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명량대첩 그리고 '어란'여인...해남 또 하나의 관광지로 기대

▲ 어란 여인을 최초로 세상에 내놓은 박승룡씨가 어둠이 찾아오는 ´석등롱´앞에 서 있다.
명량대첩 이튿날인 1597년 9월17일 해남 어란 마을 앞바다에 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다. 이를 본 한 어부가 여인의 시신을 근처 소나무 밑에 묻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여인의 무덤앞에 석등을 세우고 불을 밝히고 넋을 위로 하였다. 지금도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동네주민 모두가 정성스러운 제사를 지내고 있다.

1597년 7월의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의 수군이 전멸하자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임명한다.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에서 전멸한 조선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구례·곡성·순천·보성·장흥·강진·진도를 거쳐 해남 울돌목에 이르는 남도수군재건길에서 규합한 13척의 병선으로 1597년 9월 16일 133척의 왜선을 맞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둔 세계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전쟁이 바로 명량대첩이다.

명량대첩, 세계해전사에 전무후무하리만큼, 이 말도 안되는 승리를 두고 이순신도 “천행 이었다”할 만큼 기적의 싸움이었다. 이순신의 지략과 전술 그리고 첩보(정보)에 의한 사전준비에 기한 것으로 이순신의 전략이 이날 승리를 만들어 냈다.

명량해전 이틀전인 1597년 9월 14일자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어란진에서 있었던 일로 김중걸이 왜에 붙잡혀 왜선에 감금될 때 ‘김해인’ 이라는 여인이 결박을 풀어주며 기밀을 제공했다‘며 첩보전에 관한 내용을 밝혔고, 조선왕조실록에 ‘선조 30년(1597년) 이순신은 왜선중에서 여인으로부터 정보를 탐지하여 곧장 장계하였다’는 기록은 이를 확실히 뒷받침하고 있다.

구국의 여인이라 이름한 ‘어란’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해남 어란진에 정박한 일본군 장수 ‘간 마사가게’는 이순신 장군이 보낸 간첩 즉, 자신의 애인 ‘어란’에게 명량해로의 출정기일을 발설하게 되고 어란은 김중걸을 통해 이순신 측에 전달되었으며 첩보를 받은 이순신은 곧바로 명량해전을 준비하여 결국 12대133의 싸움에서 이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 ‘어란’을 고증하고 연구하며 오직 ‘어란’에 매달리고 있는 박승룡 옹(해남 송지)은 그 같은 문헌적, 구전적 근거를 바탕으로 의기 ‘어란’여인을 역사적, 사실적인 인물로 규정하고 임진왜란의 그늘에서 구국한 그녀의 실체를 세상에 내 놓았다.

박승룡 옹은 5월 1일 ‘한국은 ‘어란’을 드라마틱한 ‘역사 변이자원’으로 보유하다’라는 제목으로 본보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김정배 박사(현 문화재위원회 위원장)로부터 2009년 5월 12일 다음과 같은 서신을 받았는데 “제번 하옵고 보내주신 『호국여인 어란자료집』을 잘 받았습니다. 명량대첩 승리에 기여한 호국 어란의 중요한 핵심부분을 많은 정성을 쏟아 글로 보여주었습니다. 훌륭한 자료집을 출간하신 것 축하드리며 많은 업적을 이루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또 한국문화재보호연구회장으로부터 2009년 5월 28일 받은 서신에는 “선생님의 건안을 비오며 향토사학연구의 발전을 기원 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선생님이 발굴한 호국 여인 ‘어란’ 자료를 의뢰하오니 선처 바랍니다.”는 내용이라는 것.

또 이 무렵 문화관광체육부 장관실에서 전화가 왔는데 “『호국 여인 자료집』을 잘 읽었다”며 문화재청의 주소를 불러주며 문화재청에도 이 자료집을 보내면 많이 도와 줄 거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3년 10월에는 서울대학교의 신광순 명예 교수님으로부터 ‘어란’ 여인에 관한 제반 자료 요청을 해 왔기에 그에 응 했더니 뉴시스사에 의해 ‘명량대첩 배후 미녀스파이, 어란’이란 제목으로 기사화 되었다며 기사원문을 보여줬다.

이 기사 말미에 “팩트에 픽션을 보탠 팩션은 세계적 추세다. 팩션의 바탕인 역사연구 조류는 미시로 대세다. 이것들로 쓴 책, 즉 눈에 확 들어오는 콘텐츠는 발표 즉시 영상물로 둔갑하는 오늘이다. 박옹 덕분에 한국은 드라마틱한 역사 변이자원을 하나 더 보유하게 됐다.”고 쓰여 있었다.

또한 이 기사에서 “박옹은 어란이 몸을 던진 낭떠러지인 여낭터에 올해 초 표지비와 함께 어란상을 세웠다. 비용은 뜻밖에도 일제강점기 해남 태생 일본인들인 고니시 유이치로(71) 형제가 댔다. 이들의 부친은 송지면 어란리 심상소학교 교장을 지냈고, 외조부는 어란리 최초의 김 양식자다. 형제는 ‘한·일 간의 사실(史實)을 놓고 심혈를 경주하는 데에 대한 축의금으로 제공한 것이지, 희사금은 결코 아니다’고 강조했다”는 것.

그리고 이 신문은 “역사서가 누락한 어란을 6년에 걸쳐 발굴, 실체를 확인한 박옹은 “정유재란 416년이 지난 시점에 양국은 어란을 매개로 작은 화해를 이루기에 이르렀다”고 특기했다“고 부연했다.

▲ '어란'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지금 현실이 '역사'라는 것, 방송국 인터뷰중인 박승룡 옹.
박승룡 옹은 기고문 끝에 “‘어란’이야기는 6개성상이란 기나긴 세월을 우여곡절의 험한 가시밭길과 어두운 터널을 넘고 넘어, ‘어란’ 이야기라는 비석이 해남군 명의로 건립되고, 뒤 이어 어란보존현창회에서 일본 분들의 도움으로 ‘어란’상과 ‘어란’이 투신한 곳의 표지 비가 세워졌다”며 어란성역화와 관광 사업화에 대한 그동안의 경과 과정을 알려줬다.

박 옹은 “지난해 명현관 전남도의회 경관위원장의 주재로 전남도와 해남군 문화관광과장이 중지를 모은 뒤 최근 다시 해남군에서 ‘어란’이야기 비석 옆에 정자(亭子)를 세우고. 여낭터 까지 통하는 일부 도로 확장 공사를 끝마친 상태에 있다”며 “마침내 ‘어란’는 드라마틱한 한국 ‘역사 변이자원’으로 당당히 승화한 것”이라고 기뻐했다.

박 옹은 “나는 며칠 전 한반도의 최동단부 경상북도 호미곶(虎尾串)을 답사했다. 우리 조선의 지도상 호랑이 꼬리를 상징한다 해서 붙여진 이 곳은 자연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한반도의 최남단 해남의 땅끝과는 달리 인위적으로 조성한 거대한 조형물로 꾸며진 공원들이었다. 이 웅장하고 광활한 공원을 관람하면서 경상도 도민들의 단합된 총화를 연상했다”고 한다.

박 옹은 “내가 사는 전남의 해남 땅, 언제 어떻게 총화를 이루어 모처럼 한국이 선택한 ‘역사의 변이자원’인 ‘어란’을 호미곶처럼 역사의 고장, 고장의 관광지로 이룩할 것인가라는 일념으로 귀성의 길을 재촉했다”는 말로 기고문을 정리했다.

▲ 어란이야기 비석 앞에서 사진(좌로부터)고니시유이찌로(부친이 일제 강점기 어린초등학교장을 지냈으며 이곳 어란 출신임, 기업진단가),박승룡 옹, 목포대 강봉룡교수 부인,히가가쓰노리(일본 향토사학가)
한편, 이 '어란'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관광사업화하는데 소재로서  손색이 있냐 없냐라는 것인데  해남지역의 역사와 우리고장의 문화에 대한 박철환 해남군수의 지대한 관심으로 지난 2012년 12월 20일 해남군 송지면 어란마을 뒷산 여낭터(어란 여인이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낭떠러지) 인근에 <어란여인 이야기>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 비문의 새겨진 글은 다음과 같다.

어란여인이야기

‘정유재란 때에 일본장수 칸 마사가게(菅正陰)는 송지면 어란진에 주둔하던 어느 날 그의 여인인 ‘어란’에게 출병의 기일을 발설했다. ‘어란’여인은 그 사실을 이순신에게 전하여 명량해전의 중요 승인이 되었다. 이로써 ‘어란’여인은 나라를 구했으나 자신의 연인이 해전에서 전사한 것을 비관하여 여낭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어느 어부가 그 시신을 거두어 바닷가에 묻어주고 석등롱(石燈籠)을 세워 그녀의 영혼을 위로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해남에 근무했던 모 순사의 유고집에 나오는 이야기는 많은 언론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국악뮤지컬과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 등, 새로운 이야기들로 발전해 가고 있다. 어란마을의 당집과 여낭, 석등롱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를 이룬다

글 국립목포대학교도서문화연구원 강봉룡 원장
2012년 12월 20일
해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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