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청순한 난의 향기 흘러라 흘러라 빨갛게 떠 흘러라."

▲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 명량해협에서 선보인 13척의 배로 적군 133척을 무찌른 명량대첩 해상전투의 재현 모습.
해남과 진도를 잇는 총길이 484m연륙교(사장교)인 진도대교(제1·2대교)아래를 명량해협이라 하고 이 해협을 따라 흐르는 조류는 국내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1592년 시작된 임진왜란이 다소 소강상태인 때를 틈타 일본군은 정유재란을 일으키고 1597년 9월 14일 해남 어란진에 머물던 구루시마가 이끄는 왜군은 진도 벽파에 진을 치고 있던 이순신수군을 몰살하고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강경으로 가려던 계획이 명량해전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끝나 버렸다.

일본군이 어란진을 떠난 이틀 뒤인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로 133척(333척이라고도 함) 중 31척의 왜선을 격파한 명량대첩은 단 한 척의 손실도 없이 조선군의 완벽한 승리로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군의 조선침략 전쟁인 임진왜란이 종지를 찍는 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해 준 것이다.

▲ 박 옹은 기자에게 “나는 무엇 때문에 ‘어란’여인에 매달려 80의 중반 나이에 어두운 밤길을 달려왔을까?”반문한다. “이것은 취미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더욱이 명예를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해남 송지면에 사는 박승룡 옹이 극적으로 찾아낸 의인 ‘어란’의 이야기는 109년 전 1898년 생으로 일제 강점기에 해남에서 약 25년간 공무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사와무라 하지만다로(澤村八幡太郞)의 유고집에서 비롯된다.

사와무라 하지만다로의 유고집에서 사와무라는 ‘임진·정유재란(일본에서는 文祿·慶長の役)당시 명량해전에서 일본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한 사유를 어란 이라는 여인을 투입한 이순신의 첩보전에 기인 한다’고 적고 있다.

유고집에 나오는 명량해전의 시작과 이 해전에서 대패한 사유, 그리고 의기 어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칠천량에서 대승한 일본군 수군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군의 주장 칸 마사가개(菅 正陰)는 경상남도 통영을 근거지로 남서해안에 진출하게 된다. 이에 더 나아가 전라남도 여수(좌수영)을 밟고 해남(우수영)을 치고 경강으로 올라가기 위해 수로 중 가장 험난한 장소인 명량해협을 탐사 차 해남 어란진에 주둔하게 된다. 선박 수리나 진군준비를 위해 정박 중이던 일본군은 주색에 빠지게 되고 특히, 왜장 칸 마사가개(菅 正陰)는 이순신이 보낸 첩자 의기 ‘어란’과 하룻밤 풋사랑에 빠져 명량해로의 출발일자를 말해준다”는 것.

이와 관련 된 내용을 1597년 9월 14일 명량해전 이틀 전에 쓴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장군은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달려와 보고하기를, 적선 200여척 중 55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 하고 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김중걸이 말하기를 “왜선에 결박당하고 있을 때 김해인이라는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 풀어주며, 조선 수군 10여척이 왜군을 추살하여 보복하겠다며 전선 전체를 모아 조선 수군을 전부 몰살하고 명량해를 거쳐 경강으로 가겠다고 왜군들이 말 하더라”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비록 이 말은 모두 믿기 어려우나...”하면서도 우수영 수군의 군비나 병력으로 보아 맞서 싸우는 것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왜군들은 모르는 명량해의 격류를 이용하는 첩략전에 대항할 준비를 세운다.

드디어 9월 16일 아침 왜장 구루시마가 이끄는 133척의 배가 어란진을 출발하여 명량해에 이르고 곧, 명량해전이 시작되었다. 조선수군은 불과 12척, 중과부적의 싸움에서 이순신은 울돌목의 좁은 수로에서 일자진(一字陣)을 치고 적의 수로 통과를 필사적으로 저지한다.

이 와중에 명량해협에 흐르는 조류의 방향이 바뀌자 이순신은 장병들에게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를 호령하며 총 공세를 펼친다.

결국 조선군은 적장 구루시마(來島通總)의 목을 베어 높이 메달자 사기가 충만해진 조선군은 이미 사기가 꺾인 일본군을 대파하게 된다. 결국 왜군은 30여 척의 배를 잃고 퇴각했다.
이 싸움에서 어란의 애인 칸 마사가개(菅 正陰)도 목숨을 잃었다.

▲ 마을 노인들로부터 구전되어 온 옛날 유명한 기생이 몸을 던진 ‘여낭터’라는 곳
사와무라 하지만다로(澤村八幡太郞)의 유고집에 이 때를 생각하며 지은 한시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右水營 鳴梁海戰-
鳴梁九月 急流過 媚客阿蘭 間諜羅
倭軍武將 堂堂迪 不戰前途 擊沒波
(-우수영 명량해전- 명량의 9월은 급류가 소용돌이치는데, 아름다운 그녀 어란의 간첩망에 걸리었다, 왜군무장들 위풍도 당당한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격파당해 침몰하다)

이 책의 저자 박승룡 옹은 어란을 생각하며 시 한수를 곁들였다.

▲ 박 옹이 어란여인을 찾아낸 책 '사와무라 하지만다로의 유고집'
매봉에 초생 달이 떠오른다./
울돌목 격량 소리 들리는 가매섬에/어란의 노래가 메아리 치네.

끊어 오른 분노일랑/바다 위에 던져 놓고/임의 입맞춤은 오직 조국뿐/
불타는 정열 외로운 휴머니즘/어이 헛되랴, 어리 헛되랴.

흐르는 바닷물은 길이길이 흐르나니/파도치는 물결위에/
아! 청순한 난의 향기/흘러라 흘러라 빨갛게 떠 흘러라.

달마의 모종소리 은은도 한데/임을 향한 찬송은 온 누리 흔드네.

박 옹은 맺는말에서 “놀랍게도 어란의 기록이 역사의 현실로 부각 된 것이다”고 말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이야기가 현지에서 나왔고, 우리의 사기에서 근사한 고증도 찾아냈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뒷받침할 사료도 나오고 또 일본 사학자들이 사실로 인정하는 서한문도 보내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박 옹은 “뜻이 있으면 길이 있고, 길이 있으면 통할 수 있다”며 “이 현실을 이정하고 받아들여 우리의 향토를 자랑스런 명승지로 육성하는데 우리 모두의 힘을 경주하자”고 강조한다.

또한, “이러한 착상과 구상을 바탕으로 충무공 이순신장군에게 승리의 꽃다발을 안겨준 일등공신, 나라를 사랑하지만 의를 지키며 목숨을 버린, 어란의 애국정신을 선양하고 이를 우리지역의 또 하나의 문화콘텐츠화 하여 지역발전에 이바지하자는 게 결론”이라고 전했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 세계무형유산인 강강술래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전술의 하나로 만들었다는 구전이 있는가 하면 민간어원적으로 해석해서 오랑캐 또는 왜구의 내침과 관련시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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