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가 힐러리 미 국무부장관과 면담모습. 흰 장미꽃을 머리에 달았다.
21년 만에 노벨상 수상 수락연설을 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방문했던 아웅산 수치 여사의 유럽 5개국 순방은 가는 곳마다 화제를 낳았다. 그는 특별히 꽃을 좋아하여 머리에 꽂아 멋을 내기로 유명하다. 런던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날 때 ‘존경’의 의미로 꽂은 흰색 장미, 특히 모교인 옥스퍼드대학과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을 방문할 때 꽂은 노란 장미는 그 중 압권이라 하겠다.

노란 장미는 질투라는 꽃말도 있지만, 대개는 '우정' '진실'이라는 의미로 통한다.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몇 송이 장미로서 그 나라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당연히 정계와 언론계는 물론 사교계에 화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녀와 함께 만찬이나 오찬을 하고자 하는 최상류층 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이후 파리 명예시민으로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유럽 순방을 무사히 마쳤다.

몇 년 전, 6.15남북공동성명을 기념하는 행사에 북한측 인사들이 광주 5.18묘역을 참배한 적이 있다. 물론 그 속내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공산독재 북한 대표가 민주화항쟁으로 희생된 시민들의 묘역을 참배한다는 것도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헌데 이들이 내려오기 전 남한 주최측에 미리 화환을 준비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막상 준비된 꽃다발을 받아든 북측 인사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고 말았다. 붉은색도 흰색도 아닌 알록달록 졸업식용 무지개 꽃다발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그걸 들고 헌화하러 들어가는 그들의 얼굴이 난감함과 천박함에 대한 경멸로 일그러졌다.

근조용 리본의 유래와 국민 계몽

호국 보훈의 달, 6월이 갔다. 유달리 국가적 추모행사가 많은 달이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필자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무렵엔, 왼쪽 가슴에 이름표와 흰 손수건을 달고 다녔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콧물을 흘렸었다. 그후로도 온갖 날이나 행사를 기념하는 리본을 달기 위해 직접 만들거나 문방구를 들락거렸었다. 하여 지금 전 세계에서 오직 한국과 일본만이 가슴에 근조용 코사지로 검정 리본을 단다. 그것도 단체로.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은 사무라이를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거의 전부 글을 몰랐을 만큼 미개한 나라였다. 이런 국민들이 어느 날 갑자기 문명사회로 진입하게 되면서 국민계몽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 꽃 대신 생각해낸 것이 바로 리본이다. ‘ㅇㅇ의 날’ ‘불조심’ ‘축 결혼’ 등등. 이름표처럼 가슴에 달고 다니게 해서 그날, 그 일의 목적과 의미를 각인시켰던 것이다. 근조 리본도 이 같은 목적에서 생겨난 것이다. 머리띠나 리본을 다는 것만으로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 의미를 모를까봐 친절하게 글자까지 써넣어야 했다. 일본식 집단주의, 획일주의, 편의주의, 실용주의의 소산으로 매뉴얼로 굳어져 지금까지 내려왔다.

▲ 일제식민지잔재 근조리본 글씨... 국민들이 조화를 왜다는지 몰라 계몽 안내용이었는데, 아직도 그 수준이란 광고 표시. 사진은 제2연평해전 10주년 기념식장.
지난 29일, 제2연평해전 10주년 기념식에 처음으로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무엇보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이 여섯 전몰용사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일일이’ 불러주었다 하니 더욱 그렇다. 이날 유가족들과 여당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하나같이 그들의 왼쪽 가슴에 똑같은 리본을 달고 있다. 자세히 보니 그 리본이 의문스럽다. 흐느끼는 유가족을 보고는 당연히 추도식인 줄 알았는데, 그 리본의 모양새는 분명 무궁화꽃을 단 밝은 색이다. 역시나 혹여 누가 모를까봐 ‘제2연평해전’ ‘기념’이란 인쇄 글자까지 선명하다. 헌데 모두 검정 양복에 검정 넥타이. 도무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물론 그 조잡하기 짝이 없는 싸구려 리본마저도 아무나 달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느 행사장 할 것 없이 맨 앞줄에 앉을 수 있는 귀빈(?)들만의 특권(?)이다. 그걸 다는 순간 다른 대중들과 차별화된 대우가 따른다. 한국에서는 이런 싸구려 비닐 리본조차도 계급장이나 훈장 같은 기능을 한다. 부시맨의 콜라병처럼 우리가 버리는 폐품도 아프리카 오지 미개한 부족에게는 특별한 물건이 될 수 있듯이.

식민문화, 식민품격

대한민국이 아직도 생화 몇 송이 살 형편이 못 되는 가난한 나라든가? 아낄 걸 아껴야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다 큰 어른들이, 재벌 패밀리들이, 고위급 지도자들이 그날 그런 자리에 왜 왔는지 모를까봐 큰 글씨가 인쇄된 리본을 가슴에 달고 갓 입학한 유치원생 모양 나란히 줄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과연 이 민족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막막하고 깜깜해서 현기증이 난다. 도무지 저 사람들이 저 위치에 오를 때까지 뭘 보고 배우고 뭘 생각했는지 기가 막힐 뿐이다.

식민지 교육의 특징은 객관식 교육이다. OX 아니면 사지선다형이다. 주관식은 스스로 사고하게 만들기 때문에 절대 금물이다. 묻는 말에만 “예” “아니오”로 대답하고, 넷 중에서는 하나만을 선택하라는 거다. 가령 점심으로 치킨, 햄버거, 피자, 스테이크가 있으니 그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는 게다. 이때 만약 “전 양식이 싫어요. 김칫국이나 된장국에”어쩌고 했다간 당장 싸대기 맞고 쫓겨나 굶어야 한다. 가르쳐 준 대로,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게다. 우리 교육이 철학을 가르치지 못하는 이유다.

2만 불을 넘어 선진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아직도 일제가 달아준 계몽 리본을 엄숙한 국가행사에 사용하고 있다니! 한국인이 왜 이렇게 단순 무지해졌는지, 왜 다양성을 못 받아들이고 흑백논리에 매몰되어 그저 남 따라 편가르기 떼짓기에 익숙해졌는지 이제 알겠는가. 당장 모든 학교 교육을 주관식으로 바꾸지 않으면 저 지긋지긋한 피지배식민근성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리본을 볼 때마다 진정성은 고사하고 손기정의 일장기가 자꾸 떠오른다. 일본의 한계가 곧 한국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낙인처럼.

국민 계몽 그만하고 근조 리본부터 추방해야

언제부터인가 근조용 꽃으로 한국에서는 대부분 흰색 국화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우리의 장례 문화에서 소복을 입던 데에서 자연스레 유래한 것으로 무난한 선택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선비의 절개니 뭐니 하는 특별한 의미 없이 그저 친숙한 흰 꽃이어서 바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상여를 오색 지화(紙花)로 장식했던 걸 생각하면 구태여 흰색 조화(弔花)만을 고집할 것도 아니다.

하여 전몰장병이나 순국지사 등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추모식에서는 조금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분들의 애국적 희생을 거국적으로 기린다는 의미에서 무궁화로 코사지한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렴 광복절 혹은 개천절 기념 코사지인 줄 착각하게 만드는 이번 것은 상투적이어서 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적 냄새가 어색하게 풍긴다. 성숙된 민주사회라면 무턱대고 애국이란 구호 아래 집단기억 속으로 밀어넣을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피의 기억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하여 좀 더 디테일한 배려가 있었어야 했다.

이런 날, 특별히 영국에서는 붉은 아네모네를 들거나 꽂고 나온다. 셰익스피어의 장시 <비너스와 아도니스>에서 비너스가 사랑한 아도니스가 사냥을 하다가 멧돼지의 엄니에 사타구니가 찔려 죽게 되는데, 이때 흘린 피가 아네모네(바람꽃)로 피어났다는 신화에서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담게 되었다고 한다. 하여 전쟁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 속에 아네모네가 자주 등장한다.

또 중세 십자군원정 때 이탈리아 피사대성당의 움베르토가 성지로부터 가져온 흙을 덮은 순교자의 묘에 전에 보지 못한 피같이 붉은 꽃이 피었다고 한다. 그 흙 속에 아네모네의 알뿌리가 섞여 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순교자의 피가 되살아난 ‘기적의 꽃’이라 믿어 유럽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등등.

이러한 유래 때문인지 대개의 국가에서는 전몰용사를 기릴 때에 붉은색의 장미나 카네이션을 바친다. 조국을 위해 그들이 흘린 피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G7 등 정상회의 때 모인 세계의 정상들이 개최국 국립묘지 무명용사의 묘나 기념탑에 헌화할 때 차례로 붉은 카네이션을 바치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들만 붉은 꽃을 바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그 나라 국기나 양국 국기를 본 딴 화환을 바치는 경우도 있다.

흰색 꽃은 순결함과 동시에 체념과 순종의 느낌을 주기 때문에 피한다. 그랬다간 자칫 용감하게 싸우다 간 전사들에 대한 조롱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항복의 표시로 왜 흰색의 기(旗)나 손수건을 흔드는지 생각해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일본과 한국만 흰 꽃을 바친다.

현충원, 그 공간은 순국용사들을 기억(memorial)하기 위한 곳이지 추도(mourning), 위무(console)하자고 마련한 곳이 아니다. 죽어서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분들이 죽어서도 바라는 건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피흘렸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잊지 말아 달라는 것이지, 자신의 억울한 죽음과 한을 달래달라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함께 슬픔을 나누고 위로하기 위해서라면 한두 해로 족한 일, 연연마다 챙길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분들이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조국, 민족, 후손들이 아직도 안녕하고 그게 누구 덕분인지 잊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그날을 기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같은 ‘memorial’을 두고도 유독 이 한 많은 민족은 단순히 한풀이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게다. 해서 위령비와 기념비, 일반 장례식이나 추모식과 구분도 못하고 무턱대고 흰색 화한을 바치는 것은 아닌지? 우리끼리의 약속 혹은 관습이라고 고집할 일만은 아니지 않은가. 오직 붉은 피의 기억만이 그분들의 희생을 영광스럽게, 그리고 헛되지 않게 할 뿐이다. 그 간절한 염원이 무명용사의 무덤에 붉은 꽃으로 피어나는 거다.

지금 거국적으로 6.25전쟁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 수습하고 있다. 혹여 들판이나 산골짜기를 지나다 한 떨기 붉은 꽃을 보거든 어느 무명용사가 그곳에 잠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잠시 걸음을 멈춰주길 바란다. 아이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마음이란 그런 작은 것에서부터 싹튼다.

오바마의 침묵과 아웅산 수치의 장미

2011년 1월 12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애리조나 총기난사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연설에서의 ‘51초 침묵’으로 미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적인 인상을 남겼다. 희생자 중 9.11 테러가 발생한 날 태어나 ‘미국의 희망의 얼굴’로 선정된 크리스티나 그린을 추모하는 연설이었다.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차례로 불러나가다가 마지막으로 가장 어린 크리스티나를 언급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해 침묵으로 감정을 제어하는 모습은 다른 어떤 연설보다도 우렁차고 감격적인 메시지였다.

장미 몇 송이로 대중들과의 소통을 이끌어 내어 자신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했을 뿐 아니라, 유럽 주류층들을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 아웅산 수치 여사. 한참 후진국인 미얀마의 국격을 단숨에 수십 등급 업그레이드시킨 것은 물론 다이애나 왕세자비 이후 가장 품격 있는 ‘세기의 여인’으로 떠올랐다. 비록 경제 수준으로야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그 품격에서는 프랑스와 급을 같이할 정도임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동안 미얀마 군사정권이 왜 저 가냘픈 여인을 두려워하고, 또 감히 어쩌지 못해 그토록 오랫동안 자택에 연금시킬 수밖에 없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런 것이 바로 지도자가 갖춰야 할 자질이자 요건이며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작년에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유럽 5개국을 순방하며 새마을 패션으로 국내 신문만 요란하게 도배했던 한국의 박근혜, 빌 게이츠를 만나러 간다며 출발하기 한참 전부터 야단법석을 떨다가 결국 사진 한 장도 못 찍고 온 안철수와 비교해 보면 그 내공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나긴 연금 상태에서도 국민은 물론 세계와 소통하며 사랑받아 온 수치 여사. 민생탐방 외에는 소통하는 법을 몰라 절반 이상의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박근혜. 이는 단지 그들 부친의 후광만으로 비교될 수 없는 차이, 즉 품격의 차이에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오매불망 라디오나 텔레비전, SNS, 청춘콘서트, 개콘 수준의 오락 프로에 나가 천박하게 망가지고, 계급장 떼고 막장 혹은 끝장 토론을 해야 마치 소통인 줄로만 알고 있는 한국의 지도자들이나 국민들 중에 수치 여사의 ‘노란 장미’가 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고 저 사진 한 장을 보고 정신이 살짝 나간 한 여인네의 애교나 멋부림이 아닌 ‘세기의 사진’임을 알아차릴 만한 감각을 지닌 인물이 과연 있기나 한가? 우린 언제 저같이 멋진 명품 사진을 남길 수 있을까? 저런 최상급의 글로벌한 지도자를 가진 미얀마의 장밋빛 미래가 ‘진실’로 부럽고 기대된다.

지도자에겐 사소한 고집도 범죄일 수 있다

“남이야 그런다 해도 우린 우리 식대로 하면 된다” “아무렴 어떠냐” “뭐 그런 사소한 걸 가지고” “까짓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이 뭐 그리 중요하냐” “그거야 각자의 취향이지” 등 편의주의 실용주의를 들먹이며 대범한 척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그건 전적으로 스스로의 무지와 몰상식함, 그리고 번거로움의 회피, 게으름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특히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지도자에게는 이런 변명이 용납될 수 없다. 직무유기를 넘어 자격미달로서 그로 인한 실수는 곧 범죄다.

지도자의 품격이 곧 국격이다. 그들의 언행, 일거수일투족뿐 아니라 그가 입은 옷, 넥타이, 귀걸이, 목걸이 하나도 단순히 제 취향대로만 멋을 부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럴듯한 정책이나 정치적 결단만이 지도자의 역할이 아니다.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그 자신은 물론 국가의 품격이 가늠되고, 그것은 곧바로 국익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이 만들어내는 한류가 곧 국격인양 착각하지 말란 말이다.

소통을 중시하는 글로벌 시대에는 과거의 전통적인 예법이 때로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형식적인 의례보다 이야기가 있는, 우리끼리만이 아닌 세계인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매너로 다듬거나 받아들여야 한다. 너와 나를 구분짓기 위한 예(禮)가 아닌 소통을 위한 예(禮)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나친 자기 것의 고집은 또 하나의 쇄국이 될 수 있음이다. 그런 사소한 습관조차 바꾸지 못할 정도의 소견으로 무슨 개혁이니 문화 창조니 하는 말을 입에 담는가.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의미 및 연원 불명의 어쭙잖은 매너들을 글로벌한 품격으로 고쳐 나가야 한다.

거국적 거창함에 감격해 하던 시절 지난 지 한참 되었다. 작지만 진정성이 배인 정성과 배려, 개인적이지만 직접적이고 인간적인 그런 것에 감동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기본도 없는데다 머리 쓸 생각조차 못하니 소통한답시고 저들끼리 만나봐야 국민들 혈압만 올린다. 그러다 뻑하면 국민과 직접 소통한다며 장외투쟁, 삭발, 단식, 촛불집회, 불법점거, 집단농성을 벌이고, 그것이 곧 정치적인 파워인 양 떠벌린다. 무식해야 용감할 수 있다던가. 없는 것만도 못한 학습 불능의 삼류들임에도 정작 자신들은 일류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게다.

글로벌시대, 품격으로 소통하고 승부할 줄 알아야

빈곤한 상상력에 메시지도 감동도 없이 숙제하듯 해치우는 판에 박힌 의전. 지난 일 아쉽다고 돌이켜 본들 무슨 소용 있으랴마는 내년을 기약하며 제2연평해전 10주년 기념행사를 글로벌적으로 다시 디자인해 보자. 만약 그 자리에 대통령이 가시 달린 여섯 송이의 붉은 장미 다발을 들고 나섰더라면 어땠을까? 굳이 연설을 하지 않았어도 그 어떤 장광설보다 강한 메시지를 북한을 비롯한 전 세계에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가 쉰목소리의 연설 내용을 기억하겠는가? 하지만 그 여섯 송이 장미의 붉은 빛은 평생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언제든 붉은 장미를 볼 때마다 그 대통령과 그 용사들을 떠올릴 것이기에 말이다.

다가오는 8월, 고(故) 육영수 여사를 기리는 행사에는 박근혜 의원은 물론 대선을 의식하여 수많은 정관계 인물들이 동작동 현충원을 찾을 것이다. 제발이지 이번만은 ‘追慕’라고 찍힌 그 싸구려 일제 검정 리본을 보지 않았으면 한다. 대신 평소 당신이 좋아했고, 또 그걸 보면 국민 모두가 학(鶴) 같았던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목련꽃을 헝겊코사지로 만들어 가슴에 달고 나왔으면 한다. 고작 현장에서 달아주는 똑같은 싸구려가 아닌 참배자 각자가 마련한 코사지여야 할 것이다. 더하여 그 가족들은 행사장에서가 아니라 집을 나설 때부터 달고 나와야 한다.

문화란 처음부터 거창한 사건이나 거대 담론에서 창달되는 것만은 아니다. 어찌 알겠는가.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풍습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 서양의 한 교회에서 어느 여인이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카네이션을 나눠 준 데서 비롯된 것처럼 모든 한국인의 추도식에 근조 리본 대신 하얀 목련꽃을 가슴에 꽂게 될지. 그 딸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직접 만든 목련 코사지. 여분이 있으면 함께한 사람들과 나누면 감동이 더하지 않겠는가.

세계와 소통할 줄 아는 지도자라면

저마다 대통령이 되어보겠다고 나서는 출정식 모양새가 감동은 고사하고 악센트 하나 없이 헛헛하다. 일회용 당명에 일회용 포장 끈으로 만든 로고, 역시나 어린이날 리본 수준의 일회용 풍선이니셜, 가벼움과 조잡함이 끝이 없다. 자기 PR이나 변명이 곧 소통인 줄 착각하고 있으니 감동이 있을 리 없다. 하나를 보고 열을 짐작한다고 했다. 제발이지 그런 자리에서라도 진정성과 창의성, 그리고 선도적 차별성을 좀 보여주길 바란다. 그런 것이 품격의 리더십이고 글로벌 리더십이다.

언감생심 수치 여사처럼 스스로 신화를 만들어 나갈 정도는 아니라도, 그나마 방 안에 앉았어도 세계를 내다보고 있다는 낌새라도 보여야 구중궁궐에 들어가서도 세상을 똑바로 보고 바른 정치를 할 것이라 여겨 국민들이 또 못 이기는 척 속아주지 않겠는가. 품격 없는 야망은 욕심일 뿐, 품격이 뭔지를 모르니 예의염치를 알 턱이 없고, 부끄러운 짓을 부끄럽지 않게 해치우는 게다.

국민은 더 이상 유치원 코흘리개, 골목대장,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의 지도자를 원치 않는다. 대중을 설득해야 할 목소리에 자신이 없어 미사여구로 포장한 자서전으로 유혹하고, 고작 주머니 불룩 명함 넣고서 온갖 행사장 찾아다니느라 동서남북을 못 가리는가 하면,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조끼 걸치고 떼지어 시장 바닥 누비고, 유행 따라 젊은이들 꽁무니 좇아다니며 비굴한 미소로 비위 맞춰 표 구걸할 줄밖에 모르는 그렇고 그런 소대장급, 통반장급, 현장감독급 수준의 지도자들에 이젠 넌더리가 났다는 말이다.

칼 빼들고 앞장서 적진을 누비는 장수는 한참 하수다. 초패왕 항우가 그랬다. 옛날 신라 화랑들은 꽃 한 송이 머리에 꽂음으로써 목숨 바치기를 마다하지 않는 수백 수천의 낭도들을 불러 모았다. 비록 작은 것일망정 스스로 문화를 선도해 표가 절로 따라오게 해보란 말이다. 진정한 고수는 내공으로 승부한다. 이미지로 승부한다. 예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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