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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 그림마실[3], -조선 말기, 조희룡-

조선 말기(朝鮮末期) 회화, 감각의 시대로 나아가다

조선 말기(약1820-1910)는 기존의 공고한 성리학적 유교 질서가 점차 무너지고 근대적 개화사상이 싹트고 성장한 변혁기다. 상공업의 발달과 시장경제의 활성화, 중인계층의 성장 등으로 기존의 봉건적 신분질서가 혼란을 가져왔다. 대외적으로는 대원군의 쇄국정치(鎖國政治), 대내적으로는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단으로 정치는 혼란해졌다. 이렇듯 19세기는 삼정(三政)문란으로 사회 전반에 부패가 만연되고, 민중 수탈이 심화 되면서 갈등과 대립은 민란 형태로 나타났다.

유숙, <碧梧社小集圖>, 종이에 담채, 14.9x21.3cm, 1861,
서울대학교박물관

이런 혼란 속에서 당시 중인계층들은 사회·경제적인 위상이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신분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모순으로 선비로 편입하려는 의식이 더 욱 강해졌다. 이들은 사대부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문예활동을 중인계층의 여항(閭巷)문인화가들이 적극 참여하여 자신들의 어법으로 시대 정서를 문예(文藝)를 통해 드러냈다. 그들은 민요나 구비문학, 연희 등을 통해 변혁의 주체로서 역사 전면에 부상하여 민중의 생활감정과 변혁기의 시대적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말기 지배층의 몰락 속에서 형성된 19세기의 회화는 18세기를 답습한 산수·인물·초상·화조 등 감상화는 물론 기록화나 불화, 민화에 이르기까지 민중들에까지 수요층이 점차 확대되었다. 19세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는 18세기를 답습하는 형식화 경향을 띠면서도 양적으로 늘어났다. 그 이유는 경제력 상승에 따라 사대부층은 물론 일정하게 부를 축적한 중인계층에 이르기까지 그림의 향수층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민화 등 민중예술이 대중들에게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같다.

조선 말기 대표적인 작가로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다. 그는 청조(淸朝)의 학술과 문화의 자극을 받아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을 뿌리내렸다. 이 시기 정희를 중심으로 한 문기(文氣)를 중요시하는 남종문인화풍이 자리 잡았다. 우봉(又峯) 조희룡(趙熙龍, 1797-1859),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9-1892), 고람(古藍) 전기(田琦, 1825-1854),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 등이 있다.

조희룡,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으리

조희룡은 중인 출신의 여항 문인화가로 시ㆍ문ㆍ서ㆍ화에 뛰어났다. 그의 자는 치운(致雲)이고, 호는 호산(壺山), 우봉(又峯), 철적(鐵笛), 단로(丹老), 매수(梅叟), 매화두타(梅花頭陀)로 불린다. 조희룡은 1844년(헌종 10)에 중인·화가·승려·몰락 양반 가운데 특이한 행적을 남긴 42인을 다룬 『호산외사(壺山外史)』를 편찬했다.

조희룡은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겠다[불긍거후不肯車後]고 했다. 그는 『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畫雜存)』에서 “좌전을 끼고 정현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겠다.” 이 말은 결코 남을 추종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스스로 새로움을 모색하는 일은 고통이 수반된다. 그러나 조희룡이 선택한 새로움은 하나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데 있고, 또 남이 갔더라도 그것을 자기화한데 있다. 그가 지향하는 예술의 길은 변화와 창조를 싹트게 하는 심리적 길이다. 조희룡은 모두에게 익숙한 진경산수의 길을 가지 않고, 남종문인화의 길로 나아갔다. 조희룡의 창조성은 바로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겠다는 불긍거후(不肯車後)의 정신에 있다.

조희룡, <괴석도>, 종이에 수묵, 22×26.5㎝, 간송미술관

조희룡은 매화광(梅花狂)이다. 그는 방에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두르고, 매화가 새겨진 벼루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다. 매화시를 읊다 목이 마르면 매화차를 마셨고, 화실에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를 걸어놓고 홍(紅)매화를 즐겨 그렸다. 붉은 꽃 점을 많이 써 방안이 알록달록해지자 꽃눈이 내리는 집이라는 의미로 강설당(絳雪堂)이라 했다.

조희룡은 1847년 여항(閭巷) 문인의 모임인 벽오사(碧梧社)를 결성한다. 벽오당은 유최진(柳最鎭, 1791-1869)의 집이다. 조희룡, 전기, 유재소(劉在韶, 1839-1911), 유숙(劉淑, 1827-1873), 등 30여 명이 이곳에 모여 시와 그림으로 우정을 나눴다. 1851년 김정희가 유배를 받을 때 그의 심복이라 오인을 받아 신안 임자도에 3년간 유배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조희룡의 천기론(天機論)과 성령론(性靈論)은 예술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천부적 자질이나 타고난 자질을 말하는 천기(天機)와, 시가 심성의 도리를 구현해야 한다 는 반론에서 나온 인간 본성을 중시한 성령(性靈)이다. 그는 어떤 틀에 박힌 고정된 형식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내면을 들여다보고 변화를 모색했다. 즉 고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고전을 통해 새로움으로 나아갔다. 조희룡의 <괴석도>는 시서화가 하나로 녹여져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화제를 보면 결코 누구의 법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법으로 그리고자 했다.

조희룡은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에서 “시로써 그림에 들어가고 그림으로써 시에 들어가는 것은 한 가지다. 요즘 사람들은 시를 지으면서도 그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는 시를 읽으면 그림이 보이고, 그림을 보면 그 속에서 시를 읽을 수 있다는 말로 시와 그림이 본래 하나라는 시화일률(詩畫一律)의 미학적 경지를 드러낸 것이다.

김정희는 그림이나 글씨는 손끝에서 되는 것이 아니다.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쌓여야 비로소 문자향 서권기(文字香書卷氣)로 피어나는 것이다. 이는 문학에서 말한 외적 형식과 내적 정신이 함께해야 한다는 도문일치(道文一致)론과 같은 맥락이다. 이에 반해 조희룡은 손끝의 기예인 수예론(手藝論)을 강조했다. 조희룡은 1863년 예술적 삶을 회고하며 쓴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에서, “서화는 손기술, 즉 수예(手藝)이므로 수예가 없으면 비록 사람이 몸을 다해 배워도 할 수 없다. 그림은 손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조선 말기는 근대 개화사상이 싹트고 성장했으며, 사회적 신분의 격차가 점차 완화되고 문학과 그림 등 다양한 평민예술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조희룡은 수예론(手藝論)은 예술에서의 영감을 중시하는 경향의 내재적 발아를 엿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 현대 미술로 나아가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조희룡의 서화는 가슴속에 문자향서권기를 갖춰야 한다는 기존 패러다임(paradigm)을 뛰어넘었다.

<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 감성을 담아낸 문인화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매화는 매서운 추위를 뚫고 이른 봄이 되었음을 알린다. 그래서 매화는 지조와 군자를 상징하고, 사대부와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조희룡의 <홍매도대련>의 화제의 글을 보자. “연지에 봄이 드니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는데 하나의 꽃이 하나의 부처다. 이는 용화회(龍華會)에 참여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림으로 불사(佛事)를 이루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硏池春生 卍花迸現 一花一佛 使人如參龍華會上 以圖畵作佛事 自我始).”이 말은 매화꽃 하나하나가 부처의 화신이며, 매화를 그리는 것은 곧 부처님께 공을 드리는 것과 같다.

<홍매도대련>은 기존의 화법을 넘어 글씨의 법으로 그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글씨가 보인다. S자형으로 구부러진 매화 가지의 일부를 확대하여 화면의 세로 방향에 따라 배치하는 대담한 구도를 보여준다. 또한 붉은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화려하고 감각적이다. 또한 <매화서옥도>에서도 보여주었던 조희룡 글씨와 그림의 필법을 같게 하는 특유의 자유분방하고 표현적인 필치와, 시·서·화 일치 사상이 <홍매도대련>에 드러나고 있다.

조희룡은 “양무구(揚无咎, 1097-1169)가 매화 그리는 법을 창안했다. 그것을 이어받은 석인제(釋仁濟)는 40년 만에 비로소 원숙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모여원(茅汝元) 등이 매화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꽃이 드문 것을 구하고 번잡하게 핀 매화도를 그리지 않았다. 천 송이 만 송이의 꽃을 그리는 법은 왕면(王冕)으로부터 시작하여 근래 전재(錢載, 1708-1793), 나빙(羅聘, 1733-1799), 동옥(童鈺, 1721-1782)에 이르러 극성했다. 나의 그림은 동옥과 나빙 사이에 위치한다. 그것이 나의 매화치는 법이다.” 조희룡의 예술세계는 동옥과 나빙을 절충하여 뚜벅뚜벅 자신만의 길로 나아갔다.

희룡, <홍매도 대련>, 19세기 중엽,
종이에 담채, 삼성미술관 리움

조희룡은 자신의 매화 그림에 대해 “석가모니불을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매화는 장육매화라 할 수 있지 않은가?”조희룡 자신이 그린 매화에 “장륙매화는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다(丈六梅花 自我始也)”라고 했다. 그는 글씨의 필법을 매화나무의 가지와 몸통에 응용하여 조희룡만의 화풍을 열었다.

조희룡은 19세기 대표적인 여항문인화가(閭巷文人畵家)로 회화창작과 회화 관련 저술 활동을 통해 당대 화단을 이끌어가는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고 유숙에게 그림을 배웠던 장승업으로 이어졌다. 장승업에 오면 문자향서권기를 강조하던 남종문인화의 관념성은 점차 사라지고 대신 감각적 수예관(手藝觀)이 자리를 차지한다. 조선 말기의 남종문인화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에 비해 결코 쇠퇴한 시기가 아니다. 조선 말기 예술은 사상적인 제약을 받지 않고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이 시기 무명 예술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인해 서화의 애호가들과 수용자층이 다양하게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근대 대중문화예술의 출발을 알리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철학박사(동양미학전공)
경희대교육대학원 서예문인화과정 주임교수

<참고하면 좋을 자료>

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 돌베개, 2007

김영희, 『조희룡 평전』, 동문선, 2003

이선옥, 『우봉 조희룡』, 돌베개, 2017

김찬호  digitalfe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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