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맞는다. 그 장막을 치는 듯한 빗소리에서 아득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오랜 동안 나의 감성과 시심(詩心)을 길러준 패티를 생각한다. 평생을 들으며 살아온 패티의 노래. 오늘 나는 그 은혜로운 분을 위하여 펜을 든다.

그 해 가을, 시골에서 막 도시로 올라온 나는 가을비 내리는 어느 날, 전파상에서 울려오는 노래 한 곡을 듣고 있었다. 아마 ‘초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슬픔을 자아내는 노래가사와 가을비 같은 회색빛 목소리, 마치 빗방울 방울방울을 따라 가슴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호소력 짙은 저음(低音)의 목소리에 젖어서 국화빵 사러나간 생각을 잊고, 그만 빗줄기 속에서 하염없이 듣고 서 있었다.

아마 나는 그동안 여린 여인네 열아홉 순정을 노래하는 가냘픈 애조(哀調) 띤 목소리에 익숙했다가, 패티의 노래에서 가슴을 치는 새로운 충격을 느꼈던 같다. 그리고 속 후련한 해방감과 동화 같은 낭만을 동시에 만났던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패티에게는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패티는 자신이 노래하여 그리는 세상 속으로 우리를 힘껏 잡아당기는 마력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어린 시절 전파상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패티의 노래를 끝까지 듣고 있었던 이유였으리라 싶다. 그리고 그 경험 이후 나는 지금까지 패티김의 노래를 쉬지 않고 듣고 있다.

우리 가요사(歌謠史)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두 명의 여가수를 들라고 하면 나는 서슴없이 이미자와 패티김을 든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못할 가장 맑고 청아한 개성 있는 목소리를 지닌 여가수를 들라고 하면 또한 이미자와 패티김을 든다.

이미자의 노래가 아늑한 안방 도란도란거리는 숨죽인 여인네의 목소리라면, 패티는 사랑방에서 즐거운 객을 맞이하여 술 한 잔 나누어 마시며 부르는 호쾌한 선비의 목소리이다.

이미자의 노래가 한 맺힌 여인의 가슴을 위안하는 섬세한 손길이라면, 패티는 부채 들고 누마루의 기둥을 치는 당당함이 엿보이고, 이미자가 꽃잎 같은 서글픈 숨결을 토한다면 패티는 억눌려 참은 모든 것을 토해내는, 단전 저 밑바닥을 훑어내리는 청솔(靑松)의 숨결이다.

이미자의 노래가 그리운 님 마주 바라보지 못하는 부끄러움이라면, 패티는 좋아하는 사내 앞을 향해 마주 달려나가 노래하는 당당함이다. 이미자의 노래에 님 손길을 다만 기다리는 수동(受動)이 있다면, 패티는 님의 손길을 잡아 끌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능동(能動)이다. 그래서 이미자의 노래에는 옷고름 입에 물고 님 앞에서 살풋이 돌아서는 측면(側面)이 보이고, 패티는 온몸을 마주하는 정면(正面)이 보인다.

이미자의 노래가 한 맺힌 전통의 여인을 담고 있다면, 패티는 한(恨)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가는 길에 서서 이미자가 우회하여 돌아간다면, 패티는 지름길 입구에 서서 직설을 내뱉는다. 그래서 이미자는 한복을 입고 노래하고, 패티는 양장을 입고 노래한다.

이미자가 섬세한 꽃잎을 흔들고 있다면, 패티는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바위의 근엄한 초상(肖像)으로 서 있고, 이미자가 가늘은 실개천을 흐르는 물이라면 패티는 망망대해에 굽이치는 파도다. 이미자가 봄비처럼 흐느낀다면 패티는 깊은 가을을 맞이하는 가을비다. 이미자는 어머니의 노래이고, 패티는 나의 노래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미자의 노래가 들려오면 하던 일을 멈추시고, 나는 패티의 노래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새 한 여인의 목소리가 이렇게 깊이도 들어오는 것에 놀라며, 패티를 바라본다. 만약 이 여인이 우리 곁을 떠나간다면 이 여인만한 여인을 나는 언제까지 기다릴 것인가.

고개를 흔든다. 영원히 패티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패티 앞에 서면, 나의 가을은 가을다워지고, 나의 이별 또한 이별다워진다. 가슴 속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것들이 있어서 좋고, 짝을 잃고 멀리 나는 기러기의 고독도 긴 기다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녀가 노래한 서울의 찬가를 듣노라면, 어느덧 노래 속에 교회의 푸른 종소리가 들려오고, 수없는 꽃들이 피어난다.

오늘도 패티의 노래를 들으며 출근길에 오른다. 이미자의 노래를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나 나는 살아서 패티의 노래를 듣는다. 노래 ‘이별’을 들으며, 하늘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내리긋는 빗속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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