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백운산 국립공원화를 둘러싼 제반 논쟁은 당초 ‘백운산지키기’ 라는 용어를 사용한 광양 백운산 지키기라는 단체의 전술적 선동에서 비롯됐다.

이 운동이 지난 2011년 광양시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은 이유도 ‘백운산 지키기’ 라는 용어에서 풍기는 애향 이미지 때문이다.

백운산을 지킨다는 말은 다른 말로 백운산을 ‘守護’한다는 말이다.

‘守護’ 라는 용어는 원래 ‘자기네’ 땅인데 남에게 빼앗길 우려가 있을 때 사용되는 단어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독도 수호’라는 용어도 원래 독도가 대한민국 땅인데 일본이 빼앗을려고 하기 때문에 ‘수호’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광양백운산의 주인은 광양시가 아닌 국가다. 즉 국가소유의 산림인 국유림이다. 따라서 산림의 용도는 그 산의 주인인 국가가 정한다.

“국가소유의 산림을 광양시민이 수호한다?”

“그래서 서울대 무상양도를 반대하고, 서울대 무상양도를 반대하기 위해 지정요건에도 맞지 않은 국립공원을 추진한다?”

애향심 차원에서야 그럴수 있다.

하지만 서울대 광양캠퍼스 설립을 거부할 땐 언제고 이제와서 서울대 광양캠퍼스 설립이 현실성이 없다고 운운하는 본인들의 오판을 숨기기 위한 의도다.

그 구체적 사례가 2011.11월 광양 백운산 학술림 현장이다.

당시는 백운산 무상양도 문제를 둘러싸고 한 참 논란이 일 때였다. 물론 그 당시에는 국립공원 추진에 대해선 일체 거론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 농생명과학대 측은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남부 학술림에서 광양 학술림 캠퍼스 설립 계획 등을 설명하기 위해 기획재정부, 교과부, 백운산 문제 관련 광양-구례지역 시민단체 관계자들을 초청한  이 행사에 대해 출입문을 가로막고 봉쇄하는 바람에 결국 설명회도 열리지도 못한 채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이들은 회의장에 난입해 회의장내 명패를 부수는 등 온갖 난동을 부렸다.

상식적으로 이들이 이렇게까지  회의를 방해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난동을 이유는 뭘까? 

이들은 당시 서울대가 이들에게 제안한 서울대 광양캠퍼스 설립안이 광양시민이나 순천이나 여수 등 인근 지역민들에게 알려질 게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지역민들과 공청회 등 상의 한마디 없이 일방적으로 거부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이들은 광양시민의 애향심을 이용해 지역민의 의견을 철저히 짓밟았던 것이다.

“서울대 무상양도를 반대하기 위해 요건에도 맞지 않은 국립공원을 해달라고?”

당초 애향심 차원에서 출발한 이 운동이 느닷없이 국립공원 추진으로 이탈된 이유도, 이런 오판(誤判)을 숨길려는 의도와 서울대로 무상양도 반대명분이 약화되자 이를 회복하고자 하는 조바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논쟁을 떠나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광양에 위치한 백운산의 효율적 이용에 관한 문제다.

국가 산이든, 광양시 산이든 아니면 개인 산이든, 실질적으로 중요한 건 그 산이 갖고 있는 이용가치다.

국립공원으로서 이용가치가 있다면 당연히 국립공원을 추진하는 게 맞다.

반대로, 학술적 이용가치가 뛰어나다면 학술림 용도로 사용되는 게 맞다.

일부에서 국립공원으로 이용하면서도 학술림을 겸할 수 있지 않라는 의견도 제시하지만 筆者 견해론 용도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한마디로 국립공원은 보존이 목적인반면 학술림은 연구개발 실험실이기 때문에 다양한 실험을 통해 산림생태 변화과정을 연구해야해야 한다.

때로는 산림에 일부러 불을 지피거나 외래수종 이식작업, 산림녹화사업 등 다양한 생태변화를 연구하기 위한 장소여야 한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뤄진 나라이다. 조선총독부가 한국을 합병하고 토지조사를 실시한 이후 전국의 무연고 토지를 국유화를 시켰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구례 지리산과 광양 백운산 일대의 땅들이다. 솔직히 광양사람들이 일제에 땅을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 없는 풍문일 뿐이다.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국유림화 한 산중에서 섬진강에 맞닿아 있는 광양 백운산과 지리산 일대를 일본 최고의 대학인 동경제국대학의 조선 남부학술림으로 제공키로 방침을 정했다.

일제는 전국의 하고 많은 산중에서 왜 백운산과 인근의 지리산을 동경제국대학 농학부 학술림으로 제공키로 한 것일까? 그 이유는 뭘까?

만약 그 당시 일본총독부가 동경제국대학에게 학술림으로 이 땅을 제공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서울대학교 남부학술림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이런 분쟁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동경제국대학 학술림이 시초가 되어 해방이후 서울대학교 학술림으로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왜 전국의 그 많은 산중에서 이곳 백운산을 일본최고대학의 학술림으로 선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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