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우수영-진도 벽파진, 용장산성을 거쳐 남도진성 그리고, 배중손

▲ 삼별초 배중손 장군의 동상이 있는 배중손 사당 정충사, 이곳은 남도석성에서 여·몽연합군에게 패한 후 굴포 해안 쪽으로 이동하다 최후를 마친 것으로 전해지며 당시 희생된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당을 지어 제를 모셨던 자리였다고 한다.
해남 우수영과 진도 녹진 사이 명량해협의 길목에 벽파진은 자리하고 있다. 1984년 진도대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진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이 곳 벽파항에 들어서면 넓은 주차장 뒤쪽 바위 언덕 정상으로 명량대첩의 주인공, 전무후무한 세계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불멸의 이순신, 바로 ‘이충무공 전첩비’가 우뚝 서 있다.

진도 군민들의 정성어린 성금으로 1956년 11월 29일 제막식을 가졌으며, 노산 이은상선생이 글을 짓고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걸작의 글씨를 남겼다.

‘이충무공 전첩비’에는 이순신과 명량대첩에 대한 당시의 역사가 적혀있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새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옥에서 풀려나와 삼도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땅 벽파진에 이르니...15일에 진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작은 배로서 330척의 배를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깊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 2001년 진도향토유형유산 제5호로 지정. 정유재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명량해전 승전을 기념하고, 명량해전에서 순절한 진도 출신 참전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1956년 건립한 비석으로, 비문은 노산 이은상, 글씨는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썼다. 벽파진은 명량해협의 길목으로 예전에는 진도의 관문이었다.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와 진도군 고군면 녹진리를 잇는 484미터의 다리가 1984년 준공됐다. 그리고 2005년 제2진도대교가 놓이면서 지금은 쌍둥이 다리가 되었다. 울돌목을 가로 지른 이 진도대교 아래로 세차게 흐르는 바닷길.

이곳이 바로 세계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해전, 불멸의 영웅 이순신, 바로 명량대첩의 현장이다.

정유재란 당시 던 1597년 9월 16일, 영웅 이순신의 '명량대첩'은 만고에 빛나는 명언 ‘필사즉생 필생즉사’정신으로 무장한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의 배로 10배가 넘는 왜선 133척을 물리친 세계 최고의 해전이었다.

이 곳 벽파진은 임진왜란에 훨씬 앞서 고려시대 배중손과 삼별초의 비굴하지 않았던 우리 민족의 전통성을 일깨운 대몽항전의 전초기지였던 곳이다.

아직 조명하지 못한 역사의 현장 벽파진, 피비린 내 나는 용장산성과 남도진성을 오가며 오직 오랑캐의 종노릇 보다는 죽음을 선택하고 떠나 온 배중손과 삼별초군의 영혼들이 지금도 항구에 들어오는 배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듯하다.

고려시대 1232년 부터 40년에 걸쳐 시작된 재앙, 몽골군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당한 나라의 참상, 그들에 의해 자행된 살인·강간·약탈..., 시체가 산을 만들고 핏물은 강이되어 흘렀다는데... .

▲ 벽파진 인근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가면 용장산성을 만난다. 현재 용장사(위)의 모습과 성은 사라지고 성터만 남은 둘레 13km의 용장산성 터(아래). 용장산성은 배중손이 1270년 몽골에 항복한 고려왕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온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강화도를 떠나 이곳에서 웅거하면서 정부와 몽골에 대항하는 9개월의 진도정부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벽파진 인근에 용장산성이 있다.

고려시대 항몽의 아이콘 삼별초의 배중손 장군이 1270년 몽골에 항복한 고려왕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강화도를 떠나 이곳 진도에 웅거하면서 정부와 몽골에 대항하는 9개월의 진도정부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몽골에게 항복을 거부하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용사들, 1270년 고려 원종 11년 6월 3일 1000여척의 배를 타고 강화도를 떠난 배중손과 삼별초군은 그 해 8월 진도에 도착하였다.

이 곳 용장사를 왕궁으로 삼고 승하후 온은 황제가 되었다. 그것은 몽고의 왕을 황제라 하였고 고려왕은 왕으로 칭하던 것에 견주어 스스로 고려왕보다 지위가 높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는 개경의 고려 왕실을 무시하고 별도의 진도정부를 세우고 연호를 오랑이라 하였던 것이다.

천하무적 삼별초군은 해상으로 수송되는 세공으로 정부재정문제를 해결하면서, 전라도·경상도 주민들과 개경 관노등의 호응에 힘입어 남해연안과 나주·전주에까지 출병, 관군을 격파하는 등 그 위세를 만방에 떨치기도 하였다.

용장산성과 함께 배중손이 이끄는 항몽의 근거지가 되는 남도진성은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서 만난다. 용장산성과 함께 여·몽연합군의 침범을 방어하기위해 당시 축성했으며, 이곳에서 배중손과 삼별초군은 1271년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몽골의 홍다구 연합군에 패해 떼죽음을 당한 곳이다.

이 곳 남도진성의 함락으로 진도정부는 무너지고 살아남은 삼별초 군인들은 김통정의 지휘로 제주도로 들어가 2년에 걸친 항쟁에 돌입했으나 결국 이들도 1273년에 이르러 멸망하게 된다는게 삼별초의 역사다.

지금은 성내에 민가가 들어서 있다. 삼별초 이후 남도진성은 조선시대에 들어 왜구의 잦은 침탈을 막기 위해 재축성하고 해안방어를 위한 수군의 성으로 활용했다.

남도석성을 떠나 굴포리에 들어서면 항몽장군, 삼별초의 배중손 장수를 배향하는 사당 정충사가 나타난다. 1959년 건립한 정충사는 1999년 동상과 함께 재건축했으며 2칸 규모의 맞배지붕 집으로, 대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 용장산성과 함께 배중손이 이끄는 항몽의 근거지가 되는 남도진성은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다. 여·몽연합군의 침범을 방어하기위해 당시 축성했으며, 이곳에서 배중손과 삼별초군은 1271년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몽골의 홍다구 연합군에 패해 떼죽음을 당한 곳이다. 이후 왜구의 침탈이 잦아들면서 조선 영조에 들어 재축성되고 해안방어를 위한 수군의 성으로 현재의 남도진성 형태를 띄게 된 것. 석성 앞에 남도진성의 수장 중 뛰어난 수군만호의 공적을 기리는 ‘만호비’(좌측 아래사진)가 있다. 현재 성내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어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했다(우측 아래사진). 성내 제일 위쪽애는 조선시대 수군 수장의 관아(우측 위사진)가 자리 했다.
이곳은 남도석성에서 여·몽연합군에게 패한 후 굴포 해안 쪽으로 이동하다 최후를 마친 것으로 전해지며 당시 희생된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당을 지어 제를 모셨던 자리라고 한다.

배중손 항몽의 역사, 삼별초 굴욕보다 죽음을 택한 용장들의 고장, 이순신 명량해전의 근거지 그리고, 이광사 700여 유배의 땅, 소치 허련... 진도는 이제 예향의 고장이요 전통문화의 보고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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