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김찬호(경희대교육대학원 교수ㆍ미술평론가)

색에서 빛으로, 감성을 끌어 올리다

“산앵두나무 꽃송이, 바람결에 한들한들. 그대 그립지 않아 이러고 있나, 당신집이 너무 멀어요.” 이 시에 대해 공자가 말했다. “아마 그리움이 절실하지 않은 모양이다. 정말 그립다면 멀다는 소리가 어떻게 나와(唐棣之華 偏其反而 豈不爾思室是遠而” 子曰 “未之思也 夫何遠之有『논어‧자한편』)

화가는 감각에 충분히 젖어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자그마한 소리를 듣고서도 소리의 영원의 깊이를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색의 미묘한 대비를 보고서도 색채 자체의 신비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삶이 펼쳐지는 대지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어야 하고, 태양과 달과 수많은 별 들을 보고 힘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긴 겨울이 끝나갈 즈음 흐르는 시냇물을 보면서 이미 다가온 봄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요구되는 것이 예술적 영감inspiration이다.

예술적 영감이란 말 그대로 판단력을 비롯한 인간의 지성적인 능력을 넘어서는 강렬한 감각이다. 그 강렬한 감각이 때로는 신비한 신성에 닿을 수도 있고, 때로는 인간 현실의 밑바닥에 닿을 수도 있다. 예술적인 영감은 예술가 자신의 힘을 초월한 것으로, 우주 전체를 통관하는 거대한 호흡이다.

고예현 작가의 <여명>(2020)은 예술적 영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구상적이면서 추상적이다. 구상과 추상은 대조적인 말이지만 <여명>을 보면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있는 듯하다. 구상이 극에 이르면 추상으로 나아간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어느 날 작가는 바다로 향했다. “새벽에 일어나기 힘들었지만 무언가를 찾아 나서야 했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다. 이른 새벽 바다로 달려갔다. 한 해가 바뀌어 가는데 어쩌면 해를 못 볼 거야……그때 저만치 바다에서 붉은 덩어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 자리에 멈춰 그 태양을 맞이했다. 그 붉은  덩어리가 내 마음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고, 그 따뜻함이 바다와 하나 됨을 느꼈다.”이 작품은 묵직한 색감으로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작가는 전에 보지 못했던 낯설음을 보았고, 그 낯설음이 작품 <여명>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작가는 이렇듯 일상의 자연 속에서 새로움을 찾았고, 그 절실함이 그림을 통해 나타난다.

<희망>(2020)을 보면 그동안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길을 보는 듯하다. “어느 맑은 날 오후 하늘엔 먹구름이 깔려있었다. 먹구름 너머 희미한 빛이 밀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이 더욱 강렬해지면서 내 심회心懷 속으로 치고 들어왔다. 수평선 너머 무겁게 짓누르던 잿빛 하늘과 구름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림이 보였다. 그것은 빛이었다. 그 빛이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희망은 길과 같다. 길은 원래 없지만,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만들어진다. 작가는 바다를 찾았고 그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햇살>(2020)은 어느 날 오후 바다의 정경情景을 담았다. 저녁 무렵 하늘은 회색빛으로 물들어가고, 해녀들은 바다에서 나온다. 또 멀리 고기잡이 나갔던 배들이 들어온다. 회화의 깊이는 평면 속에서 색채와 형태, 전체적인 구도를 통해 구현된다. 그런 점에서 회화의 깊이는 평면적인 깊이라고 할 수 있다. 평면적 깊이를 결정하는 핵심이 색조다.

이 작품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말하는 ‘윤슬’을 화폭에 담은 것으로 색조의 깊이감을 잘 보여준다. 작가는 말한다. “바다는 폭풍 치면 치는 대로 나의 마음을 격동케 하고, 잔잔하면 잔잔한 대로 마음을 위로해준다. 어느 날 항상 있었지만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윤슬을 보게 되었다. 자연을 담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저 빛 너머에 있는 그 무엇, 마음의 이상향을 담아보고 싶다.”그는 휘몰아치는 제주의 매서운 바람은 이겨냈지만, 가슴 속에 휘몰아치는 바람은 이겨내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고 바다를 껴안을 수 있었다. 바다는 어머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다 들어주고 안아주는 어머니다. 화폭에 바다를 안았다. 하늘은 단순화시켜 모노크롬monochrome적이고, 바다는 마티에르matière를 살려 윤슬의 반짝이는 모습을 강렬하고 깊이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물상物象에서, 심상心象으로…

그림은 현상의 세계고 일상의 차원에서 사물을 담아낸다. 나무를 그리고, 구름을 그린다. 의식의 확장은 지평의 확장을 가져온다. 점차 현상 너머의 차원을 그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예술의 길은 인생의 길과 닮았다. 예술가는 온몸으로 작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삶 그 자체다. 작가는 이번 전시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을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동안 7년째 바다를 그렸다. 변하는 바다는 항상 새롭지만 이제 또 다른 변화가 필요함을 느꼈다. 작가는 조심스럽게 물상에서 심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예술사에서 미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확립된 미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의 관점을 탐구하고 제시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낯설음, 즉 새로움을 향해 나아간다. 현대예술은 이런 다원적 확장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번 인사동 동덕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는 고예현 작가는 끊임없이 미의 관점을 탐구하고, 낯설음 즉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새벽 안개가 온통 뿌옇게 내리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무언가를 드러내는 듯한 알 수 없는 광경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새벽>(2019)은 바다와 하늘의 경계는 사라지고 있다. 물상에서 심상으로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바다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바다는 현상 너머 꿈이다. 바다 너머 꿈을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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