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검사, 변호사의 심리구조

지난 날 변호사 출신 대통령의 독선과 황당한 언행에 내내 불안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가장 유명했던 변호사는 아마도 수년 전 삼성그룹을 물 먹인 김용철 변호사일 것이다. 하필 이번 사태의 당사자인 오세훈 전 시장도 변호사 출신이다.

그런가 하면 구속 수감 중인 곽노현도 법학을 전공했다 한다. 차라리 그도 변호사를 했으면 참 잘 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번 서울시장 보선의 조연과 주연들 모두 법을 전공한 사람들이다. 박원순조차 스스로 서울법대 중퇴인 척 했으니 모두 서울대 법대 동창인 셈이다.

예전에는 판검사 출신들의 정계 입문이 많았으나, 80년대 이후에는 큰 정치적인 사건이나 사회적 이슈가 되는 별난 사건을 맡아 유명해진 변호사 출신들의 정계 입문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변호사를 약하고 억울한 사람들 편에 서서 권력과 싸우는 정의의 수호천사처럼 가르치기 때문일 것이다. 일견 옳기도 하지만 실은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있다.

초기에는 노동 운동이나 학생 운동에 관련된 사건들의 변론을 맡으면서 민주 혹은 반체제란 수식어를 단 변호사들이 하나둘씩 국회로 진출하더니, 요즈음은 장애인 복지,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 환경 보호, 기업 감시, 의문사 진상 등등 그때그때 갖가지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나 대기업 등을 상대로 약자의 편에 서서 변론을 맡았던 변호사들이 많아졌다. 물론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더욱 늘어날 것이다. 사회가 다양해진 만큼이나 문제 또한 늘어날 테니까.

과거 힘들고 거칠었던 시절에는, 독재 정권의 불합리에 맞서 싸우던 민주투사와 노동운동가들을 위해 변론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신념과 정의감을 갖지 않고는 힘든 일이었다. 많지 않는 변호 비용, 심지어 무료 변호도 마다하지 않고 소수 ․ 약자 ․ 민중의 편에 서서 부당한 힘에 대항했었다. 때로는 협박을 당하기도 하고, 돈도 안 되는 사건에 매달리다 보니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간 훌륭한 변호사들도 있었다.

순교자와 변호사

아하, 그런데 여기에 참 재미있는 일이 있다. 그 변호사들 앞에 붙어 있던 수식어는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사건 의뢰인(대개는 피고)의 것이었다. 재판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의 당사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만 남는다. 피고가 입었던 수의(囚衣)를 슬그머니 걸쳐 입은 것이다. 기실 주인공은 사건의 당사자이며, 그 공적(?)은 당연히 그에게 돌아가야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사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그들이 변호사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국립호텔에서 세월을 죽이거나 제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동안, 그들의 존재는 국민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지워져 버린다. 대신 그들이 입었던 수의는 변호사의 어깨에서 태극무공훈장보다 더 빛나고 있다. 독재 시절 다른 친구들 거리로 뛰쳐나가 온몸으로 투쟁할 때 짐짓 모르는 체하고서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열심히 법전 외워 고시 합격해 판검사 혹은 변호사가 되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부끄러움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피 묻은 수의는 그런 변호사들을 졸지에 거룩한 순교자로 만들어 주는 마법의 망토이자 출세의 부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망토를 걸치려는 민주 ․ 양심 ․ 노동 ․ 환경 변호사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반미 ․ 종북변호사가 뜰 날도 머지않았다. 이제는 박원순과 같이 아예 처음부터 시민운동하며 손수 망토를 만들어 입는 변호사까지 생겨나 스스로 온몸에 불그스레한 물을 발라 마치 신흥교주처럼 행세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변호사처럼 수식어 하나 얻으려고 튀는 판사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수식어 붙은 법조인들의 정치지향성

법정 체계에서 보자면 판사는 정(正)을 숭상하고, 검사는 의(義)를 추구하지만, 변호사는 이(利)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판사는 법(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한다지만, 기실 법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하든 법을 지켜야 하고 원고든 피고든 양쪽의 의견을 다 들어야 하고, 원칙과 형평성을 고려하여 공정하게 판결해야 한다. 당연히 오늘 다르고 내일 달라서도 안 된다. 원칙을 중시하기 때문에 다소 고루할 수밖에 없다.

직업상 검사는 무(武)의 습성이 강하고, 변호사는 문(文)의 성향을 가진다. 검사는 선(善)의 편에서 악(惡)을 처단하는 역할을 하기에 악한 이들을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이 땅에서 제거해 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해서 다소 거칠어 보이고 적이 많기 때문에 정치적 이미지에서는 다소 불리하다.

옛말에 '죽임으로써 살인자를 없앨 수 있다면 비록 죽여도 괜찮고, 형벌로서 범법자를 없앨 수 있다면 중벌이라도 괜찮다'고 하였다. 아마도 검사의 입맛에 딱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검사답지 못한 검사들도 문제다. 모름지기 검사(檢事)는 검사(劍士)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무덕(武德)을 지녀야 한다. 먼저 바른 '용(勇)'과 바른 '엄(嚴)'을 갖춰야 한다. 항상 신중해야 하고 절제해야 한다. 의리만으로는 정의를 세우지 못한다.

이에 비해 변호사는 선악(善惡)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으로 법정에 임할 수가 없다. 오직 의뢰인의 입장, 즉 자기 고객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한다. 흔히 약자나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변론함으로써 인(仁)을 베푸는 것으로 이야기하지만(간혹 그런 사례도 없진 않지만), 실제로는 이(利)를 좇는 직업이다. 판사나 검사처럼 국가가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건 곧 자기의 생업이다. 그들은 천사가 아니며, 정의의 사도도 아니다. 그냥 법장사일 뿐이다.

억울한 사람을 구제한다고? 미안하지만 강도든 사기꾼이든 법에 걸리면 억울하지 않을 사람 없다. 양심에 따라? 기실 그건 판사의 몫이지 결코 변호사의 것이 아니다. 같은 법정에서도 아침에는 가해자의 편에서, 오후에는 다른 피해자의 편에서 변론을 해야 한다. 오늘은 억울하게 핍박받는 어느 가난한 자의 편에서, 내일은 천인공노할 살인자의 편에서 변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오직 법의 빈틈과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고객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일을 할 뿐이다.

이기면 보다 많은 수입이 보장되고, 또 유능하다는 평판이 붙어 그를 더욱 바쁘게 만들어 줄 것이고, 설령 진다해도 전혀 손해 볼 것 없다. 이기고 지는 게임에서는 어차피 한쪽은 지게 되어 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법적 책임감도 없다. 단지 처음부터 이길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의 고객을 잡지 못한 것이 약간 아쉬울 따름이지. 아무래도 이기는 쪽이 수입이 많기 때문이다.

유리한 변론을 할 적엔 어떻게 해서든 법의 권위를 이용해 상대를 확실하게 핍박해서 보다 유리한 판결을 끌어내야 하며, 반대로 불리한 편에 서서는 어떻게 해서든 법의 맹점을 이용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법을 잘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법을 잘 알아서 가지고 노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권력이나 법에 대해 변호사는 언제나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변호사의 또 다른 특징은 변명에 있다.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공격도 잘해야 하지만 방어도 잘해야 한다. 위기의 상황에서 그때그때 순발력 있게 반격과 방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희대의 살인자를 위해서도 이런저런 온갖 이유를 다 둘러맞추어 어떻게 해서든 무죄를 주장해 형량을 낮추어야만 한다. 결코 양심이나 도덕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오직 끈질긴 직업 근성으로 세 치 혀로 승부해야 한다.

당연히 지고도 졌다 하면 안 된다. 억울하게 졌다며 항소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하다못해 󰡒이 피고가 이토록 잔인한 살인자가 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우리 사회의 잘못이다󰡓라는 상투적인 변명이라도 늘어놓아 형량을 조금이라도 깎아야 수입을 늘릴 수 있다. 그래야 먹고 사는 직업이다.

소신 없는 정치인들

판사, 검사와 변호사. 직업적인 특징을 지적하고 보니 지나치게 극단적인 면만을 이야기한 것 같다. 늦은 시간 텔레비전 시사토론 프로에 나와 열띤 논쟁을 벌이는 여야 국회의원 교수 또는 전문가들, 그렇지만 아무래도 변호사 출신들이 단연 돋보인다(옳다거나 훌륭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공격도 잘하고, 도무지 변명의 여지가 없는데도 잘도 둘러댄다. 아무리 오랫동안 입씨름을 해도 끝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부류의 정치인들은 전직에서 오는 나쁜 습관이 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법을 해석하고 응용하는(쉽게 말하면 요리조리 가지고 노는) 버릇 때문에, 무슨 확고한 소신에 따르기보다는 역시 상황에 따라 말과 행동이 수시로 바뀐다는 점이다. 전날 뱉은 말을 다 기억한다면 변호사 못해 먹는다. 신(信)과 의(義)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利)를 좇는 것이 변호사라는 직업의 본질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신(信)에 대한 개념이 없다 보니 자칫 배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거나, 일관된 신념(信念)이나 소신(所信)을 놓치기 쉽다.

같은 입이지만 오늘은 이 말 했다가 내일은 저 말 하는 정치인들, 오늘 이 당일 때와 내일 저 당일 때 다르고, 야당일 때 여당일 때 다르고, 들어갈 때 나올 때가 다른 정치인들이 너무 많다. 지난날 대선에서 판사 출신 이회창 후보와 변호사 출신 노무현 후보 중 변호사 출신을 선택했던 국민들이 다시 똑같은 상황에서 서울시장 후보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나경원과 박원순 역시 그 전직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 재미있다.

원칙을 주장하면서도 파행을 즐기는 이중적 민심

아무렴 인간사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덕(德)을 지니지 못한 법조인은 법의 나무에 기생하는 벌레에 다름 아니다. 바로 이들이 사(士)자 붙은 도적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진정 법의 신성함을 인정한다면 그 밑에 썩어서 거름이 되어야 한다. 말(言)을 바꾸는 것은 그 스스로에 대한 배신이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생각을 신념(信念)이라 하지 않는다. 변(易)하는 것은 덕(德)이 아니다.

법으로 먹고 살면서도 자신에게 불리하면 “악법은 법이 아니다”고 하는 예측 불허한 변호사 출신을 택할 것인지, 다소 고지식하지만 법을 지켜 원칙대로 하려는 경향이 강한 판사 출신을 시장으로 선택할 것인지, 결과는 고스란히 시민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동안 변호사 출신 정치인들에 대한 실험은 충분했다. 이번엔 판사 출신에게 기회를 주어 유용한 학습의 경험을 축적하게 될지 궁금하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후보를 탓하기 전에 시민 각자가 중심을 잡아야 세상이 평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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