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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 그림마실2, -조선 후기, 호생관 최북-

조선 후기(朝鮮後期) 회화, 개성의 추구

조선후기는 임진왜란(壬辰倭亂)ㆍ병자호란(丙子胡亂)과, 명ㆍ청 교체에 의한 혼란을 겪으면서 지배층이 분열되고, 정쟁에 휘말리면서 시작된다. 이 시기 서구문물의 유입과 과학의 발전으로생산력이 증대되고 경제가 활성화 되었다.

정선,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1711

이 시기 사대부들은 변혁적인 비평의식을 통해 변화에 앞장섰다. 이와 함께 새로운 문화계층으로 성장했던 중인들의 활약으로 당시 문화와 예술의 폭이 넓어졌다. 특히 18세기 이후 여항(閭巷)문인들은 사대부들이 주관하는 시사(詩社)모임에 참여하고, 독자적으로 시 모임을 결성하는 등 조선후기 문예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선 후기(1700-1820년경)는 숙종 에서 영․정조를 거쳐 순조 대에 이르는 약 120년간으로 사실주의 화풍이 유행하던 시기이다.(유홍준, 『조선시대의 화론』, 학고재, 1998) 이 시기는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는 진경시(眞景詩), 동국진체(東國眞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등 시(詩)ㆍ서(書)ㆍ화(畵)에서 우리의 것을 찾고자 하는 예술풍조가 유행했다. 특히 양명학(陽明學), 서학(西學), 동학(東學) 등의 실질적이고 개인의 주체성이 드러나는 실학적 사유는 기존 성리학의 매너리즘을 극복하고자 하는 조선 후기 문예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회화에서도 조선 중기에 유행했던 명대 화원출신의 대진(戴進, 1388-1462)이 중심이 되었던 절파(浙派) 화풍이 점차 쇠퇴하고, 조선중기에 수용되기 시작한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풍이 유행하게 된다.

조선후기 회화 특징은 원, 명, 청의 남종화법을 토대로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산수를 주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한 정선(鄭敾, 1676-1759)을 중심으로 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유행했다. 또한 서양화법 수용, 풍속화(風俗畵)의 유행과, 민화(民畵)의 탄생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 대표 작가로는 선비화가로서 풍속화를 일으킨 윤두서(尹斗緖, 1668-1715)와 조영석(趙榮祏, 1686-1761), 한국적 진경산수화를 일으킨 정선(鄭敾, 1676-1759)과 심사정(沈師正), 서양화법을 산수화에 적극 도입한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여항문인으로 전업 작가로 이름을 날린 최북(崔北, 1712-1786?), 풍속화를 유행시킨 화원화가 김홍도(金弘道, 1745-?)와 신윤복(申潤福 1758-1814년경)등이 있다.

최북,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삶

최북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그의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 유용(有用), 칠칠(七七)이고,

최북, <秋鶉啄粟圖>, 수묵담채 17.7x27.5cm, 간송미술관

호는 성재(星齋), 기암(箕庵), 거기재(居其齋), 삼기재(三奇齋), 기옹(奇翁), 좌은(坐隱), 반월(半月), 호생관(毫生館)이다. 최북은 붓질해서 먹고 산다고 해서 호를 호생(毫生)이라 하고, 자신의 이름인 북(北)자를 파자(破字)하여 ‘칠칠(七七)’이라 했다. 또 산수화에도 뛰어나 ‘최산수(崔山水)’,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 메추라기(崔鶉)’로 불리기도 했다.

최북의 <추순탁속도(秋鶉啄粟圖)>는 가을날 두 마리의 메추라기가 조를 쪼아 먹고 있는 그림이다. 조[粟]는 벼과의 곡식으로 메추리와 조를 함께 그린 그림을 안화도(安和圖)라 한다. 안(安)은 암(鵪)과 음이 같고, 화(和)는 화(禾)와 소리가 같기 때문에, 풍성한 결실을 맺어 편안하고 화목하게 살라는 축원의 뜻으로도 읽는다. 낙관 옆으로 문징명의 필의로 썼다(방징명필(仿徵明筆)고 했다. 이 말을 통해서 최북의 문징명의 예술세계에 대한 흠모를 엿볼 수 있다. 1748년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수행화가로 일본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는 중인출신으로, 이익(李瀷, 1681-1763), 이광사(李匡師, 1705-1777), 이용휴(李用休, 1708-1782),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신광하(申光河, 1729-1796), 남공철(南公轍, 1760-1840) 등의 지식인들과 교유했다.

신광하(申光河, 1729-1796)가 1786년에 지은「최북가(崔北歌)」는 최북의 삶과 예술세계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글이다.

君不見崔北雪中死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최북이 눈 속에 얼어 죽은 것을

貂裘白馬誰家子 가죽옷 입고 백마 탄 그대, 뉘 집 자식인가

汝曹飛揚不憐死 너희들 거드름피우느라 그의 죽음 슬퍼할 줄도 모르니

北也卑微眞可哀 최북의 미천한 처지 참으로 애달픈 일이라

北也爲人甚精悍 최북의 사람됨 정갈하고 매서우니

自稱畵師毫生館 스스로 화사 호생관이라 했네

軀幹短小眇一目 체구는 작달막하고 눈은 한쪽이 멀었지만

酒過三酌無忌憚 술이 석 잔을 넘으면 꺼리는 것이 없었다

北窮肅愼經黑朔 북으론 숙신으로 올라가서 흑삭까지 거쳐 돌아왔고

東入日本過赤岸 동으론 바다를 건너 일본 땅을 다녀 왔다지

貴家屛障山水圖 귀한 집 병풍의 산수 그림은

安堅李澄一掃無 안견이나 이징을 무색케 했고

索酒狂歌始放筆 술을 찾아 미친 듯 부르짖다가 비로소 붓을 들면

高堂白日生江湖 대낮 대청마루에 강호가 일어 났네

賣畵一幅十日饑 열흘이나 굶주리던 끝에 그림 한 폭을 팔아

大醉夜歸臥城隅 대취하여 성 모퉁이에 쓰러 졌네

借問北邙塵土萬人骨 묻노니 북망산에 진토된 만인의 뼈

何如北也埋却三丈雪 세길 눈 속에 파 묻인 최북과 견주어 보면 어떠한가?

鳴呼北也 슬프구나 최북이여

身雖凍死名不滅 몸은 비록 얼어 죽었으나 이름은 길이 지워지지 않으리

최북의 그림은 안견(安堅)과, 이징(李澄, 1581-1674?)을 무색케 했고, 그의 주량은 하루 막걸리 대여섯 되로 언제나 취해 비틀거렸으며, 오두막에서 종일 산수화를 그려 아침저녁 끼니를 겨우 때웠다. 열흘을 굶다가 그림 한 점 판돈으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구덩이에 빠져 얼어 죽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붓으로 생계를 꾸리겠다는 뜻으로 호생관이라 부르며, 직업화가로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던 화가였다.

최북의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가난한 이에게는 몇 푼에도 선뜻 그림을 그려 주었고, 돈 보따리 들고 와 거드름 피우는 고관에게는 엉터리 그림을 던져줘 희롱하고, 좋은 작품을 볼 줄 모르는 이에게는 그 자리에서 그림을 찢었다. 금강산 구룡연을 보고‘최북 같은 천하의 명사가

천하명산에서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구룡연에 뛰어들었다가 겨우 살았다고 했다. 세도가가 그의 붓 솜씨를 트집 잡자‘네까짓 놈의 욕을 들을 바에야’하며 한 쪽 눈을 찔렀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반 고흐(1853-1890)는 생계에 대한 막막함과 그림에 대한 압박감으로 자기의 귀를 잘랐고, 최북은 세도가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눈을 찔렀다. 최북은 결코 자기 맘에 내키지 않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결연한 자유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 후기 유행한 남종화법은 최북에게 그림을 파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최북은 중인 출신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고 그림을 팔아 생활했지만, 시ㆍ서ㆍ화를 겸비했다. 최북은 원대의 황공망(黃公望, 1269-1354)과 예찬(倪瓚, 1301-1374)의 화풍과, 명대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필법, 북송대 미불(米芾) 화풍의 영향을 받아, 이를 종합하여 개성 있는 그림을 그렸다.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 인생을 담아낸 그림

최북의 <풍설야귀인도>는 시의도(詩意圖)이다. 시의도는 그림 속에 시가 들어 있어 시와 그림이 일체화 되는 것을 말한다. 시의도는 화조, 인물, 산수 등 다양한 장르에 그려졌다. <풍설야귀인도>에 화제는 당대(唐代) 유장경(劉長卿, 725-789)의 시“사립문 닫히고 개 짖는데 눈보라 치는 밤 돌아오는 나그네(柴門聞犬吠 風雪野歸人)이란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와 같이 시 속에 그림이 보이고, 그림 속에 시의 정감이 드러난다.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의 「최칠칠전(崔七七傳)」한 대목에서 최북의 화법에 대한 미의식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산수화를 그려 달라 했는데 최북은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질 않았다. 사람이 그를 비난하자 최북은 붓을 던지고 일어나 말했다. “이 사람아! 종이 밖이 모두 물이다.” (南公轍,「崔七七傳」, 人有求爲山水 畵山不畵水 人怪詰之七七擲筆起曰: 唉 紙以外皆水也)

여기에서 “종이 밖이 모두 물이다”라고 한 말은 <풍설야귀인도>에서도 알 수 있다. 산만 그리고 물은 표현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산을 높게 그리기 위해서는 짙은 안개가 필요하고, 물의 유장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물줄기의 흐름을 차단해야 깊고, 높고, 넓은 무한의 세계를 담아낼 수 있다. 그래서 여백은 필요하게 되고, 안개와 구름으로 공간을 감싸주어 산과 물의 상호관계를 표현해 낼 수 있다.

최북,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 수묵담채, 66.3x42.9cm, 18세기

<풍설야귀인도>로 들어가 보자. 종일 내렸던 눈이 온 산에 가득하고, 어둑어둑 한 초저녁, 나뭇가지가 휘어져 꺾어질듯 눈보라는 매섭게 흩뿌리고 있다. 나그네와 동자는 개 짖는 소리에 아랑 곳 하지 않고 찬바람 맞으며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이 그림에는 개가 금방이라도 달려 나올 것 같은 모습과, 나뭇가지가 휘어진 모습에서 개 짖는 소리와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또 화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눈 쌓인 얼음사이로 계곡물은 흐르고 있다. 이 작품은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인 감각적 이미지를 담아 시를 통해 그림을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림 속에 시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리는 방법인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렸다. 사람을 작게 표현함으로서, 산이 높고, 나무가 크고 웅장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나무의 휘어짐을 통해 찬 겨울의 세찬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산허리와 하늘의 짙게 깔린 구름은 산의 높이를 가늠할 수 없게 한다. 그런 속에서 산등성이와 계곡의 하얀 눈은 어둠을 뚫고 밝게 비추이고 있다. <풍설야귀인도>는 작은 화폭의 그림 속에 감각적 표현을 통해 최북의 말년 쓸쓸한 심회(心懷)가 함축되어 드러나고 있으며 깊은 여운(餘韻)을 느끼게 한다.

조선후기 최북의 삶과 예술세계는 당시 문예인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세상을 두루 보았던 넓은 시야, 결코 불의(不義)한 세도가에게 꿀리지 않는 자존감을 보여 주었다. 또한 당대 지식인들과 시ㆍ서ㆍ화에 대한 담론(談論)을 통해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며 한 시대를 격정적으로 살아간 열정의 예술가였다. 최북은 진정한 예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참고하면 좋을 자료>

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 돌베개, 2007
홍선표, 『조선시대 회화사론』, 문예출판사, 2005
南公轍, 『崔七七傳』, 문예출판사, 2005

성균관대학교 철학박사(동양미학전공)경희대교육대학원 서예문인화전공 주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철학박사(동양미학전공)

경희대교육대학원 서예문인화전공 주임교수

김찬호  digitalfe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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