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고 조오련 선수 3주기 맞아 제3회 조오련배 땅끝바다수영대회 열려, 추모와 불굴의 정신 배워

▲ 올해 3번째를 맞이한 조오련배 땅끋바다수영대회는 10km종목을 추가하면서 국제수영연맹으로부터 공식인증을 받으면 내년 4회대회부터는 국제대회로 승격하여 개최할 예정이다.
▲ 고 조오련 선수의 장남 조성웅씨가 유가족을 대표하여 수영대회 개최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 이번 대회는 500여명의 선수가 뛰면서 명실상부한 바다수영대회를 입증했다.
▲ 이날 행사에는 박철환 군수를 비롯, 김영록 국회의원, 박희재 군의장, 명현관·김효남·김인숙 전남도의원, 이길운 부의장, 이순이 군의원, 김만채 재경향우회장·한상원 재광향우회장 등 각향각지 초청인사와 박창우 전남도수영연맹회장 등 대회관계자, 그리고 고 조오련 선수 부인 이성란씨와 장남 조성웅, 차남 조성모 등 가족이 참석했다.
▲ 제3회 조오련배 땅끝바다수영대회 대회장인 김재욱 위원장과 대회를 후원한 박철환 군수가 바다위 출발선에서 올해 대회를 평가하고 내년대회의 활성화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 이번 대회는 제1회 도지사배 비치발리볼 대회와 푸른음악회와 함께 열려 송호해변을 찾은 관광객과 주민들에게 즐거운 볼거리를 제공했다.
▲ 이번 대회 모든 참가자에게는 완영메달과 기념티셔츠, 수영모, 식수를 제공했으며 첫날 개안전에 이어 이튿날5일에는 단체전이 진행된다.
수영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아시안게임 2회연속 2관왕과 대한해협 횡단을 성공해 아시아의 물개라는 칭호를 받았던 조오련은 대한의 아들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1592년 해남 학동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수영에 소질을 보였던 조오련은 중1때 부모님 심부름으로 우연히 도대표 수영선수선발대회를 지켜보면서 자신이라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함께 수영선수의 꿈을 갖게된다.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에 고1학년때 수영선수가 되겠다는 신념하나로 무장적 서울로 가출한다. 막노동을 하던 그에게 전국수영대회라는 기회가 온 것. 일반부에 참가해 각종목에서 우승을 거머쥔다. 어린 어른선수는 이렇게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다.

1970년 양정고에 적을 두고 고2때 제6회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 한국의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깜짝쇼. 그러나 깜짝쇼는 아니었다. 이어 벌어진 1,500m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건 것. 역사적인 순간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었다.

1974년 테헤란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 게임, 고려대에 적을 두고 출전한 조오련 선수는 또다시 4년전과 같은 400m,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 2관왕 조오련은 아시아 수영역사에 큰 획을 긋게된다.

1980년 암울의 시기 대한해협 54km를 13시간 56분에 성공했다. 나라를 사랑하는 영웅의 탄생이었다. 1982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 도버해협 38km 횡당에 성공하면서 확실한 아시아의 물개를 증명했다.

2005년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 되는 걸 본 조오련 3부자는 독도아리랑프로젝트를 결행하여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3부자가 릴레이로 97km를 18시간에 걸쳐 횡단에 성공하자 대한민국은 조오련 선수를 다시 주목하게 된다.

고향 해남으로 내려와 터를 잡고 살던 조오련 선수는 2008년 또다시 독도는 우리땅임을 재확인하고 만방에 알리기 위해 독립선언 33인을 기리는 독도 33바퀴 회영에 도전하고 성공하자. 그를 애국자라 부르게된다.

2009년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기념하는 대한해협 횡단 재 도전에 나섰던, 우리의 영웅, 조오련 선수는 연일 계속되는 피로를 못 이기고 휴식 차 잠시 들른 고향집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아시아의 물개’, 그는 항상 도전과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정한 목표는 반드시 성공시키는 불굴의 사아이로 불러졌으며, 털털하고 소박한 품성으로 잔정이 많아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했던, 그래서 평생 유산 하나 없이 가난하게 살았던 그를 우리는, 영웅이라 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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