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전 수협 경제사업부 대표이사, 현 대아해운 부회장, 김홍철과의 만남

해남출생 김홍철, 그가 고향에 왔다.

 
수협중앙회 경제사업부 대표이사, 대한민국 해병대 학사장교, 해병대 1사단 합기도 무술지도사범, 1982년 수도관 본관 수석사범, 외교통상교섭 전문위원, 해양수산부정책자문위원회 수산분과위원, 대통령직속 농어업 농어촌특별대책위원회 위원, 제4회 바다의날 수산진흥 유공 대통령 표창, 은탑산업 훈장 수상, 합기도 공인 8단, 전국 20여개 합기도 수도관 총관장, (사) 세계 합기도 연맹 총재를 지낸 화려한 경력이 그를 대변한다.

합기도의 명인으로 알려진 그는 2007년 동양무술의 총본산인 말레이시아 쿠칭에서 열린 ‘World Martial Arts Black Belt Hall of Fame 2007’에서 올해의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전 세계 무술 지도자 가운데 무예의 보급과 발전 노력을 활발히 펼쳐 사회에 기여한바가 큰 지도자를 선정하는 행사에서 그는 ‘Grandmaster(그랜드마스터)’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으며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합기도의 김홍철, 그의 스승은 한국 합기도의 창시자이자 동양무술계의 전설적인 인물인 최용술 도주로, 최 도주는 1903년 충북 황간에서 태어난 8살 무렵 일본 땅에 건너가 17년간을 다케다 쇼가꾸로 부터 합기도의 3천8백가지 기술를 전수받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경지에 오른 그는 일본 합기회 합기도의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지도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고.

이런 스승의 후예로 세계 합기도 연맹 총재를 역임한 김홍철은 “유난히 몸이 약해 학창시절 광주에서 처음 합기도를 접하고 나서, 서울 생활 도중 최용술 스승에게서 본격적인 합기도를 접하게 됐다” 며, “본래 합기도의 원류는 신라인이며 그들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궁중무술이 됐는데, 스승님으로 인해 1300년 전 실전된 무술이 본향으로 돌아왔다”고 전했다.

김홍철은 고향 해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가방 보따리 하나 들고 광주로 가서 당시 5년제 학교인 광주 조선대 병설 고등 공업학교를 다니며 이른 새벽,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부터 신문을 돌리는 고학생이 됐다.

하루 한끼조차 먹기 힘들었던 고단한 시절, 그만 멍석에 놓인 쉰밥을 주워 먹고 장티푸스에 걸려 크나큰 고초를 겪고 난 뒤 약한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 합기도에 입문했다.

그러다 5년제 학교를 마치고 단국대에 편입해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을 졸업 후 1977년 OSC 학사 장교로 해병대에 입대했다.

그는 해병대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인간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신화적인 인물이었던 이동룡 장군 밑에서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던 훈련을 받았다고 하는 그는 “젊어서 육체가 정신을 능가하면 쾌락과 재물 탐하게 되고, 나이가 들어 정신이 육체를 능가하게 되면 교활함과 자만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해병대의 혹독한 훈련은 젊은 육체가 혹사되면서 올바른 정신이 깃들 수 있었고, 그러한 인고의 과정을 거쳐 정신과 육체가 서로를 견제 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전역 후에도 육체의 단련을 게으르지 않기 위해 합기도 수련을 계속해 나갔다. 합기도 유단자에 해병대의 무술교관을 지냈던 그였지만, 본가의 전통술기 수도관에선 백띠를 차고 후배들을 가르쳤다. 바쁜 수협중앙회 직장 생활 속에서도 서울 강남 논현 도장의 담임사범을 거쳐 한국 합기도 수도관의 총관장, 그리고 홍승길 선생에 이어 합기도 종가의 후계자로써 일생 동안 무도인의 길을 걸어왔다.

수련생들에게는 늘 “합기도인은 항상 불의에 정의롭고, 약한 사람에겐 선의롭고, 자신에게는 냉엄하리 만큼 엄격히 자신을 지키고, 남에게는 존중과 사랑받을 행동을 하며, 슬기롭고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수협 중앙회 대표이사 재직 시에도 러시아 합기도연맹과 국가발전의 토대가 국민의 건강한 체력을 통해 다져질 수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상호 기술교류와 합기도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하는 협약을 가졌다.

또, 중국 해군 총제독 앞에서 정통합기도 시연 그리고 미국과 대만 등지까지 정통합기도 널리 알려 2007년에는 국제무예연구원이 주관해 전 세계 무술 지도자 가운데 무예의 보급과 발전 노력을 활발히 펼쳐 국제사회에 기여한 바가 큰 지도자에게 수여하는 ‘세계 무도인 상’을 수상했다.

합기도라는 무도의 한 길을 걸으면서도 직장생활 또한 줄곧 한길을 걸어왔다.

1980년 수협 중앙회 평사원으로 입사해 경제사업부문 유통기획부장, 경제기획부장 등을 거쳐 한 해 10조원이 넘는 예산을 총괄하는 경제사업부 경제사업부 대표이사에 올랐다.

2001년 경제기획부장 시절, 노량진 수산시장의 정부 민영화 방침이 발표되자 그는 비영리 공익기능을 가진 생산자단체인 수협이 인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경영진에 주장하며 노량진 수산시장의 인수를 주도했다.

경영진을 설득, 했다. 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받아 해산물 판매뿐만 아니라 쇼핑, 오락과 여가 기능을 집약한 개념을 넘어서 대도시권 허브역할에 필요한 공공서비스 기관, 상업시설 등의 기능까지 집약시켜 매년 30~40억의 흑자를 냈다.

이렇게 수협 경영 정상화의 기반을 닦고 수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8년 4월 ‘수협 창립 46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경제인에겐 최고 영예인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수협 중앙회 경제사업부 대표이사에 취임하고부터 자정 이전엔 결코 퇴근한 적이 없을 만큼 직무에 충실했고, 업무상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하루 2시간 이상을 결코 자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특히나 조직뿐만 아니라 정부기관에서도 그의 빈틈없는 논리력과 수협을 위한 열정은 정평이 나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수협 중앙회 한 관계자는 “김홍철 전 대표이사는 조직과 공의를 위해선 자신의 목숨을 걸만큼 담대하지만, 개인을 위한 일에는 손톱만큼도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불어 자신이 인사과장으로 있을 때어도 몇 번이고 중용할 사람이 있으면 말해달라는 진언에 오히려 가까운 사람을 더욱 멀리했다고 전했다.

그와 함께한 이들은 1962년 4월 1일 수협 중앙회 창립이래 그를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으며, 수협의 역사가 얼마나 더 진행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그러한 인물은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

 “오늘이 있기까지는 사람과 사람 간의 인연이었다”

 
4월30일 해남대흥사 찻집에서 만남 김홍철 전 수협중앙회 대표이사는 “오늘이 있기까지는 사람과 사람 간의 인연이었다”고 했다.

그가 수협 경제사업 대표이사를 지낼 무렵, 해외 입양수출 1위 국가라는 안타까운 현실과 사회적 경제적 불안정으로 버려질 위기에 놓여있는 아동들이 건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한국수양부모협회와 가정 위탁사업 후원을 위한 자매결연을 맺어준것일은 지금도 자랑스럽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르는 일은 해병대 소위 임관 무렵, 아버지가 위독하단 소식에 고향 해남으로 달려가 피골이 상접한 아버지를 뵈었을때 그 모습이 너무나 서러워 아버지의 가슴에 한참동안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고 한다.

그 때 아버지는 “니가 울면 내 마음이 너무 괴롭다, 괜찮으니 너의 본분에 맞게 지금 당장 부대로 돌아가 국가에 충성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대로 돌아간지 3일만에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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