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주의(表現主義, Expressionism), 감정의 직접 표현
 
표현주의는 독일을 중심으로 1905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일어난 미술사조이다. 표현(表現)이란 사상이나 감정 등을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어 나타내는 말로 라틴어 ‘expresso’에서 유래한다. 20세기 초반 유럽 미술계에 나타난 표현예술을 지칭하는데서 출발한다.

에밀 놀데, <실락원 Paradise Lost>, 86.5x100.5cm, 1919

표현주의는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인상주의(Impressionism)처럼 빛에 집중하거나, 야수주의(fauvisme)처럼 색채에 관심을 두거나, 입체주의(cubism)처럼 형태를 파괴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표현주의는 1905년 야수주의와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해 인상주의 경향을 버리고 주관적인 개인의 감수성을 표현하기 위해 강렬한 색채ㆍ대담한 변형ㆍ형태의 단순화를 추구한다.

1905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운동이 함께 일어났고, 독일에서는 표현주의가 일어났다. 표현주의는 단순한 사물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의도에 따라 느낌을 그린다. 대표작가로는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에밀 놀데(1867~1956)  에른스트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등이 있다.

뭉크, 대상에 대한 느낀 감정을 표현

뭉크는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주로 독일과 프랑스에서 활동한 북유럽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이다.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 뢰텐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어머니, 11살 때 누나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결핵과 아버지의 우울증 등 가족들을 덮친 질병으로 인한 죽음과 공포는 어린 뭉크에게 평생의 큰 상처로 남게 되었으며, 이러한 절망ㆍ불안ㆍ내면세계의 어두움은 훗날 뭉크의 작품 속에 드러난다.

뭉크는 1880년 아버지의 권유로 오슬로 공업학교에 입학하나, 1881년 그림 그리는 길로 나서게 된다. 오슬로 국립공예학교에 입학한 그는 재학시절 자연주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1852~1925)의 영향을 받는다. 크로그의 소개로 오슬로 보헤미안(Bohemian)들의 리더 한스 예거(Hans Jæger)를 비롯한 보헤미안들과 교류한다. 1884년 해군 군의관의 부인과 사랑에 빠졌고 6년간 지속되었지만 상처만 입고 헤어진다. <질투>(1891), <월광>(1893), 등이 이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1885년에서 1889년 동안 두 차례의 파리 유학을 통해 후기인상주의 작품에 공감해 자신의 노트에 “더 이상 책을 읽는 남자와 뜨개질을 하는 여자가 있는 실내를 그려서는 안 된다. 숨을 쉬고, 느끼고, 사랑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그려야 하며 나는 그런 그림들을 하나의 연작으로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이를 계기로 ‘생명의 프리즈’연작을 구상하게 된다. 1889년 우울증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다.

1892년 스물아홉 살 때 오슬로와 베를린에서 가진 개인전에서 불안, 고독, 죽음,  질투 등 대부분 도발적인 작품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특히 베를린 전시는 격렬한 반대로 1주일 만에 전시가 중단되기도 한다. 1893년 ‘생의 프리즈’ 연작을 시작 한다. <절규>(1893)에 이어 <불안>(1894)을 완성한다. 1894년 베를린에 체재시 동판과 석판화를 시작 한다. 1899년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과 라파엘로에 매혹되고, 여기서 영감을 얻어 장식 패널화와 <빨간 덩굴풀>(1900) <골고다>(1900)를 그린다.

1902년‘생의 프리즈 연작’을 베를린에서 전시한다. 젊은 시절 뭉크는 몇 번의 연애를 경험하지만, 그 대상이 유부녀이거나 사교계의 여자들이었고 대부분 불행하게 끝난다. 1899년경 오슬로에서 사귄 툴라 라르센(Tulla Larsen)과의 연애사건으로 권총을 잘못쏘아 왼손 가운데 손가락 반을 잃게 되고 정신적 상처를 받는다. 1904년 베를린 분리파의 정식멤버가 되고, 1906년 입센의 <유령>, <헤다 가블러>의 무대장치 제작한다. 연인과의 상처와 가족의 죽음 등은 그를 깊은 침울의 세계로 끌고 간다. 1908년 알코올 중독, 조울증, 신경쇠약 증세를 보여 덴마크에서 요양한다.

1910년 노르웨이 오슬로로 돌아와 자연을 주제로 한 그림을 주로 그린다. 사회적 성찰을 담은 <눈 치우는 사람들>(1911),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1912)을 그리게 된다. 1937년 나치가 퇴폐미술이라는 명목으로 독일미술관에 소장된 뭉크의 82점 압수한다. 1944년 오슬로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유언대로 1000점에 달하는 유화와 15,400여점의 판화, 450여점의 수채와 소묘, 그리고 6점의 조각 작품들이 오슬로 시에 기증된다.

절규, 내면의 소리 없는 공포

뭉크의 작품 <절규>(1883)는 죽음, 절망에 대한 작가 내면 속의 소리 없는 공포를 표현하고 있다. 그는 작품 <절규>를 그리게 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친구 둘과 산책을 나갔다. 해가 지기 시작했고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피로를 느껴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대었다.  핏빛과 불의 혓바닥이 검푸른 협만과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지만 나는 두려움에 떨며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자연을 관통하는 끝없는 절규를 들었다.”

뭉크, <절규>, 캔버스에 유채, 91x73.5cm, 1893

해가 지고 어두움이 몰려오고 핏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과 검푸른 바다의 파도가 나의 마음을 덮고 있다. 그 속에서 절규하고 있다. 붉은 하늘과 검푸른 바다, 삶과 죽음의 정서를 뭉크만의 색채와 구도를 통해 내면의 절규를 토해내고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는 정확한 관찰에 의한 사실적인 윤곽선이 아닌 주인공의 기분과 행동에 집중한 제스처적인 선의 성격이 강하며, 주인공의 몸과 다리 오른쪽 부분은 여러 번의 선의 겹침으로 인해 명암이 드러나기도 한다. 색은 하늘의 빨강과 파랑, 노랑의 유채색의 비율보다는 검은색과 회색을 사용하여 어두운 분위기를 준다. 전체적으로는 사선(斜線)과 곡선(曲線)을 사용하여 불안감을 강조한다. 그림 속 화자는 과장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어 화면 안에서 극도의 불안감을 보여준다.

뭉크 작품에서는 광기와 불안으로 요약되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기법과 적절한 표현을 통해 고통과 불안한 심리를 보여준다. 그는 다른 한편 기법의 다양화를 통해 회화에서 제2의 적으로 생각했던 판화를 예술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끌어 올렸다.

표현주의는 1차 대전이 임박한 상황과 전쟁의 와중에서 전쟁과 폭력에 반대했던 일종의 예술적 저항운동이다.

성균관대학교 철학박사(동양미학전공)
경희대교육대학원 서예문인화과정주임교수

<참고하면 좋을자료>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최병진 역 『표현주의 화가들』, 마로니에북스, 2009
슐라미스 베어, 김숙 역, 『표현주의』, 열화당, 2003
오광수 외, 『뭉크』, 재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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