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점심식사 후에 목포복음교회의 오용선 목사와 함께 다산초당을 방문하였다. 다산초당은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60km 거리에 있었다. 강진 산속에서 초당에 살며 18년 귀양살이를 하였던 불세출의 위인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10여년 전 내가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에 동경대학 교수가 내게 이르기를 200년 전에 조선 조정이 다산 정약용 산생을 영의정으로 발탁하여 개혁정치를 펼쳤더라면 일본과 조선의 역사는 역전 되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당시의 통계로는 일본인 학자들이 다산 정약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가 300명에 이르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정약용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가 50명이 미처 되지 못한다 하였다. 그때나 지금에나 그런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못하고 있다. 우리 역사, 우리 문화의 소중한 부분을 우리보다 밖의 사람들이 더 소중히 여기고 연구하고 발전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가장 두드러진 예로 베트남의 민족주의자요 공산주의자였던 호지명(胡志明)의 경우가 있다. 호지명은 다산이 지은 목민심서를 애독하기를 거듭하며 그가 독립운동을 하던 중에 긴 시간 도피생활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때에 갑작스런 정보기관의 기습으로 황급히 도피하여야 할 경우가 수차례 있었다.

그런 때에 호지명은 다른 일용품은 못 챙겨가면서도 칫솔과 다산의 목민심서를 싸놓은 보퉁이는 반드시 끌어안고 도피하였다. 호지명에게 있어 다산의 목민심서는 베트남이 해방을 이룬 후에 국가를 다스릴 국가경영의 지침서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금 하노이 중심부에 있는 호지명의 기념묘역에는 조선의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 전권이 고스란히 보관되고 있다.

다산이 위대한 조상이었던 것은 18년간의 유배생활에서 허송세월을 보내지 아니하고 저술에 전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같은 책을 필두로 무려 600권에 이르는 저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일본 학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200년 전에 조선의 정조 왕이 다산 선생을 영의정으로 세워 강력한 개혁정치를 펼쳤더라면 우리의 역사와 아시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오늘 다산초당을 방문하며 이런 감회와 소감을 느꼈기에 이 글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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