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후무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은 13대133의 전쟁에서 승리한 그야말로 조선의 승리요, 영웅 이순신의 승리요, 민초들의 승리가 아닐 수 없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싸움, 이순신도 이 날 승리를 두고 “천행 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 드라마 같은 해전은 알게 모르게 많은 구전과 설화를 만들게 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풀리지 않는 쇠사슬을 비롯하여, 피섬과 노적봉이야기 등과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진도 왜덕산, 그리고 ‘어란’ 여인의 등장이다.

어란 여인은 박승룡(84.해남 송지)옹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그것이 구전이든 사실이든 자연스럽게 명량해전과 연관을 짓는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23번의 싸움에서 단 한번의 패배도 없이 전승을 거뒀다.

그것은 그때 그때에 맞는 전술과 전략, 그리고 그에 맞는 첩보(정보)의 싸움에서 일본을 이미 이겼다는 것이다.

하여, 명량해전을 앞두고 왜선이 어란포를 출발하는 시각을 이순신에 알려준 어란 여인이 명량해전에 등장하는 것은 결코 놀라울 일은 아니다.

구국의 여인으로 이름한 ‘어란’ 여인의 이야기는 박 옹이 일제 강점기 때 25년 동안 해남에서 순사로 지낸 일본인 사와무라 하지만다로가 지은 유고집 '문록경장의 역'을 접하고 부터다.

이는 박 옹이 지난 2007년 일제시대 해남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의 모임인 ‘해남회’의 세기 준이치 회장으로 부터 건네받은 사와무라의 이 유고집에서는 일본군이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원인을 어란진에서 있었던 간첩사건 때문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역으로 생각하면 일본에서 간첩은 곧,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충신이 아닐 수 없는 것 아닌가.

이야기의 결론은 1597년 명량해전을 앞두고 어란진에 주둔한 일본군 장수 ‘간 마사가게’는 이순신 장군의 간첩 어란 여인과 사랑에 빠져 무의식중에 명량해전으로의 출전기일을 발설하고 만다.

어란은 이를 김중걸을 통해 이순신에 연락, 조선군은 이 결정적인 정보로 명량해전을 대비하여 대승을 거둔다.

어란은 명량해전에서 애인 간 마사가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날 달 밝은 밤에 여낭터에서 명량해가 보이는 서쪽바다에 투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량해전이 끝난 다음날, 1597년 9월17일 마을 앞바다에서 이 여인의 시체를 수습한 어부가 시신을 근처 소나무 밑에 묻고 묘 앞에 석등을 세우고 불을 밝혔는데 지금도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동네주민 모두가 정성스러운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어란 여인의 시체를 수습한 어부가 근처 소나무 밑에 묻고 묘 앞에 석등을 세웠는데 이 '석등롱'은 말없이 어란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박 옹에 따르면 어란 여인의 애인 간 마사가게는 실제 존재했던 인물로 확인되고 주민들의 구전과 일본인의 기록, 그리고 명량해전에 관한 우리나라 기록(1597년 9월 14일자 난중일기에 어란진에서 있었던 일로 김중걸이 왜에 붙잡혀 왜선에 감금될 때 ‘김해인’ 이라는 여인이 결박을 풀어주며 기밀을 제공했다./조선왕조실록에 ‘선조 30년(1597년) 이순신은 왜선중에서 여인으로부터 정보를 탐지하여 곧장 장계하였다’ )이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관심은 이미 넘어섰다.

어란 당집이 지난달 26일 해남군에 의해 향토유적으로 지정됐다. 단, 민초들의 기복신앙을 알 수 있는 형태로서 임진왜란과 관련한 ‘어란’이라는 여인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의결했다는 단서를 붙였지만 말이다.

또, 박 옹에 따르면 목포대에서 '어란'여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오는 7월 해남 어란마을에서 1박2일의 일정으로 연구 토론회가 마련되어 있다.

이제, 어떤 식으로 든 어란 여인은 재미있게 도마위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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