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유일의 장석장인 '유석종' 후계자 없이 세월과 함께 사라지나...

1938년생, 그의 이름은 유석종이다.
해남 유일의 장석장 유석종 옹.

 
연세보다 훨씬 젊어 뵈는 장인 유씨를 만났을 때 유 장인은 대뜸 기자에게 돌쪽(돌쩌귀/문짝을 문설주에 달아 여닫는 데 쓰는 두 개의 쇠붙이)을 이야기한다.

장식의 아이콘이 돌쩌귀인 모양이다.

실제 그의 집, 돌고개(해남읍서 대흥사 가는 길목의 고개 길 마을) 대장간을 찾았을 때 집 둘레로 돌쩌귀며 문고리며 여러 장식들을 부착해 놓았다.

유 장인의 부친은 그야말로 성냥간(대장간/쇠를 달구어 온갖 연장을 만드는 곳)의 성냥쟁이였다고 그가 밝힌다.

그런 부친은 아들만은 뭇사람들의 괄시를 받지 않도록 성냥간은 발도 못붙이게 했다고.

그런 그가 18살 때 이미 앞다지(앞닫이, 즉 반닫이를 유 옹은 ‘앞다리’라고 발음했다/앞의 위쪽 절반이 문짝으로 되어 아래로 젖혀 여닫게 된 가구의 일종)의장석을 만드는 성냥쟁이가 된다.

그러나 그의 부친도 그냥 호구지책의 성냥쟁이가 아닌 진정한 '장석장'이었던 것이다,

유석종씨는 21살에 군대를 가서 24살에 제대하고 그로부터 쭉 해남 유일의 장석장으로서 해남 돌고개에서 50년을 지금껏 살아온 것이다.

이 성냥간에서 장석과 함께 50년 세월을 이 동네에서 터줏대감으로 지금 껏 살았다.

그러나, 그의 대장간을 찾았을때 그곳은 대장간이 아니었다.

▲ 이날 찾은 유씨의 대장간 내부는 히말라야 어느 동네 당골래 집처럼 온갖 장석들이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히말라야 아래동네 네팔의 어느 당골래 집에 들른 듯 가지각색의 양철 놋판 등 여러문향의 장석이 주렁주렁 빨래줄에 걸린 빨래처럼 널려있었다.

이날도 놋판을 놓고 망치질을 하는 유석종씨는 전통 장석을 만들어내는 장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대장간에는 만들다 만 여러 연장이 있었다.

그 중 목수의 필수품인 ‘끌’(나무를 깍거나 구멍을 뚫을 때 망치로 한쪽 끝을 때려서 쓰는 공구)이 유난히 많았다.

이유인 즉, 그 옛날 아니 가까운 최근까지도 영호남을 다합쳐 70-80%의 끌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자신이 만든 끌이 목수들 사이에서는 알아주는 명품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는다고 아쉬워한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눈이 침침해 싯돌질을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장석으로 돌아가서 그의 대표적 장석 작품은 서울 경국사 대웅보전의 동 장석, 연동 윤선도 고가, 녹우당 대문장성 그리고, 대흥사 백화암의 철장석을 비롯 이미 100여곳 이상의 사찰과 한옥의 전통 장석을 도맡을 정도로 그의 솜씨는 뛰어났다.

▲ 1948 해방직 후 유씨의 부친이 만든 앞닫이 장석 실물, 현재 강진군 병영면 마상거씨가 소장하고 있다
▲ 1955년 6.25사변 후 유씨가 19세 때 만든 앞닫이 장석, 현재 강진군 옴천면 이성기씨가 소장하고 있다

 

 

 

 

 

 

 

유씨는 지금도 돌고개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열심히 장석을 만들고 있다.
비록, 주문은 없지만 습관처럼 대장간에서 망치를 들고 장석판을 두들이고 있는 것이다.

전통 장석을 만든지 50년이지만 묘하게 이 분야는 명인이 없다고 한다.
장석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명인 신청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전수받을 후계자도 없다.
안타깝게도 이대로 유 씨의 수제 장석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최근 한옥 바람이 불어 한옥촌을 비롯하여 그야말로 한식장석이 많이 필요하지만 이미 기계로 찍어낸 장석이 유 씨의 작품을 찾지 못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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