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어란’여인에 대한 나의 믿음과 반성과 관용, 나아가 평화를 위한 무아의 행군 이었다”

 
최근 박승룡 옹이 의인 어란을 소개한 책 ‘전쟁과 휴머니즘’서두에 1597년 9월 16일(정유재란) 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에게 목숨을 잃은 왜장 간 마사가게의 후손인 간(90세·일본작가)씨는 2006년 히로시마 수도 대학교수인 히구마다게요시(64세·히로시마현)씨가 한 신문에 기고한 ‘한국의 사람은 구루시마 수군을 알아’라는 기고문을 안내했다.

“1597년 케이쵸2(정유재란), 구루시마미지후사가 총대장으로 싸운 명량해전, 적의 대장은 한국의 영웅 ‘이순신’, 37세의 구루시마미지후사는 5개의 화살을 받고 바다에 떨어졌다. 이 것을 이순신은 배에 끌어올려, 목을 베었다. 당시 일본군은 330척, 한국은 12척, 패인은 구루시마해협을 닮은 거센 해류에 있었다”라는 것.

그러면서 간 작가는 “히구마다게요시 교수는 그 때 목숨을 잃고 바다에 버려진 수천의 일본 수군병사들의 사체가 진도 내동리 앞바다에 닿자, 이를 건져 왜덕산에 매장해 주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공양을 해 오고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제 그 공양을 구루시마미지후사 후예인 여러분께 부탁할 수 없는 것일까”라는 한국 노인의 말을 전했다.

이 기고가 나가자 ‘구루시마 보존 표창회’는 진도 현지에 가게되고 400여년에 걸쳐 묘지를 지켜온 한국관계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고 곧바로, 묘지에서 위령제를 모셨다고 전하고, 400여년 전 명량해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구루시마 보존 표창회의 할 일을 소개했다고 간 씨는 밝혔다.

 

▲ "실존한 사실만이 사실인 것이 아니라 거듭 새로 만들어지는 사실도 사실이다"라는 박승룡 옹.
한반도의 최남단 수려한 달마산 기슭, 장엄한 백두산의 영기가 유장하게 흘러내려 땅끝을 이루고 거기서 멀지않은 서쪽에 어란포가 자리잡고 있다.

이 어란진은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해군의 무관 만호들이 있었고 임진·정유재란의 명량해전 때는 일본군이 수군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며 태평양 전쟁 때는 일본군의 연대 본부가 주둔했던 지리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로 알려져 있다.

그 서쪽에는 진도 녹진 아래 작은 섬들이 자리하고 그 사이를 지나 해남 우수영과 가까이 하는 곳에 울돌목을 가로 지르는 두 개의 사장교가 보인다.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과 민초들의 환호가 지금도 울려 퍼지는 곳, 바로 명량해협이다.

‘어란’여인을 되살린 책 ‘전쟁과 휴머니즘’을 펴낸 박승룡 옹은 “어란포에서 명량해협을 바라보면 느닷없이 논개와 같은 여인으로 ‘어란(於蘭)’이라는 낯선 인물이 한 사료에 의해 그 모습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세계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의 이순신에게 있어 이 전쟁의 일등공신으로 이 여인이 등장하는 것”을 전하고 있다.

‘어란’여인의 이야기는 정유재란시 명량해전을 앞두고 해남 어란진에 정박한 일본군 장수 ‘간 마사가게’는 이순신 장군이 보낸 간첩 즉, 자신의 애인 ‘어란’에게 명량해로의 출정기일을 발설하게 되고 어란은 김중걸을 통해 이순신 측에 전달되었으며 첩보를 받은 이순신은 곧바로 명량해전을 준비하여 결국 12대133의 싸움에서 이기게 되었다는 줄거리다.

그러나, 어란은 자신의 밀고로 애인 ‘간 마사가게’가 죽은 것을 비관, 여낭터에서 투신자살하게 되고 이튼 날 동네 어부가 어란의 시신을 바닷가에 묻고 석등롱을 세웠다는 것이며, 박 옹이 알아본 바 이 석등롱은 최근까지도 매일저녁 불을 밝혔으며 지금도 정월 초하루 어란 당집에서 제를 모시고 있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박승룡 옹은 그 같은 문헌적, 구전적 근거를 바탕으로 의기 ‘어란’여인을 역사적, 사실적인 인물로 규정하고 임진왜란의 그늘에서 구국한 그녀의 실체를 세상에 내 놓은 것이다.

박 옹은 5년 전 우연히 일본 해남회에서 발간한 사와무라 하찌만다로(澤村八幡太郞)의 유고집을 만나게 된다. 지난 2007년 일제시대 해남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의 모임인 ‘해남회’의 세기 준이치 회장으로 부터 건네받은 이 유고집을 읽은 박 옹은 놀랍게도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둔 명량대첩에서 일본을 대패하게 만든 것은 이순신 장군에 의한 ‘어란’여인의 첩보전에 기인한 것으로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평문과 한시로 수록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의 히로시마수도대학 히구마다게요시(日隈健壬)교수로부터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을 받게 되는데 왜장 ‘간 마사가게’는 그의 아버지 간 히라우이몬과 함께 도요도미 히데요시로부터 행정요원의 직분으로 정유재란에 출전하여 1597년 9월 16일 벽파진에서 전하한 실존 인물로 나타났다.

▲ 당집, 어란마을에서 수백년동안 마을의 사당에서 전래에 따라 제를 올리고 있다.
어란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사와무라 하찌만다로(澤村八幡太郞)문집’의 저자 사와무라 하찌만다로(澤村八幡太郞)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후 우리나라로 파견되어 1920년부터 전라도에서만 26년(해남에서 19년)을 생활하였으며 너무나도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특히, 해남에 거주하는 동안 '명량해전'은 그의 특별한 관심사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와무라 하찌만다로(澤村八幡太郞)에 대해 박 옹은 “우리말에 능통했으며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연구한 한학자로서 한시에 또한 일가견이 한시 등 많은 저서를 남긴 사람으로 해남에서 19년 동안이나 공직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잡 기록을 남긴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박 옹은 “그가 일본사람이고 직업 상 그 진위가 의심이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잡 기록에 기록된 삼산 양촌제 아래 포로수용소 문제와 진도 왜덕산에 자리한 일본수군의 집단 무덤이 사실로 확인된 이상 그저 날조한 것이라고 무시할 수 없어 현장인 어란 마을에 가서 현지를 답사하여 주민들의 증언을 들었더니 사와무라 옹의 기록과 한 치의 차도 없이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스스로 역사에 대한 무뢰한(無賴漢)이라고 밝힌 박 옹은 “그러나 이대로 묻혀 버리면 영원이 감춰질 소중한 사실”로 인식하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한동안 고민도 하면서 고증 찾기에 나선 결과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리고 김 훈(金 薰)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근사한 고증을 찾는데 성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 옹은 기자에게 “나는 무엇 때문에 ‘어란’여인에 매달려 80의 중반 나이에 어두운 밤길을 달려왔을까?”반문한다. “이것은 취미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더욱이 명예를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것은 ‘어란’여인에 대한 나의 믿음과 반성과 관용, 나아가 평화를 위한 무아의 행군 이었다”고 전했다.

박 옹은 이 책 후기에서 “실존한 사실만이 사실인 것이 아니라 거듭 새로 만들어지는 사실들도 사실이라는 설을 받아 들였다”며 “이 이야기는 새로이 역사화 되고 재 문학화 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는 일부 사학자들의 논평이 나오기도 하여 이제 ‘어란’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며 역사적인, 고증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 창작을 시도한다고 밝혔다.

 
즉, “남원에는 춘향의 묘가 있고, 장수군에는 이몽룡의 무덤이 있다”고 말한다. “어란 여인이란 두 글자는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에도 없다. 그러나 김해인이라는 ‘어란’은 확실하고 분명한 실존 인물이었다”, “그러나 '어란'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지금 현실이 '역사'라는 것”이라고 박승룡 옹은 강조한다.

한편, 일본 해남회 회장 새기 준이치 회장은 박승룡 옹의 책 ‘전쟁과 휴머니즘’의 발간 축사에서 “역사의 사실은 과학이며, 좋다거나 싫다로 왜곡하거나 과장하게 표현해서는 안된다고 행각한다”며 “한층 더 조사 연구가 이뤄져 어란 이야기의 진실된 전체상이 밝혀져서 역사성을 더 해 줄 것을 기원한다”고 전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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