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향교(전교 장성년)에서 향사하고 있는 해남 계곡면 용지리에 위치한 동복오씨 문중의 사당 용지사(원장 임창길)에서는 9월 24일 제향을 봉행했다.

성균관유도회 해남군지부 임형기 회장이 참여한 가운데 임창길 원장의 주재하에 해남향교에서 파견된 제관 유림과 배향 위 본 후손 등이 단제 참의공 오극신 등 배향 4위의 공덕을 기렸다.

해남향교에서 관리하고 있는 17개 원.사에 속하는 용지사의 이날 향배는 향교의 석전대제에 준하는 의식을 갖추고 엄중한 가운데 향례를 진행했다.

제관으로는 초헌관에 임권진(원로장의), 아헌관에 박동선(을미장의 회장), 종헌관에 김상대(방춘서원 문임), 집례에는 윤인식(대의원), 축관에는 손은수(청년회장), 장의에는 박성기(임인장의) 장의를 비롯하여 동복오씨 본손인 오성열, 오승령, 오문식, 오병천 씨 등이 찬인과 봉향, 봉로, 사준을 맡아 정성어린 예를 올렸다.

의식은 먼저 초헌관이 분향하고 폐백을 올리는 전폐례를 시작으로 초헌관이 첫 잔을 올리고 대축이 축문을 읽는 초헌례, 아헌관이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 종헌관이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종헌례, 음복례(飮福禮), 망료례(望燎禮)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제향을 지낸 용지사(龍池祠)는 참의공 오극신, 그리고 오극신의 아들인 장령공 오계적, 오극신의 조카인 용호공 오홍적, 해금공 오달운 등 4위가 모셔져 있다.

구국의 충신으로 명성을 떨친 단제 오극신(1554~1597)은 해남 계곡면 이곳 용지리에서 출생했으며 임진왜란 때 출전하여 목숨을 바친 인물로, 이러한 그의 혁혁한 공을 인정한 선조 임금이 병조참의(兵曹參義)를 증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했다.

오극신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들 계적과 조카 홍적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충무공 이순신 막하로 가서 명량해전에 출전하여 선봉장으로 왜선 70여척을 격파한 큰 공을 세워 일본군을 떨게 하였으며 세계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이순신의 명량대첩의 승인가운데 한명의 이름을 올렸으며 안타깝게 명량해전의 승리를 앞에두고 아들 계적과 함께 그곳에서 전사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이순신 장군은 "나의 오른팔을 잃었다"며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오극신의 아들 오계적은 명량해전에서 무기가 바닥을 들어내자 돌과 창 등으로 난파선을 탈출하여 육지에 오르는 일본 수군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용호공 오홍적은 극신의 조카로 한성시에 장원급제한 문무를 겸비한 선비로 역시 오극신을 따라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흑석산 전투때는 돌무더기를 산 곳곳에 쌓아두고 아래로 글려 일본군을 섬멸시켰다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해금공 오달운(1700∼1747년)은 태어날 때 흑석산 바위가 모두 흰 바위로 변했다고 전해지며 찰방 벼슬을 지냈고 하늘이 내린 성리학자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해금집을 후손들이 해금문집으로 펴냈는데, 해금문집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큰 귀감으로 남아있다.

임창길 원장은 제향을 마치고 진행된 공포식에서 "오늘 용지사 동복오씨 본손들이 참례하여 그 복이 대대손손 이어지라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하고 "또한 해남향교에서 파견오신 제관 여러분의 오늘 수고도 헛되지 않음을 선열들이 지켜봐 주신것 같다"며 노고에 감사를 전했다.

한편, 해남향교에서 관리하고 있는 원(해촌서원, 미산서원)과 사(용지사 등 15개 사당)는 모두 17개소로 각 원장은 전교가 임명하며, 서원이나 사당일을 도맡아보는 색장에는 문중에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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