻 ‘제철소를 만들라’며 차관을 제공하거나 기술 이전을 해주겠다고 나서는 국가나 기업, 개인이 있을 리 없었다. 간신히 미국으로부터 투자 약속을 받아냈으나, 미국은 ‘먼저 공장을 지으면 돈과 기술을 빌려주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한국이 포항 영일만에 부지를 마련하자, 미국은 차관 제공 약속을 깨버렸다. 후진국 한국의 제철사업에 회의를 품게 됐던 것이다. IBRD(세계은행)가 미국의 수출입은행에 제출한 보고서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보고서에는 “한국은 노동기술 집약적인 기계공업을 먼저 하는 게 좋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의 작성자 지페박사는 후일 이렇게 기록한다.

 “그때 내 보고서가 틀렸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지금 다시 보고서를 쓰라고 해도 똑같은 보고서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모르고 지나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박태준입니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박태준과 포철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당시 미국의 거부로 망연자실해 있던 박태준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우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받기로 한 ‘대일청구권 자금’ 1억 달러였다. 이 돈은 당초 농업 분야에만 쓰기로 약속됐었지만, 이를 제철소에 전용(轉用)하겠다는 발상을 한 것이다. 박태준은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 일본을 방문했고, 결국 대일청구권자금 중 농업에만 쓰기로 했던 자금을 '제철소 건설'에 쓸 수 있도록 하는 회담을 성사시켰다. “제철소 건설의 목표는 국가안보이며, 한국이 적화하면 일본에도 손해”라는 논리를 폈던 게 주효했다. 

마지막 남은 관문은 ‘기술이전’이었다. 박태준은 일본의 3대 철강회사 사장과 소유주를 따라다니며 기술 이전을 조르기 시작했고, 휴가지까지 따라다니며 읍소한 결과, 박태준은 마침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어차피 한국이 일본의 경쟁상대로까지 크기는 어려울 것이고, 가까운 나라에서 철강 산업과 경제가 일어났을 때 인접국으로써 얻는 효과가 더 클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제철보국(製鐵報國·제철로써 나라에 보답한다)', '우향우 정신'(포철을 성공하게 하지 못하면 오른편 영일만에 모두 빠져 죽자는 각오) 등의 구호를 내걸고 일에 매진했고, 기둥 하나가 잘못 세워질 때마다 가차없이 폭파시키는 그의 완벽주의 속에 포항 제철은 세계인의 칭송을 받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명령을 받은 지 25년 만에,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서 임무 완수에 대한 보고를 올린다. 1992년 10월 3일의 일이었다. 참으로 박태준은 자랑스러운 철강인이며, 대한민국 근대화 성공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영웅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궁극적인 명령 중 두 가지는 아직도 완수되지 못한 채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다. 조국근대화를 위한 새마을 운동과 부국강병에 대한 명령이다. 새마을 운동은 아직도 박정희 대통령이 꿈꾸던 조국의 일부, 남한에서만 완료되었으나 북녘땅은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북한을 수복한 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에 대한 명령을 완수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 열강을 향한 부국강병론 역시 미완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는 통일 후 새마을 운동을 북녘땅에 전개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세계 제1의 나라로 나아가는 위대한 작업을 마친 뒤, 박태준 회장처럼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서 임무완수에 대한 보고를 올려야 한다. 

명령을 받은 자는 그 명령을 완수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은 미완의 상태이고, 우리는 아직도 살아있다. 이제 그 임무를 마쳐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조국근대화 기수들은 다시 총과 삽을 잡자.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명령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영전에 올린 박태준의 보고서

 각하!

불초(不肖)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포항제철은 '빈곤타파(貧困打破)와 경제부흥(經濟復興)'을 위해서는 일관제철소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각하의 의지에 의해 탄생되었습니다. 그 포항제철이 바로 어제, 포항, 광양의 양대 제철소에 조강생산 2,100만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大長征)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게!“ 

1967년 9월 어느 날, 영국출장 도중 각하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온 제게 특명(特命)을 내리시던 그 카랑카랑한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그 말씀 한마디에, 25년이란 긴 세월을 철(鐵)에 미쳐, 참으로 용케도 견뎌왔구나 생각하니 솟구치는 감회를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형극과도 같은 길이었습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불모지에서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일이 없는 39명의 창업요원을 이끌고 포항의 모래사장을 밟았을 때는 각하가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자본과 기술을 독점한 선진철강국의 냉대 속에서 국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한숨짓기도 했습니다. 터무니없는 모략과 질시와 수모를 받으면서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철강은 국력'이라는 각하의 불같은 집념, 그리고 13 차례나 건설현장을 찾아주신 지극한 관심과 격려였다는 것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포항제철소 4기 완공을 1년여 앞두고 각하께서 졸지에 유명(幽明)을 달리하셨을 때는 '2,000만 톤 철강생산국'의 꿈이 이렇게 끝나버리는가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철강입국(鐵鋼立國)'의 유지를 받들어 흔들림 없이 오늘까지 일해 왔습니다.

 그 결과 포항제철은 세계 3위의 거대 철강기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각하를 모시고 첫 삽을 뜬 이래 지난 4반세기 동안 연 인원 4천만 명이 땀 흘려 이룩한 포항 제철은 이제 세계의 철강업계와 언론으로부터'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철강기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제 힘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필생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 순간, 각하에 대한 추모의 정만이 더욱 솟구칠 뿐입니다. 

"임자 뒤에는 내가 있어. 소신껏 밀어 붙여봐."하신 한마디 말씀으로 저를 조국 근대화의 제단으로 불러주신 각하의 절대적인 신뢰와 격려를 생각하면서 머리 숙여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각하!

일찍이 각하께서 분부하셨고, 또 다짐 드린 대로 저는 이제 대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진정한 경제의 선진화를 이룩하기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하면 된다.'는, 각하께서 불어 넣어주신 국민정신의 결집이 절실히 요청되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혼령이라도 계신다면, 불초 박태준이 결코 나태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25년 전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잘 사는 나라'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불민한 탓으로 각하 계신 곳을 자주 찾지 못한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 엎드려 바라오며, 삼가 각하의 명복을 비옵니다. 부디 안면(安眠)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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