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12월20일, 해남 어란마을 뒷산에 어란여인 이야기 비석 세워...명량대첩 재 조명해야

▲ 지난달 20일 세워진'어란'여인 이야기 비와 비문
어란여인 이야기
정유재란 때에 일본장수 칸 마사가게(菅正陰)는 송지면 어란진에 주둔하던 어느 날 그의 여인인 ‘어란’에게 출병의 기일을 발설했다.
‘어란’여인은 그 사실을 이순신에게 전하여 명량해전의 중요 승인이 되었다.
이로써 ‘어란’여인은 나라를 구했으나 자신의 연인이 해전에서 전사한 것을 비관하여 여낭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어느 어부가 그 시신을 거두어 바닷가에 묻어주고 석등롱(石燈籠)을 세워 그녀의 영혼을 위로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해남에 근무했던 모 순사의 유고집에 나오는 이야기는 많은 언론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국악뮤지컬과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 등, 새로운 이야기들로 발전해 가고 있다.
어란마을의 당집과 여낭, 석등롱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를 이룬다

글 국립목포대학교도서문화연구원 강봉룡 원장
2012년 12월 20일
해남군

지난해 12월 20일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마을 뒷산에 세워진 어란 여인의 비문의 글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정유재란 중이던 1597년 9월 16일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해전, 명량대첩.
이 13대133의 전쟁에서 이순신 장군이 그야말로 대승을 거두게 된다.

명량해전은 해남 우수영과 진도 녹진 사이의 해협인 울돌목에서 벌어진 해전을 말한다.
이순신 장군은 이 해전을 두고 거의 기적에 가까운 싸움, “천행 이었다”고 난중일기에 적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명량해전이 얼마나 어려운 전쟁 이었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23전 23승이라는 단 한번의 패배도 없이 전승을 거두는 전무후무한 전쟁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러한 미증유의 승리에는 그 때, 그 위치, 그 상황에 맞는 전술과 전략, 그리도 무엇보다도 이를 가능케 한 첩보(정보)를 이순신 장군은 간과하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지략을 펼쳤을 것이라고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1597년 9월 16일 울돌목에서 조선수군 13척 왜선 133척의 말도 안되는 전쟁에서 이순신 장군은 승리했다. 이 승리에는 수 많은 영웅담이 생성됐는데 당시 우수영과 녹진 사이에 걸쳐 놓았다는, 과학적으로 풀리지 않는 쇠사슬을 비롯하여, 왜군이 흘린 피로 물들어 버린 피섬과 노적봉이야기, 그리고 왜군의 시체를 수습하여 준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진도 왜덕산,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 바로 ‘어란’ 여인의 등장이다.

박승룡(85·해남 송지)옹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어란’여인은 명량해전과 연관이 되어갔다.

박 옹에 따르면 주민들의 구전과 일본인의 기록에 의하면 어란 여인의 애인 간 마사가게는 실제 존재했던 인물로 확인되고, 그리고 명량해전에 관한 우리나라 기록(1597년 9월 14일자 난중일기에 어란진에서 있었던 일로 김중걸이 왜에 붙잡혀 왜선에 감금될 때 ‘김해인’ 이라는 여인이 결박을 풀어주며 기밀을 제공했다./조선왕조실록에 ‘선조 30년(1597년) 이순신은 왜선중에서 여인으로부터 정보를 탐지하여 곧장 장계하였다’ )이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일제 강점기 해남에서 19년간 순사를 지낸 일본인 하지만다로의 유고집에서 명량해전을 앞두고 어란진에 주둔한 일본군 장수 ‘간 마사가게’는 이순신 장군의 간첩 ‘어란’ 여인과 사랑에 빠져 무의식중에 명량해전으로의 출전기일을 발설하고 만다.

어란은 이를 일본군에 잡혀있던 김중걸을 통해 이순신 장군에게 연락되고, 조선군은 이 결정적인 정보로 명량해전을 대비하여 대승을 거둔다. 명량해전이 끝나는 9월 17일 어란은 명량해전에서 애인 간 마사가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날 달 밝은 밤에 여낭터에서 명량해가 보이는 서쪽바다에 투신했다는 것이다.

▲ 사진(좌로부터)고니시유이찌로(부친이 일제 강점기 어린초등학교장을 지냈으며 이곳 어란 출신임, 기업진단가),박승룡 옹, 목포대 강봉룡교수 부인,히가가쓰노리(일본 향토사학가)
박승룡 옹은 지난 2007년 일본의 히로시마수도대학 히구마다게요시(日隈健壬)교수의 부탁을 받고 임진왜란때 해남에 일본인 포로수용소가 있다는 기록이 담긴 문헌을 일본에서 구해 준 적이 있는데 그 문헌이 일본 해남회에서 발간한 사와무라 하찌만다로(澤村八幡太郞)의 유고집 이었다고 말한다,

“그 유고집을 읽다보니 놀랍게도 명량해전에 일본이 대패한 사유가 ‘어란’여인의 첩보전에 기인한 것으로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평문과 한시로 수록이 되어 있었다.”고 전했다.

“사와무라는 우리말에 능통하며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연구하고 한시에는 일가견을 갖는 한학자에 많은 저서를 남긴 분이며 해남에서 19년 동안이나 공직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잡기록을 남겼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 옹은 “그가 일본사람이고 직업이 직업이어서 그 진위가 의심이 안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잡기록에 의하여 포로수용소 문제가 사실로 인정된 이상 그저 날조한 것이라고 무시할 수 없어 현장인 어란 마을에 가서 현지를 답사하여 주민들의 증언을 들었더니 사와무라 옹의 기록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고 밝혔다.

박 옹은 “어란 여인을 논개를 뛰어넘는 호국의 의기로 보고 역사에 무뢰한이지만 고증 찾기에 나서보았고, 천만다행이도 ‘난중일기’에서, ‘왕조실록’에서 그리고 김 훈(金 薰)의 ‘칼의 노래’에서 근사한 고증을 찾는데 성공하고 비로소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로 작심한데서 오늘에 이르러 비석까지 세우게 됐다”말했다.

박 옹은 "명량대첩, 그리고 ‘어란’여인, 이는 이순신의 전략에 기인한 만큼 오히려 이순신의 높은 지략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제 반성과 관용 그리고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의 소원과 황폐한 전쟁속에서도 인간 본연의 보편적 휴머니즘이 소설로 영상화로 꾸며지고 제작 되어 한일 양국에 다 같이 받아 들여 우호 증진에 이바지 했으면 한다”는 소망을 나타냈다.

한편, 박승룡 옹에 따르면 이 달 20일 경 부친이 일제 강점기 이 곳 해남 어란국민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자신은 어란 태생인 일본인 고니시유이찌로(기업진단사)와 동생 고니시전히로씨는 자신들의 비용으로 어란 여인 비석 주변에 표지석과 어란 여인상을 세우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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