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근성, 식민근성, 독재근성으로 찌든 때, 글로벌 정격매너로 씻어내야

외국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사람들이 사막이나 계곡에서 물을 떠마시거나 운동장에서 놀다가 목이 말라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마시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이때 물을 떠먹을 도구가 없기 때문에 어떤 이는 손바닥으로 뜨거나 받아서 먹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엎드리거나 고개를 틀어 직접 입을 갖다대고 마신다. 헌데 많은 한국인들은 이런 장면을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한국 영화는 대개 주인공이나 하인이나 똑같이 엎드려 직접 입을 대고 물을 마신다. 바로 이런 사소한 장면 하나가 영화를 망치는 줄은 감독은 물론 배우, 관객들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 영화 한 편으로 외국인들은 한국을 아직도 미개한 나라로 인식해 버린다. 하여 기록적인 제작비를 들여 꽤 잘 만들었다고 하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해외로 수출이 안 된다. 글로벌 시각에서 보면 무(無)매너, 짝퉁이다.

▲글로벌 정품격 악수 자세, 아웅산 수치 여사 [청와대]

 기드온의 삼백 용사 이야기

《성경》의 <사사기> 제7장을 보면 기드온의 삼백 용사 이야기가 나온다. 기드온이 그를 좇아온 백성들을 모두 모아 골짜기 반대편의 적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백성들이 너무 많은즉, 두려워하는 자는 돌려보내라 하니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가고 남은 자가 일만 명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다시 그 일만 명도 너무 많다 하였고 그들 모두를 강가로 데려가 물을 마시게 하였다.

하여 그 백성들 가운데 개처럼 엎드려 물을 마신 자와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들을 가려 모두 돌려보내고 나니 남은 자가 삼백 명뿐이었다.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신 자들이었다. 그 용사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 머리를 숙이지도, 또 무릎을 꿇지도 않고 쪼그려 앉되 바른 자세로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입에 갖다 대어 핥아먹었다. 여호와께서는 그 삼백의 용사들에게 야습할 것을 명해 적을 물리쳐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삼백 용사들은 물을 마시면서도 눈길은 강 건너편의 적을 주시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것이다.

냅킨은 왜 필요한가?

서양인들은 식사 때 냅킨으로 앞을 가린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굳이 그런 가림수건이 필요치 않다고 여겨 걸치지 않을 뿐 아니라, 고작 식후 입을 훔치는 데 사용거나 처음 놓여진 그대로 두고 식사를 마치기도 한다. 그리고는 서양인들이 지나치게 깔끔을 떤다거나,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던 서양의 보통 사람들이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게 된 지도 불과 2백 년밖에 안 되었다고 낮춰보기도 한다.

그들은 식사 때 등을 곧추세우기 때문에 수건으로 앞을 가린다. 왜 그렇게까지 불편함을 자초하느냐? 우리처럼 입을 그릇에 가까이 가져가면 심지어 국이라 해도 흘릴 일이 없는데? 하지만 서양인들의 관념에선 고개를 숙여 입을 갖다대고 먹는 것은 인격체가 아니라 짐승격이다.

게다가 한국인은 하나같이 식불언(食不言)! 서양인들에게 식사는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밥먹기가 아니다. 대화와 소통의 장으로 식담(食談)을 즐긴다. 관심과 배려에서 상대[話者]를 주시해야 하기 때문에 상체를 꼿꼿이 세워 시선을 상대방의 눈에 둔 채로 앞에 놓인 접시의 음식을 입에 가져간다.

얼마 전 한국 어느 TV에 해외의 요리를 소개하는 프로가 있었다. 요리전문가인지 여행전문가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유럽의 어느 지역을 찾아다니며 유명한 요리의 조리과정을 비춰주고 또 자신이 직접 시식하며 음식맛을 소개하는데, 문제는 그 역시 음식을 입에 넣을 때마다 고개 푹 숙여 짐승격을 해보였다는 거다. 옆의 냅킨은 그대로 두고. 글로벌 매너 빵점인 그 프로를 한국 안방이니까 돌리는 거지, 다른 나라에서라면 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밥맛없는 한국인들?

물론 글로벌에 관심도 없고 그냥 우리식대로 살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우리식이라 해서 모두가 똑같으리라고 생각은 오산이다. 품격의 차이는 세계 어느 민족, 어느 문화권, 어느 시대나 반드시 있어 왔다. 한국 역시 반상의 구별이 없어진 지 오래지만 품격에서는 희미하지만 구별이 없지 않았고, 어느덧 사회가 안정을 대물림하면서 상류층 매너가 차츰 형성되어가고 있다.

흔히들 함께하기 싫은 사람을 두고 ‘밥맛없는’이란 표현을 쓴다. 당연히 그런 사람과는 친구는 고사하고 함께 일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헌데 한국은 이미 선진국 초입에 들어 싫든 좋든 세계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이에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한국인의 밥맛없는 테이블매너다.

만약 세계의 지도자들이 한국 대통령을 ‘밥맛없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국무총리, 장관, 대사를 매너 없는 유학생 정도로 여긴다면? 위급시에 걸려오는 전화를 호의 있게 받아줄 수 있을까? 도와주는 척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한껏 챙기고, 이참에 혼 좀 나봐라 딴전 피우며 한 바퀴 돌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고 그 피해는 당연히 국민들의 몫이겠다.

리더십은 테이블매너로 길러야

한국인들은 학교 다닐 때 반장이나 회장 몇 번 해본 걸로 리더십을 지녔다고 자신한다. 때문에 어쩌다 갑(甲)이 되면 자신에게도 리더십이 있다고 착각하기 일쑤다. 하여 완장형, 감투형, 쩍벌남 리더들만 나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서양인들은 테이블에서 남들과 소통하는 데서부터 리더십을 길러 나간다.

파티의 호스트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리더십이 뭔지도 모른다. 얻어먹기만 하면서 출세하기까지 굽신거리거나, 갑(甲)의 자리에서 접대만 받아 본 한국의 엘리트 중 정품격 글로벌 매너를 갖추고 호스트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지를 알 턱이 없다. 이 나라에선 그런 사람들이 대통령, 총리, 대학총장, 장관, CEO, 외교관을 하고 있다.

바른 자세에서 상대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차츰 시야의 폭이 넓어져 테이블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남을 바로 본다는 것은 곧 남도 나를 보고 있다는 의식을 놓치지 않게 해준다. 그래야 호스트(호스티스)로서 파티나 회합을 주재할 때 저 멀리 구석구석까지 모두를 한눈에 꿰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런 게 리더십이다.

매너란 소통을 통해 상대와 교감하는 윈도우 창(窓)이자 도구이다. 이런 게 몸에 배이게 되면 어느 순간 상대들을 조감도처럼 내려다보고 그 속내를 훤히 통찰해 들여다보는 내공이 생기게 된다. 그제야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는 창조적 솔루션이 가능해진다. 그게 주인장으로서 글로벌 비즈니스 매너의 하이라이트이다.

자세가 곧 마음이다

남녀 불문 사관생도처럼 바른 자세면 글로벌 사회에서 일단 기본은 갖춘 셈이다. 미국의 많은 하층민이나 흑인들, 그리고 이민 온 동양계 사람들이 바르지 않은 자세 때문에 주류사회에 편입하지 못하고 있다. 해외로 진출한 수많은 한국 태권도인들의 성공도 기실 이 자세가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바른 자세로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기본기가 갖춰졌기에 글로벌 매너를 습득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인들과 달리 식사 때 일본인들은 고개를 숙여 입을 그릇에 갖다대는 대신 그릇을 들어 입에 가져다 먹는 습관이 있다. 무사(武士)들의 식사 습관이다. 해서 같이 허리 굽혀도 일본인들은 조금 다르다. 일본인들은 고개를 그대로 두고 허리를 반듯한 자세로 굽힌다. 해서 나름 절도가 있으며 굽히는 각도도 서로 같게 맞춘다.

헌데 일본 인사법을 배운 한국인들은 그냥 굽히는 정도가 아니라 목과 어깨를 움츠리고 눈까지 내리깐다. 국그릇에 입을 갖다 대는 습관이 인사할 때 그대로 나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주눅들고 쫄아든 비굴하기 짝이 없는 자세다. 특히나 갑(甲)에게는 완전 자라목으로 턱까지 내밀어 말 그대로 짐승격이다. 사대근성에다 식민노예근성까지 보태진 것이다.

 

글로벌 사회에서 공손 혹은 겸손이란?

오랜 사대와 반골, 피식민지배, 그리고 독재와 피독재 근성으로 심성이 뒤틀어진 한국인은 상대가 자기보다 더 숙이면 으쓱해하고, 굽신거리면 기특해하며, 목까지 움츠리고 낮춰 내밀면 득의양양해한다. 그냥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인사라기보다는 갑(甲)과 을(乙)의 관계를 확인하는 의례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허나 이런 자기비하 내지는 가학적 인사법을 서양인들은 도무지 이해 못한다. 오히려 인간 존엄성을 포기하거나 무시하는 어이없는 일로 인식한다. 봉건사회도 아닌데 웬 노예? 인격체로서의 자격 상실이다. 해서 짐승으로 여기기 때문에 경원시하여 같이 놀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겸손하게 사양하고 자기를 낮추는 게 미덕? 그건 국내에서, 우리끼리 사적인 관계에서만 사용해야 한다. 서양인은 물론 글로벌 비즈니스 세계에선 그런 개념 전혀 없다.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다. 배려와 환대가 누구를 낮추거나 높이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상대를 자신과 동격으로 존중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상대의 존엄성이 곧 자신의 존엄성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낮추는 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따라서 상대도 인격체로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인격체로서 온전하지 않은 사람을 대접한다는 것은 짐승을 사람으로 대하는 꼴이다. 이는 자신도 짐승격임을 선언하는 행위가 된다. 해서 선진국 사교클럽에 이런 짐승격 혹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를 데리고 갔다간 데려간 그 회원조차 예외없이 퇴출 내지는 일정기간 클럽 출입금지 당한다. 집으로 초대했다간 가족들로부터 가장으로서의 신뢰를 의심받게 된다.

한국인은 근 백 년 동안 주체적(주동적)으로 살아온 적이 없다. 독립, 자주, 주체, 인권, 민주, 동등, 평등, 진보, 정의 구현, 사대 극복, 식민 극복, 종북 탈피, 종미 탈피 등등 유독 한국인들이 좋아해서 김치처럼 하루도 걸리지 않고 입에 오르내리는 용어들이지만, 실은 그만큼 트라우마 내지는 콤플렉스가 크고 많다는 것이겠다. 한(限)이 많은 게다. 한국인들이 이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자세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꿇을지언정 숙이거나 굽히지 않는 것이 무격(武格)이다. 국제관계건 비즈니스관계건 글로벌 품격의 기본 뼈대는 기사도, 즉 신사도다. 글로벌 매너는 당당함에서 시작한다. 겸손하고 온유하되 당당해야 한다. 당당하지 않은 겸손이나 온유는 곧 비굴이거나 자신 없음이다. 허리 굽히고 고개 숙이는 각도만큼 메이드인코리아의 글로벌시장 가격이 깎인다. 수동적인 겸손을 버리고 적극적인 배려와 환대로 나가야 한다. 자세가 바뀌면 반드시 생각도 바뀐다.

창조경제의 시작은 배꼽 키우기부터

예전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 빼고 다 바꾸자!”며 강력하게 혁신을 주문해 우리 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미쳤었다. 또 “한국 정치는 삼류”라고 했다가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 구태의연한 사고에서 벗어나 발상의 전환을 통해 창조경영을 하고자 몸부림친 충격요법이었다. 덕분에 삼성은 눈부신 성장을 했다. 하지만 청와대나 관료, 정치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삼류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옛날이야기. 마누라 남편도 여차하면 바꾸는 시대를 맞았지만 그러고도 못 바꾼 게 매너다. 만약 그때 삼성이 기술이나 제품을 넘어 글로벌 매너까지 세계 일류를 주창했었다면 지금쯤 세계 일등 제품을 넘어 수많은 명품들로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있을 것이다.

품격 없인 명품, 명문, 명가 없다. 이번에 사고친 영훈국제중학교가 그 한 예가 되겠다. 저품격 매너에서 무슨 창조적인 발상이 나오랴. 굽신대는 사람이 만든 제품에 신뢰가 가는가? 인간 존엄성을 모르는 사람이 만든 작품에 경외심이 우러나올 리 없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이 명품. 그 배꼽의 크기가 곧 품격의 차이다. 배꼽 키우기가 바로 창조경제다. 헌데 허리 굽히고, 고개 숙이고,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어찌 배꼽을 키우랴.

새품격 운동으로 새마을 정신을 이어야

다시 새마을 운동 붐이 인다더니 그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될 거란다. 새마을 운동과 창조경제? 오죽 창조적 아이디어가 빈곤했으면 장롱 속 새마을 운동일까. 다시 통일벼 심자는 구호처럼 들린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발상의 전환 없는 복고풍이라면 대한민국 정말 희망 없다. 이번 정권이 지상과제로 삼고 있는 창조경제를 두고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어떤 외국인 서울대 겸임교수가 “불쉿(Bullshit, 허튼소리)”이라고 했다니, 그 시작이 어디여야 할지 좀 더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대통령은 끊임없이 부처 장관들에게 창조경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라고 독촉해대지만, 기실 언제 공무원이나 관료, 정치인들이 창조경제를 한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기업에선 지금도 24시간 밤을 세며 개발하고 연구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창조경제는 그들이 하는 거다. 그러니까 관료들더러 어디 누가 창조경제한 것 찾아 빨리 보고하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제도든 기술이든 의식이든 매너든 중단 없는 혁신만이 미래를 보장한다. 결국은 사람이다. 최고의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만큼이나 최고의 글로벌 매너를 습득하기 위해서도 투자를 해야 한다. 고품격 매너로 인적 자원을 디자인해나가야 한다. 그래야 창조경제가 가능하다. 인간 개조, 국민 개조! 글로벌 사회에서 “한국사람 달라졌어요!”란 소리가 나와야 한다.

글로벌 무대에서 하인취급 당하는, 공자의 나라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굽신인사법을 우리식이라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한번 식민지배당하면 그 노예근성 극복하는 데 한 세기가 걸린다고 한다. 꽃대든 지조든 꺾임은 한순간이지만 다시 세우기는 그렇게 힘든 것이다. 해서 새삼스레 더 엎드리고, 더 굽히고, 더 움츠리고, 더 숙이라는 게 아니라 그냥 바로 서자는 데도 그게 그리 어려운 게다. 우리 세대가 반드시 이 질긴 타성의 심줄을 끊어내야 한다! 로컬경영 5년짜리 대통령은 못해도 글로벌경영 대기업 오너라면 해 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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