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인간'이 넘친다. 요사이 주말은 말 할 것도 없고 평일 오전에도 지하철엔 건장한 등산객들이 그득하다. PC방이나 극장 역시 종일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또 요양원에 가 본 사람이면 금방 눈치 챌 것이다.

아, 머잖아 나라가 망하겠구나! 아직 한창 일 할 수 있는 건장한 장년들이 산을 찾아야 하고, 살만큼 살고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 사람을 돌보기 위해 멀쩡한 젊은 사람들이 3교대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해결 난망해 보이는 실업은 노동(실은 고용)의 종말이라는 우려를 현실화시키고 있다. 빈부의 격차보다 직장 유무,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가 사람의 신분을 가리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부의 분배 이전에 노동의 분배가 무엇보다 시급하지만, 새로운 종류의 노동을 창조하고 개발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 과제라고 부르짖지만 그게 헛된 구호에 지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최부자가 할 일을 정부가 하면?

복지제도 만드는 것이나, 빚내서 생색내기 토목공사 벌이는 것이나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짓이다. 차라리 토목공사라면 눈에 보이기라도 하지만, 복지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나라 망할 때까지 영원히 없어지지도 않는다. 복지는 암처럼 속에서 커지고 퍼지는 성질이 있다. 다 자라 증세가 나타낼 때에는 이미 늦는다. 결국 숙주가 죽어야 저도 죽는다.

장애자나 취약계층에 대한 자선은 실상 사회적 배려이다. 이를 정부가 하면 복지제도라 부른다. 즉 제도화된 자선이다. 자선 그대로라면 수혜자가 고마운 마음이라도 갖지만, 공공의 복지혜택은 당연한 것이라 여겨 절대 고마워하지 않는다. 자선을 중단하면 섭섭해 할 뿐이지만, 복지가 중단되면 원망하고 항거하게 된다. 이를 정부가 대행한다고 해서 당연한 권리인양 내놓으라고 하는 것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혜택을 받으면 받을수록 요구는 더 강해진다. 결국 주는 쪽보다 받는 쪽이 더 권력이 세어져 베푸는 쪽이 오히려 끌려가게 된다.

국가가 시민단체처럼 재벌 주머니 털어서 복지하는 것 아니다. 무엇보다 고마워 할 줄 아는 복지여야 한다. 아무리 인도적인 것도 좋지만 기본적인 배려심에 서로 공감하지 않으면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을 불러올 것은 빤한 일. 생색나지 않고 고마워하지 않는 복지에 세금 뜯기고서도 뿌듯함을 느낄 만큼 우리 국민들이 성숙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더하여 복지와 서비스의 개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생산적인 복지만이 서비스이다. 복지를 유권자들에 대한 서비스로 인식하는 정치인들이 문제다.

최대한의 복지는 민주주의의 아편이다.

공산주의는 멸망했는가? 아니다. 적이 없어져 긴장이 풀려 절로 썩어가는 민주주의를 거름으로 한창 피어나고 있다. 복지란 이름의 꽃으로 말이다. 자유가 민주주의의 뿌리라면 평등은 그 줄기요, 복지는 그 꽃이다. 멸망의 꽃이다. 자본주의라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평등, 평준, 복지란 이름의 아편꽃이 이제 막 만개하고 있다. 이제 시들어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말이다.

배급은 인간을 평등한 돼지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무상급식, 무상교육, 무상의료? 그게 복지면 배급과 뭣이 다른가? 대한민국을 북한처럼 동물농장으로 만들려는 좌파들의 음모인가? 아니면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한 우파들의 뻔뻔함인가? 최대한의 복지는 곧 공산주의, 이 땅에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가 생겨나길 원하는가?

평준화의 저변에는 경쟁을 두려워하는 의식과 남 잘되는 것 못 보겠다는 저급함이 깔려 있다. 나중에야 다 같이 죽거나 말거나 일단 갈 데까지 같이 가잔다. 그러다보면 역전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평등이란 구호로 차등 혹은 차별을 가리고 뒤로는 무사안일과 안락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모두 위선이다.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 한물간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종북 좌파들이 돼지풀마냥 반도를 뒤덮어가는 밑거름이기도 하다.

자선에 의해서건 제도에 의해서건 복지가 지나치면 자생의지를 꺾어 결국은 국민을 병들게 만든다. 복지와 야성은 상극이다. 지나친 복지는 야성을 죽인다. 건강한 민족이라면 차별 혹은 차등에 기죽지 않는 야성이 필요하다. 그건 역동성의 밑거름이다. 해서 최소한이어야 하고 생산을 위한 복지여야 한다. 치료제여야지 영양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농약처럼 최소한이어야지 비료처럼 마구 뿌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절박함을 면하게 해주는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던 진짜 이유?

현재 북한엔 큰 부채가 없다. 배급만 있으니 정부인들 기업인들 개인인들 부채가 있을 리 만무하다. 시장경제가 아니어서 금전거래가 활성화 될 수 없다. 다른 나라로부터 빌리고 싶어도 어느 누가 빌려 줄 리 만무하다. 그러니 없으면 없는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견디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해서 피폐한 만큼 역설적으로 건강하다 하겠다. 배고프지만 적어도 갚아야 할 빚은 없으니 말이다.

해방 후, 다시 6.25를 거치고도 한국은 눈부신 경제성장, 그야말로 기적을 일구었다. 전 세대가 물려준 건 폐허와 배고픔 외엔 없었지만, 그렇다고 부채를 넘겨주지도 않았다. 해서 고마워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원망하지도 않았다. 선진국의 원조는 받았지만 그도 빚은 아니었다. 만약 그때 지금처럼 국가부채가 있었다면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겠는가? 아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이 오늘과 같은 성장이 가능했던 것도 역시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그리스가 다시 빚내서 재건할 거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아예 빚을 탕감해주면 그리스가 금방 다시 일어설까? 천만의 말씀. 한번 복지에 길들어지면 절대 빠져나오지 못한다. 한 번 준 복지는 절대 못 뺏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오직 배고픔과 채찍만이 그들을 다시 땀 흘리게 할 수 있을 뿐이다.

한국이 그랬듯, 중국이 그랬듯 북한 역시 개방경제 한다면 기적을 일궈낼 것이다. 그러니 내일 당장 남북통일 된다 해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부채가 없기 때문이다. 그 점에선 오히려 남한보다 건강하다. 게다가 지금의 남한 사람들이 잃어버린 배고픔의 야성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예전에 우리가 애용하든 헝그리정신이다. 이는 더없는 민족의 에너지이다. 그 어떤 자원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부채라는 또 다른 망국병

부채도 자산? 그건 호황기에나 먹히는 말이다. 지금처럼 세계경제가 암울할 땐 부채는 독(毒)일 뿐이다. 이제부터 어느 투자가들도 국가부채 가계부채 많은 나라엔 투자 안한다. 왜? 그 나라 근로자들 제대로 일 할 맛나겠는가? 이자도 못 갚는 나라에 공장 안 짓는다. 임금이 싼 나라에 기업들이 찾아가는 원인이 반드시 인건비 줄이려는 목적만은 아니다. 임금이 비싸도 노동의 질이 높다면 굳이 공장 옮기지 않는다.

허나 빚이 많은 나라 근로자들이라면 아무리 노동의 질이 높다 해도 신바람 나서 일할 의욕이 있을 리 없다. 투자를 해도 그 나라가 기대만큼 성장할 리가 없다. 차라리 북한에 투자 할망정 지금 그리스에 누가 투자하겠는가? 이제 세계의 자본은 부채가 없는 나라로 몰린다. 해서 부채가 국가신용등급 결정에 가장 주요한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미리 당겨쓰지 말자. 미리 걱정해서 비닐하우스 지어주지 말자. 그건 다음 세대를 힘겹게 하고 병들게 하는 짓이다. 자식에게 한 푼도 못 물려주는 부모라도 빚은 남기지 않는다. 있는 재산 다 날리고 죽더라도 자식에게 부채는 남기지 않는다. 허나 국가나 지자체의 채무는 고스란히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아무렴 자식에게 빚을 지우고 잘 먹고 잘 놀다가는 부모가 있다면 그게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겠는가?

국가부채? 복지? 누구를 위한 복지인가? 다음 세대를 위한 복지? 복지가 아니어도 좋으니 제발 부채만을 물려주지 말았으면 한다. 다음 세대가 할 일을 미리 해놓는다고 모두 잘한 일일 수는 없다. 다음 세대가 우리보다 더 지혜롭고 현명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부채 없는 맨땅을 물려주는 것이 어쩌면 가장 훌륭한 유산일 수 있다. 그들도 스스로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꿈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 최고의 유산이다.

빈곤의 대물림 장치, 학자금 대출

청년들이여, 꿈을? 가진 자의 꿈이란 더 많이 가지는 것뿐이다. 가진 것이 없을수록 꿈은 크게 꾸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꿈은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을 낸다. 한데 빚 진 인생이 무슨 꿈을 꾸겠는가? 설사 꾼다한들 빚 갚을 꿈밖에 더 있겠나? 그건 가위눌림이지 꿈이 아닐 것이다. 장밋빛 인생? 빚 진 인생에 무슨 희망? 게다가 백수 아니면 비정규직? 말이 좋아 비정규직이지 알바가 아닌가? 일자리 아닌 일거리, 온갖 형태의 싸구려 일감을 찾아 전전해야 하는 끔찍한 운명. 가까스로 고용의 혜택을 입었다 해도 빈곤을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게 희망이면 절망은 또 뭔가?

사교육비, 학자금 대출, 절망의 보따리를 하나씩 메고 졸업해서 겨우 비정규직? 결혼? 또 빚내서? 빚쟁이 비정규직과 누가 결혼하려 하겠는가? 전세에 전전하고 월세에 다 떼이다보면 내 집 마련은 언제? 아이는 몇 명? 그랬다간 초등학교부터 학자금 대출? 이런 사정 뻔히 알면서 대출해주는 은행과 대학, 그리고 정부는 악어와 악어새? 나중에 그 원망과 불만의 화살이 어디로 향하겠는가? 언제까지 저들을 일자리 수색작업에 열중하는 얌전한 자들로 붙들어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러다간 기업들도 사원 뽑을 때 학자금 대출 받은 졸업생 가리지 않는다고 보장 못 한다. 빚 진 사원이 무슨 신바람으로 일 하겠는가? 투잡 가진 사원이 회사 일에 열중할까? 웬만큼 월급 받아도 빚이나 이자 갚는다고 힘겨워 할 테고 해마다 더 올려달라고 떼쓸 것은 빤한 일. 빚 있는 사원이 근무 중 인터넷에서 누구누구는 주식해서 떼돈 벌었다는 기사 보고나면 딴 짓 안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가 사고 치면?

인생이 아르바이트일 수는 없지 않은가? 게나 고둥이나 다 대학 가는 세상에선 인생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교육에 투자해서 본전 건지기 어렵다. 이젠 형편이 안 되면 억울하고 안타깝더라도 대학진학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장학금을 받든가, 이도 저도 안 되면 포기해야 한다. 어지간히 현명한 자라면 대학 안 가고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은 나중에라도 공부할 수 있는 제도가 다 갖춰져 있다. 대학 안가는 게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못 간 게 아니라 안 간 거라고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청춘을 꿈꾸게 하라!

대학은 무슨 수를 써서든 장학금을 늘려야 한다. 악착같이 모든 졸업생들 찾아가서 적든 많든 장학후원금 받아내야 한다. 특히 재학 중 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는 졸업생에겐 그 몇 배의 후원금 받아내야 한다. 역대 총장들은 죽을 때까지 장학금 모금에 혼신을 바쳐야 한다. 대학이 무슨 직업훈련원이 아닌 다음에야 졸업생 취업률로 평가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연구 실적과 장학금 지급비율 두 가지만으로 평가해도 충분하다.

편하게 공부하고 넉넉하게 산 사람이 장학금 내놓지 않는다. 못 배워 힘들게 살아 온 사람들이 전 재산을 기부하고 있다. 이른 바 한풀이 장학금이다. 힘들게 겨우겨우 공부한 사람이면 나중에 분명 장학금 내놓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한 맺히게 하자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고생해본 사람만이 어려움을 안다는 말이다.

그다지 절박하지도 않은 학생이 장학금 좀 받았다고 얼마나 고마워하겠는가? 그 돈을 공부하는 데 쓰기나 하겠는가? 성적순으로 장학금 주는 건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장학금 역시 진정으로 고마워할 처지의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당장 학자금 대출 중지해야 한다. 정치가 지나치게 미시적으로 개인(유권자)의 안타까운 사정 다 헤아리다 보면 젊은이의 활력, 나아가 국가의 건강성을 해치게 된다. 대학졸업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반드시 그 인생에 도움을 주는 것만은 아니다. 자칫 한 개인의 인생을 망치게 할 수도 있다.

이미 나간 대출금은 모두 장학금으로 돌려 탕감하거나 개인파산 시켜서 짧은 기간 경과 후 면책 혹은 사면시켜야 한다. 끊임없이 경멸당하고 거세당한 에너지만을 지닌 젊은이들의 절망과 분노! 이대로 쌓여가다간 십년도 못가서 폭발하고 만다. 절로 나라 망한다.

누가 백년을 꿈꾸는가?

국가부채, 지자체 부채, 가계 부채, 복지 경쟁, 학자금대출 경쟁. 지난 날 박정희 대통령은 ‘일자리복지’를 만들었지만, 그 딸은 지금 복지정책 만들기에 열심이다. 세상에 일자리만한 복지가 어디 있을까마는 이 땅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일자리 늘릴 능력은 없고 그저 선심성 복지를 남발하고 있다. 하여 고작 만들어 낸다는 것이 ‘복지일자리’인 게다. 공적인 의미를 부여한 ‘노동의 대용품’으로 낭패스런 상황을 모면해보려는 게다.

학교 무상급식 문제로 촉발된 서울시장 사퇴 및 보선 결과 이제 여야 할 것 없이 복지경쟁에 뛰어들었다. 적어도 복지에서는 진보 보수가 없어졌다. 결국 빚지기 경쟁이다. ‘한강의 기적’이 반세기를 못 넘기나 보다. 누가 이 민족을 강인하다 하고 진취적이라 했던가? 누가 기껏 핸드폰 팔아 번 돈 명품에 다 갖다 바치는 민족을 머리 좋다 했는가? 이 민족의 한계가 여기까지인가? 반반도(半半島)의 꿈이 겨우 이거였든가?

지금은 세계적으로 모두 어려운 시기이다. 위기가 아니라 한 문명의 대격변이다. 이때 어느 민족이 허리띠를 더 짧게 하느냐가 미래의 주인을 결정한다. 모세가 유대 민족을 이끌고 곧장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장정을 한 이유는 민족을 강하게 단련시키기 위함이었다. 고난의 행군만이 우리를 건강하게 하고 바른 길로 이끈다. 복지병에 걸려 한번 주저앉으면 다시 못 일어난다. 어려울 땐 차라리 더 어렵게 살아낼 줄 아는 민족이 진정 지혜로운 민족이다. 그래야만 진정 세계사의 주역이 될 수 있다.

복지에는 미래가 없다. 강한 단련만이 제2의 기적을 약속한다. 한강의 기적을 잊자! 허세 부리지 말자! 다시 고생하자! 4강에 휘둘리는 나라가 아니라 스스로 4강이 되어보자! 통일이 되어 남한의 자본과 기술에 북한의 야성이 합쳐지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복지타령은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다. 그러니 청춘들이여, 그대들의 미래를 통일에 걸어보라! 지금 당장, 부채를 떠넘기지 말라고 크게 외쳐라! ‘요람에서 무덤까지’구제 대상이 되기를 거부한다고 외치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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