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은 과연 지식인인가?

공지영씨의 나찌 논란으로 세상이 뜨겁다. 전 국민이 바쁘다. 그들은 한 정신 나간 작가를 계몽시키고 있다. 국민을 계몽시켜야 할 작가가 오히려 국민한테 훈계받고 계몽을 받아야 하다니 정말 공지영씨가 작가가 맞는지 궁금하다. 댓글 훈계를 훑어보니 '공지영보고 지식인이 아니'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댓글이나 추천수를 훑어 보니 공지영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웃들이 너무나 극소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에 매우 안심하고 전혀 슬퍼하지 않고 있다.

필자도 한 불쌍한 작가를 위해서 데일리안에 기고한 칼럼 ‘공지영과 통영의 딸 (2012년 10월 19일)’을 약간 수정보완하여 올린다. 이것 또한 공지영이 가진 질병을 치유해 주기 위함이다. 공지영의 병은 무엇일까? 지독한 허영끼다. 공지영은 ‘허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는 것 같다. 박근혜의 당선이 아무리 마음에 안든다 한들 나찌, 유신이 왜 나와야 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된다.

더불어 공지영에게 한가지 조언을 해 주고 싶다. 공지영이 지금의 허접한 수준에서 벗어나 참 작가가 되고 진정한 지식인이 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남북 분단의 비극을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는 '통영의 딸'과 같은 인권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면 된다. 이건 공지영씨가 눈물을 흘렸다는 '표현의 자유' 정도의 문제가 결코 아님은 잘 알 것이다. 더군다나 나찌, 유신은 30~ 40년도 더 지난 역사 속의 일이지만 통영의 딸들이 받고 있는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지 않은가? 북한에서 신음받으면서 아빠도 못 만나고 있는 통영의 딸들과 공지영의 세 딸은 아마 비슷한 나이 또래일 것 같은데, 부디 참다운 모성(母性)으로 규원이 혜원이에게도 관심을 좀 가져 주었으면 하고 진심으로 빈다.

공지영 같은 유명인이 이렇게 중요한 일에 앞장 서 준다면 이 불쌍한 딸들이 천군만마의 십자군을 얻게 되는 셈이기에 하는 말이다. 2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가진 공지영이 통영의 딸 문제를 트위트에 한 줄만 언급해도 그 파급효과로 북한에서 신음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복음이 될 것임은 확실하다. 공지영씨가 싸구려 박수갈채보다 자신의 내면에 충실해진다면 이 일은 너무나 쉽다. 공지영씨가 말하는 표현의 자유를 맘껏 활용하면 된다. 공지영씨가 연세대에서 행한 연설 중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쓸 수 있는 말이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싸구려 박수갈채 쯤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한국 좌파들은 인간 본성을 회복해야

인권의 문제, 특히 국가 권력기관에 의해 자행되는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좌파인권단체에서 관심을 갖고 운동을 해 주어야만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빨리 그 고통에서 해방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의 우파 단체에서는 북한 인권문제 개선에 대해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좌파단체에서는 어깃장을 놓거나 훼방을 놓기 일쑤다. 한국 좌파진영의 문제는 이념보다 그 사람들의 수준이 매우 낮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너무나 위선적이다. 기본 소양이 부족한 사람들이 좌파에 너무나 많이 득실거린다. 오죽하면 이번 박근혜 당선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두 여인으로 이정희와 공지영을 꼽고 있겠는가?

과거 북한 인권운동을 헌신했던 독일 의사 폴러첸에 대해 좌파미디어들이 도와주기는커녕 일방적으로 헐뜯었던 전례가 있고, 좌파 진영의 총수격으로 지목받고 있는 박원순 시장마저도 북한인민들의 인권 탄압에 대해서 ‘정보가 부족해서 모르겠다’는 해괴한 답변을 내놓아 대중의 지탄을 받은 바 있다.

그의 ‘인권’변호사라는 과거 이력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이에 반하여 존 베어드 캐나다 외교부 장관은 9월 21일(현지시간) '통영의 딸'로 알려져 있는 신숙자씨와 두 딸의 북한 정치수용소 수감 정보를 즉각 공개할 것을 북한에 요구하고, "이들 가족에 대한 북한의 가혹한 처우는 북한 내 수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 중대한 인권 침해가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만 명이 수용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정치범 수용소를 전면적, 즉각적으로 폐쇄하고 이들을 가족에게 돌려보낼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고 선언했다.(벤쿠버 = 연합뉴스) 서울시장 박원순과 캐나다 장관 베어드의 북한인권탄압에 대한 정보를 대하는 태도와 목적이 이렇게나 차이를 보이는 건 한국인으로서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다.

한국 정치인들의 탐욕에서 비롯한 위선적인 활동이야 사람들이 다 알고 면역이 될 단계에 와 있으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좀 더 진실과 양심에 충실해야 한다고 기대되는 공지영 같은 작가들의 경우는 다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통영의 딸’ 문제에 개입하여야 한다. 이 문제에만은 순수한 인도적 견지에서 발벗고 나서 작가의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호소를 한다면 전세계 참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연합하여 대단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소셜테이너들에게 이 문제가 싸늘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게 역사적 비극이자 아이러니다.

공지영의 주홍글씨

나다니얼 호오도온을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 <주홍글씨, Scarlet letter>다. 소설의 무대인 17세기 매우 보수적인 공동체인 보스턴에서 헤스터(Hester) 프린이라는 여주인공은 너무 오랫동안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딤즈데일이라는 목사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가진다. 아비가 누구인지 밝힐 수 없는 이 여인은 평생 'A(adultery, 간통)'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살아가게 된다. 이 'A‘표식은 요즘 말로 소위 “개념”으로 충만한 마을 사람들이 주었다. 그런데 400년도 더 지난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도 해괴한 ‘개념’에 가득 찬 아줌마 한 분이 주위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개념없다“라는 주홍글씨로 된 낙인을 찍어 큰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이 ‘개념‘이 철철 흘러 주체가 안되고 있는 아줌마가 누군지는 이름만 대면 잘 알 것이다. 공지영씨다. 그녀는 보통 아줌마가 아니라 한국에서 매우 유명한 작가다. 그녀에게서 해괴한 주홍글씨를 발부받은 사람은 국민영웅으로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김연아 선수와 혼혈가수 인순이씨다. 과거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할 때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축가를 불렀다. 그런데 그때 김대중에게 반대표를 던진 사람들이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조수미씨를 디스하고 안티하였든가? 필자 기억에는 아무도 없었다. 설사 속으로 못마땅해도 그 일로 조수미씨를 탓하는 사람은 안 보였다. 이런 게 바로 민주적 소양이다.

그런데 한번 따져 보자. 김연아는 힐러리 클린턴과도 직접 소통하면서 그야말로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리더격에 있는 인물이라 공지영과 비교 자체가 안될 인물이다. 그런데 이 아줌마, 김연아 선수를 좋아했단다. 문제는 김연아 선수가 이 아줌마의 갸륵한 사랑을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하면서 못 헤아려 받들고 그녀의 독특한 취향과 해괴한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해서 ”개념없다”는 낙인을 받았다는 데 있다. 혼혈가수 인순이씨도 소위 ’공주‘처럼 아무 개념 없이 살아온 인물이 결코 아니다. 단일민족과 순혈주의로 꽉 막힌 한국 사회에서 온갖 차별을 딛고, 그것도 가장 차별받는 인종인 흑인이자 또 여성으로서 유일무이하게 한국 연예계에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구축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두 사람이 살아 온 인생을 어느 모로 비교하더라도 소설가 공지영에게 개념딱지를 받고 말고 할 정도의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입장이었다면 수긍할 사람이 훨씬 많았을 거로 생각된다. 공지영은 짧은 지식으로 사회문제에 이러쿵 저러쿵 나대기 전에 주제파악부터 먼저하기 바란다. 오죽 하면 한국인의 90% 이상이 공지엳 작가를 호되게 교육시키고 있는지 이 사랑을 감사하게 그리고 겸허히 받아 들여 거듭났으면 한다. 아침에 도를 통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도 있지 않든가?

작가

어느 분야든 창작의 고통을 안고 사는 작가나 예술가들은 누구보다 자유로운 공기를 필요로 한다. 수질로 따진다면 작가야말로 자유라는 산소가 가장 풍부한 1급수에서 살아야 하는 종(種)이다. 그리고 이 자유를 위해 투쟁해야할 양심적 소명마저 가져야 하는 존재다. 수질이 혼탁해지면 이름있는 작가는 창작보다 선동에 앞장서라고 강요받는다. 그 짓을 하다보면 그땐 더 이상 작가일수가 없다. 영혼이 없는 좀비나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고 그가 가진 재능 또한 영혼이 없는 타짜의 기술로 전락한다. 유명 작가일수록 효율적인 선전 도구로 이용된 후 희생당해 왔다는 건 인류 역사가 증언한다. '통영의 딸' 사건은 세계적인 작곡가로 알려진 윤이상이 한 가정의 행복을 풍비박산시키고 한 남성과 세 여인의 인권까지 철저히 유린한 범죄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 일로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 해괴한 김연아·인순이 개념 사건에서 공지영은 작가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스스로 ‘철학의 빈곤’을 확실히 드러냈다. 철학이 없다 보니 그 빈 공간에는 오만과 독선이라는 해괴한 ‘개념’이 차지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녀는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편을 갈라서 한국 사회의 자유를 질식시키며 주위 사람들에게 동물적 본성을 드러내 으르렁 거리며 물어 뜯게 만드는 일에 여전히 앞장 서고 있다. 이런 행동에 앞장 서 놓고서 슬퍼서 하루 동안 어쨌다나? 아무리 봐도 공지영은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할 정도로 중증인 것 같다. 병명은 아마도 과대망상증 아니면 심각한 공주병 즈음으로 나올 것 같다.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사람은 유명 작가의 이런 어이없는 행동까지 감수해야하는 한국인 전체다.

네티즌들이 질책을 하니, 아예 “김연아가 자기 딸이라도 그랬을 거”라고 한 술 더 떴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걸 아예 자랑삼아 말한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할 것이다. 공지영이 아니라 공지영이란 엄마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딸이. 공지영의 불행은 작가로서 이런 점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도 못 느끼고 살아온 데 있다. 그녀 스스로 ‘개념’을 갖추었다고 착각하고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녀에게 정작 있어야 할, 더 중요한 ‘철학’이 없다. 그래서 자청해서 도끼로 자신의 발등을 찍는 일에 앞장 선 것이다. 필자가 공지영이 자기 발등을 찍었다고 말하는 건 그녀가 ‘일등석’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꾸며내 편가르기와 선전·선동질하다 들통나 삭제하고 도망치는 꽁무니를 내보여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챙피를 당한 일이 아니다.

공지영씨께 드리는 질문

공지영씨가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필자가 이 질문을 하는 건 그녀가 바라는 세상이란 무엇보다 ‘공지영 같은 작가들이 숨을 쉬지 못하는 세상’이겠기에 하는 말이다. 이는 북한의 ‘요덕수용소‘를 연상시키는 <수용소군도>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솔제니친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통영의 딸>로 세간에 드러나고 있는 윤이상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공산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패거리에 의해 선전도구로 철저히 이용당한 일생을 살다가 급기야는 한 가정의 행복을 갈가리 찢어놓은 반인륜적인 범죄자로 전락했다. 예술가로서 이보다 치욕적인 삶이 있겠는가? 가히 천벌이라 할 만하다.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이 제 아무리 예술가적 양심을 지키고 싶었다 하나 그가 당의 명령을 거역하는 순간 반동이라는 소위 "개념없는" 인간으로 낙인 직힌 후 처형을 받고 그 가족까지 요덕수용소에 가야 했을 것은 불문가지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 창작에 힘쓰야 할 예술가가 한 가족을 찢어 놓는 도구로 쓰이다니 이 얼마나 참혹한 인생인가? 오히려 피해자인 신숙자님이 영혼을 박제당한 길을 택한 윤이상씨보다 훨씬 철학적이고 강한 정신력을 갖춘 인격의 소유자임을 확인한다. 참으로 강한 정신력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양심을 온 몸으로 표현한 그 분의 편지를 보자.

“누구나 서 있는 자리보다 더 높은 곳을 모색하고 지향하는 한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어요. 나는 당신이 우리를 이곳으로 우격다짐으로 데리고 온 과오에 대해, 어떤 백치도 어떤 눈먼 장님도 저지르지 않을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당신이 내 남편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받을 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럽고 저열한 범죄 공모자의 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청순한 사람들을 음모의 희생물로 만드는 역할을 맡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돼요. 자주니 평화니 민족 대단결이니 그럴싸한 간판을 내걸고 사람의 피와 살이 되어야 마땅한 값진 것들로 전쟁 준비를 하느라 탕진하여 이곳 주민들은 허기져 있고 모두들 지쳐있어요. 사회주의라는 것도 아무런 내용물 없는 빈 껍데기나 베 쪼가리처럼 바람에 찢겨 펄럭거리는 허깨비에 불과해요. 무상 교육제도, 무상 의료제도 나발을 요란하게 불어대지만 모두가 다 빈 깡통이에요. 의약품도 없는데 무슨 의료제도예요,

당신, 인민들에게 나눠줄 볼펜 하나 변변한 거 본 적이 있어요?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되어 있다고 선전해대지만 치사(致死) 노동에 시달리다가 정년퇴직하면 한 달에 20원씩 받아요. 필터가 달린 담배 한 갑 값이죠. 이런 땅이 지구촌에서 몇이나 되겠어요. 이렇게 살려면 차라리 애들과 함께 죽겠어요. 당신 하나만이라도 빠져 나갈 수 있다면 우리 몫을 살아 줘요. 나는 애들에게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어요. 혜원 아빠, 당신 떳떳한 인간으로 살다가 죽어야 해요. 올가미에 씌워서 이리저리 끌려 다녀서는 한이 없어요.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나가서 석 달 안에 우리를 이곳에서 빼내 주세요. 그렇게 안될 때 우리는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도록 하세요. 더럽게 살아가는 생명은 존귀하지 않아요. 제발 술 많이 드시지 말고 못난 사람처럼 눈물 흘리지 말아요. 나와 혜원이 규원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세요.

우리의 몸은 이곳에서 죽겠지만 마음은 살아서 당신의 심장 속에 있겠어요. 백번 거짓말하다 보면 한번은 속아 넘어 간다고 보는 대남사업 방송기구의 앵무새 방송원 노릇하려고 반평생을 밤잠 설쳐 가며 공부했어요? 아니잖아요. 청순한 젊은이들이 당신으로 인해 이곳으로 유인돼와 치욕스러운 방송원 노릇을 강요당한다면 당신은 죄를 짓는 거예요.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예요. 그 범죄 공모에 절대로 가담해서는 안 돼요. 도망치세요. 우리야 무슨 죄가 있어요. 그래도 죽인다면 죽으면 그만이죠. 하지만 우리를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 우리를 죽인다면 자기들의 체제가 병약하다는 걸 알리는 거예요...다시 한 번 부탁해요. 정의를 사랑하는 순결무구한 젊은이들이 대남 공작기구의 제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혜원 아빠, 이 말 명심하세요‥‥‥ 나가세요."

한 인간으로서 이보다 강인하고 양심에 투철한 말이 있을까? 읽는 순간 가슴이 서늘하게 떨려온다. 공지영의 작품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 저울에 달면 이 짧은 육필 원고 한 장의 무게보다 더 나갈까? 어림도 없을 것이다. 필자는 대중의 시선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왔고 육신마저도 지옥같은 수용소에 갇힌 신숙자님에게서 진정한 자유인과 철학자의 삶을 확인한다. 공지영은 이 짧은 육필원고를 받들고 진정한 작가 정신의 실오라기 한 가닥이라도 구걸해야 할 것이다. 신숙자님이 윤이상처럼 곡학아세하는 삶을 살았다면 가족이 헤어져 살 까닭도 없고 지옥같은 요덕수용소에 갇혀 육신의 고통을 받으며 살 이유도 없다. 그녀는 스스로 육신의 고통을 사는 대신 정신적 자유를 택했다.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가져야 할 진정한 자유의 정신이자 철학이다.

남한의 경우 김일성·김정일을 신봉하며 찬양하는 종북주의자들 조차도 자유로운 삶을 살아간다. 이들이 북한에서 남한체제를 찬양헀다가는 '개념없는' 반동분자로 몰려 수용소에서 짐승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는 공지영처럼 영향력 있는 유명작가일수록 더욱 가혹한 응징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공지영의 목걸이

공지영이 대중에 보인 해괴망측한 행동들을 보면서 필자는 자연스럽게 모파상의 ‘목걸이’가 생각났다. 허영(虛榮)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허비한 불쌍한 여인! 누군가가 필자에게 허영의 반대를 물으면 언제나 철학(哲學)이라고 대답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 공지영의 작가답지 못한 행동을 보고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혼돈에 빠진 영혼’, ‘상식과 순리를 파괴하는 지성(知性)의 이탈’이라 귀중한 훈계를 해 주었지만 필자는 작가 공지영이 ‘허영에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참으로 가련한 모습을 보았다.

공지영이 아무리 재능있다고 한들 한국의 신경숙의 경지에 이를 수 없고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대작을 내 놓을 수 없는 근원적인 이유를 제대로 본 것 같았다. 공지영에게는 제대로된 작가정신이나 수준높은 철학 자체가 아직 깃들지 못한 것이다.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의 독도분쟁을 “싸구려 술에 취한 난폭한 행동”이라 말하면서 전 일본인으로부터 원성을 듣더라도 작가로서의 양심을 지키는 발언을 했다. 공지영은 스스로 불순한 세력들의 선동가가 되어 작가 정신을 저버리는 대가로 싸구려 박수갈채를 원하지 않았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성장통

필자는 공지영씨가 우리 앞에 보여 왔던 실망스런 모습들을 그녀가 진정한 자유인으로 가기 위한 일종의 성장통으로 믿고 싶다. 그녀가 자랑해 마지 않고 그녀의 묘지명에도 넣고 싶다고 했던 그 '열정'에 참다운 가치들(virtues)이 스며들길 진심으로 빈다. 모든 열정이 아름다울 거라는 건 혼자만의 착각이다. 철학이 빈곤한 상태에서 가치 정립이 잘못된 열정은 통제하기 힘들고 사악한 집단의 나쁜 목적에 이용당하기 쉽다. 실제로 인류의 거대한 악(惡)은 '그릇된 열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작가 공지영은 자신이 자랑하는 열정이 이런 철부지 상태의 너절함이 아니었는지 한번쯤 되새겨 보기 바란다. 소설 ‘주홍글씨’는 마지막에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이 딤즈데일 목사와 함께 그녀에게 주홍글씨를 발부한 마을을 빠져 나가려고 주홍글씨를 강에 빠뜨렸을 때, 최고의 비극에 이른다. 필자는 이 대목을 이 소설의 최고의 장면으로 친다. 그녀가 온갖 희생을 다 하면서 키워 온 딸, 펄이 깜짝 놀라며 그녀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회피했던 것이다. 이는 편견과 그릇된 개념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낳고 길러 온 가장 소중한 딸의 의식 세계까지 파괴했음을 상징한다.

아마도 이 경험은 공지영이 나꼼수 비키니 가슴녀 논란으로 자신의 굳건한 이웃이라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자로 낙인 찍이며 비난을 샀던 일로 충분히 경험했으리라 생각한다. 공지영 스스로 그릇된 개념에 찬 나꼼수 치어리더 역할을 자임하다가 비키니 가슴녀 논란이 터지자 이 사태를 두둔하거나 가만히 두고 보다가는 그동안 작가로서의 공지영의 취약점으로 비평가들에게 공격받아 온 페미니즘이라는 아킬레스건이 부각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결국 이 문제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의 입장을 위해 이에 반대하다가 나꼼수 일파와 그 지지자들에 ‘B(Betrayer, 배신자)’ 라는 주홍글씨를 발부받은 일에 해당한다. 공지영으로서는 실로 ‘멘붕’이라할 만큼 비극이었지만 이는 냉정하게 보면 공지영의 ‘철학없는 열정’이 초래한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이 즈음에서 마이클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대목을 한번 음미해 보자. "하지만 인간으로서 (하등동물과 다른) 비교가치가 무엇인가? 무엇을 하느냐 뿐만아니라 어떤 태도로 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인격도 중요하다. 밀에게 ‘개성’이 중요한 이유는 쾌락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인격(人格)’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영혼이 빠져나간 나팔수들

한국 문단 역사상 거의 혼자의 힘으로 ‘판타지 문학’이라는 장르를 개척해 냈고 단행본 출간 사상 이문열의 ‘삼국지’ 다음으로 1000만부에 이르는 경이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한 퇴마록의 작가 이우혁은 일부 작가들이 트위터에서 수많은 팔로어를 거느리는 것에 대해 “작가들이 나팔수나 확성기가 되어 조종당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질타한 일은 많을 것을 시사한다. 한국의 소위 이름있는 소셜테이너들은 그들을 유혹하는 일이 잦아진 대선을 앞둔 시기에 이 말을 한번 쯤 되새겨보고 자신의 삶을 가다듬어야 할 일이다.

글/김휘영 문화평론가·행복문화발전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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