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은 혁명 자체를 폭력으로 보았다. 이것은 폭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이며, 폭력을 문제 해결의 유일한 수단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폭력이 없는 공산당은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지난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집회와 용산 사태를 빌미로 벌이고 있는 일련(一連)의 시위에서 극렬 난동(亂動)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살인과 방화, 그것은 가혹한 폭력이었다.

엄청난 넓이의 중국 대륙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은 이러한 폭력을 수반한 공포였다. 이 공포는 아직도 중국 대륙에서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중국 지도자들은 말한다. 중국은 아직도 혁명 중이라고. 바로 언제든 죽일 수 있고, 언제든 파괴할 수 있는 공산(共産) 공포정치의 연장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것을 북한이 본받았고, 지금은 남한 적화 혁명을 위해 이른바 주사파 좌익들이 막가파식 폭력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공산주의자들과 대한민국의 좌파들은 혁명 자체를 폭력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중국 공산주의자들처럼 민노당도 “폭력혁명으로 낡은 국가 기구를 때려 부수고, 노동자 정권을 수립한다.” 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대한민국 내 좌익들의 근본적인 사악(邪惡)이다.

나아가 공산주의자들은 이 근본적인 사악에 따른 인간의 폭력을 ‘혁명의 훌륭한 역량’으로 각인시킨다. 죄의식을 망각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전교조를 비롯한 대한민국 내 좌익들은 아름다운 인간성을 자랑스럽게 스스로 포기한다. 더 잔인할수록 더 비인간적일수록 위대한 혁명 전사라거나 당성(黨性)이 좋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는 공산혁명이 왜 이토록 잔인한가에 대한 답이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왜 대한민국에 이토록 비상식적인 폭력이 난무하는가에 대한 훌륭한 답도 될 것이다.

대한민국 좌파들은 기존의 전통 도덕과 사회관계를 타파하고, 정권을 탈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하여 첫 시작부터 일체의 전통과 대립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김대중은 여성부를 세워 여성인권을 부각시키는 한편 호적법을 없앰으로써, 대한민국 2000년 전통의 혈족관계를 무너뜨렸다.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스승을 때려도 법은 교사가 신고하지 않는 이상 문제 삼지 않는다. 이 나라 전통의 예법이 모두 붕괴된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아무도 길거리에서 저지르는 어린 학생들의 범법(犯法)을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산당의 폭력학설은 본질상 인류의 본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이전의 어떠한 사상, 철학, 전통과도 모두 실제적인 연원(淵源)관계를 찾아 볼 수 없으며 마치 하늘과 땅 사이, 공중에서 하나의 이름 모를 공포 체계가 떨어져 내려온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이런 사악한 관념의 전제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이른바 “사람은 반드시 하늘을 이긴다(人定勝天)”는 것으로, 하늘의 순리를 거스르는 역천(逆天)을 꿈꾸는 일이었다. 자연과 하늘과 인간이 공존하는 화합의 문제에서 폭력과 파괴라는 비인간의 세계로 멀리 달아나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좌파들은 ‘노동자 천국’을 세운다는 그럴싸한 거짓말에 속아 전통을 멸시하고 타인의 생명을 가볍게 보며 또한 자신의 생명마저도 새털보다 가볍게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날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되는 근본 이유이다.

공산당은 이런 절대적이고 황당한 이념으로 인간과 하늘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렸고, 자신들과 조상 및 민족의 전통적 혈맥을 잘라 버렸으며, 그들에게 공산주의를 위해 헌신하며 공산당의 학살 에너지를 강화하도록 호소하였다.

현 대한민국의 종북좌파들도 이른바 ‘공산주의 세계’를 진리로 받들고, 그 사악한 진리를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도실용 정책에 적용시켜 투쟁 역량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에 발생하고 있는 오늘의 혼란, 바로 중국공산당의 사악한 혁명전술이 발효되고 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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