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남부학술림는 21세기 새로운 한일관계의 이정표

서울대학교 광양 백운산 캠퍼스는 天理, 인간은 天理에 순응해야

불과 2년전 순천대학교 공대 (일명 글로벌특성화대학)을 유치하기 위해 광양시가 얼마나 고충을 겪었는지 순천대학교와 광양시의 알만한 공무원은 다 안다.

당시 광양시는 물론이고 순천대학교도 대학유치를 위한 필자의 헌신적 고충과 노고를 다 알고 있다.

당시 기자로서 순천대학교 공대가 광양에 유치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필자만큼 제시한 이도 드물거니와 기자를 떠나 지역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국회와 교과부, 세종로에 위치한 정부종합청사를 수도 없이 오가며 교과위 의원들을 만나고 취재하고 부탁하고 순천시와 입장을 조율한 이도 드물 것이다.

따라서 감히 단언하건대, 대학문제에 관한 그 어느 누구보다도 깊은 해법과 안목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순천대학교가 광양 입성을 못한 가장 큰 이유는 하늘이 이미 광양을 서울대가 들어갈 땅으로 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광양은 서울대가 2년뒤인 바로 이 시점에 들어오기로 예정된 바, 굳이 순천대학교가 들어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광양시가 순천대학교에 땅주고 건물주고 600억원까지 준다고 했지만 들어올 수 없었던 이유가 이런 하늘의 뜻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天理이며, 예정된 섭리로 이제는 그런 天理에 순종할 시점이 된 것이다.그게 順理이다

이제 그 順理에 따른 역사적필연을 살펴보자.

 1942년 일본제국대학 농학부가 작성한 백운산과 지리산일대의 학술림으로 지금의 학술림 면적과 거의일치하고 등고선도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일제 측량기술은 어찌나 정교한지, 지금의 학자들도 놀랄정도이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뤄진 나라이다. 조선총독부가 한국을 합병하고 토지조사를 실시한 이후 전국의 무연고 토지를 국유화를 시켰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구례 지리산과 광양 백운산 일대의 땅들이다. 솔직히 광양사람들이 일제에 땅을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없는 풍문일 뿐이다.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국유림화 한 산중에서 섬진강에 맞닿아 있는 광양 백운산과 지리산 일대를 일본 최고의 대학인 동경제국대학의 조선 남부학술림으로 제공키로 방침을 정했다.

일제는 전국의 하고 많은 산중에서 왜 백운산과 인근의 지리산을 동경제국대학 농학부 학술림으로 제공키로 한 것일까? 그 이유는 뭘까?

만약 그 당시 일본총독부가 동경제국대학에게 학술림으로 이 땅을 제공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서울대학교 남부학술림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이런 분쟁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동경제국대학 학술림이 시초가 되어 해방이후 서울대학교 학술림으로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왜 전국의 그 많은 산중에서 이곳 백운산을 일본최고대학의 학술림으로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예측건대, 섬진강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섬진강은 호남과 영남을 가르는 강이며, 그곳에 위치한 광양 백운산은 삼한통일의 사상이 깃든 곳이다. 삼한이 통일되기 위해선 바로 이곳 섬진강세력이 중심이 돼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사상의 근원지가 바로 광양 백운산이고 도선국사가 중건한 옥룡사이다.

지금 중흥사가 위치한 중흥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구국을 위해 일제와 싸웠던 흔적이 있다. 현무형태의 분지인 이곳은 사방이 절벽으로 둘로싸인 요새로 당시 일본군의 침범에 맞서 지역민과 승병들이 조직적으로 전투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3층 석탑 등 국보급 유물이 존재하는 이유 등으로 인해 본보는 지난 2005년부터 중흥사가 위치한 이곳이 바로 '옥룡사 터' 라고 주장해왔고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가 주관한 토론회에서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이 중흥산성 역시 서울대학교 학술림으로 제공되고 있는 땅이기도 하다.

 일본 동경대학 농학부가 1943년 제작한 연습림 개요 책자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부터 섬진강을 드나들었다. 당시 일본 배들이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고 남원까지 진출한 기록이 있다. 그들 일본인들은 섬진강을 거스르며 이곳 광양과 구례 등 광양만권에 무한한 매력을 느낀 것이다.

그들은 그 와중에 섬진강과 맞닿아있는 백운산과 지리산이야말로 조선의 '산중의 산'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섬진강을 드나들며 일본인 특유의 정리하는 습관, 즉 그때마다 섬진강과 주변산에 대한 많은 실측자료들을 기록하고 정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300여년간의 자료가 축적된 이곳 백운산과 섬진강 일대에 대한 기록은 일본이 1910년 한일합방을 한 이후에는 한국의 산림과 생태를 연구하기 위한 유용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최근에 필자는 1942년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이 백운산 일대 남부학술림을 실측한 도면을 확인한 적이 있다. 이 도면은 지금의 도면과 거의 똑같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었다. 학술림의 면적은 물론이고 산의 등고선마저 지금의 백운산 학술림 도면과 똑같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1940년대 측량기술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진 도면은 지금도 광양 서울대학교 남부학술림 사무실에 보관돼 있다.

 일본제국대학 농학부가 제작한 책자로 우측 상단에 바로 지금 광양읍 연습림터이며,  좌측의 사진들은 지리산에 위치한 현재의 연습림터이다.
지금의 광양읍 남부학술림사무실터 역시 100년전 바로 그 터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일본 동경대학 농과대학생들은 나무의 식육상태를 연구했던 것이다.그리고 그 연구결과는 지금의 서울대학교로 넘어왔고 지금도 그 연구가 진행중이다.

이처럼 백운산은 일본 최고대학인 동경제국대학이 최고의 연구가치가 있는 산으로 여긴 곳이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부터 일본인이 조선의 땅중 가장 선호하는 지역이 바로 섬진강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맞닿아 있는 광양이었음을 알려주는 또다른 징표이기도 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역사적 필연은 또 다른 곳에도 있다.

바로 포스코 광양제철소이다. 포스코 라는 회사는 한일협정의 댓가로 일본으로부터 받은 굴욕자금에 의해 세워진 회사이다. 당시 이 치욕스런 협정을 두고 국론이 분열되고 전국적인 반대데모가 있었지만, 결과론적으로 일본서 받은 돈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포스코는 없었다.광양제철소 역시 일본이 제공한기술로 인해 세워진 공장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일본으로부터의 기술도입에 적극적이었다.

한마디로 일본과 광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적이고 필연적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광양항에서 일본 시모노세키까지 매일 카페리가 다니지 않는가?

그리고 광양만권경제자유구역청에선 지금 어떤 다른 지역보다 일본기업 유치가 활발해지고 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일본 동경제국대학 학술림으로부터 시작돼 100년간의 역사를 지닌 서울대 남부학술림은 지난 100년간의 연구성과에 대한 계승은 물론이고 21세기 한일관계의 새로운 징표가 될 수 있는 역사의 소산물인 것이다.

필자는 일본 3.11대지진 사태 직후 일본기업유치를 위한 일본촌(Japan Town) 조성을 대한민국 정부와 광양시에 제안했다. 당시 필자의 이런 제안에 대해 외교통상부 등 중앙부처에선 상당한 호응을 했고, 일본 대사관도 관심을 갖고 광양을 방문했다.

당시 국민들이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했고 여론조사 결과 상당한 호응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그뒤 필자는 이 문제로 일본 도요타 자동차 회사의 도요타 아키오 사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일본 자동차부품 산업의 광양만권 유치 때문이었다.

필자의 이런 제안 역시 역사적필연의 예지력에 따른 것이다.광양만권경제자유구역청 역시 필자의 제안에 따라 경제자유구역인 용강지구에 일본촌(Japan Town) 지정을 검토하고 있다.

이렇듯 백운산과 지리산은 단순히 '산의 효율적 이용' 이라는 측면 뿐만아니라 '역사적필연'이 존재하고 있는 땅이다. 따라서 이곳 광양 백운산은 광양에 위치해 있을뿐 광양사람의 땅이 아니며 좁게는 광양만권,  넓게는 대한민국 국민의 땅이다.

바로 이곳에 산림과 생태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지난 역사를 위한 연구와 살아있는 교육장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국내 최고교육기관인 서울대학교가 이곳을 산림생태와 환경교육은 물론이고 애국교육의 성지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광양의 일부 무지한 이들은 왜 이런 天理를 거스르며, 역사적 필연을 거부하는가?

 

옥룡은 살아있다!!!

처음 신인(神人)이 있어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긴 비밀의 문을 열고,

남해의 신령한 현무(玄武)와 옥룡(玉龍)을 불러

옥룡의 머리위에 우뚝 서서

삼한(三韓)의 피를 부르던 도적의 무리들을 정벌(征伐)하여

가엾은 백성들을 구하시고

누구나 차별이 없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연꽃을 피웠네.

주인 없는 삼한(三韓)이 주인을 찾고,

영웅들의 분노와 함성이 전설이 되어버린 어느 해,

남해바다를 불바다로 만들며

정토(淨土)를 강탈하는 수만의 왜구(倭寇)들을 맞이하여,

다시 또 의기(義旗)로 일어선 민초들이 제 몸을 죽여,

시신(屍身)으로 성벽을 만들며 맞서 싸우고 싸우다

끝내는 살아 있는 목숨들이 산채로 불타버린 그날

백계산 뜨는 해는 핏빛으로 가리어졌고

동천(東川)의 붉은 피는 남해로 흘렀네.

그날 이후

현무(玄武)가 놀라 소스라치고,

옥룡(玉龍)이 몸서리를 치며, 울부짖던 이 땅을 일러,

후세의 사람들이 중흥(中興)이라 이름 한 것은,

현무와 옥룡이 다시 살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었으니,

부디 바라건대,

그날 스스로를 불태워 임진왜란의 살육으로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쓰러진 현무(玄武)는

4백년 긴 잠에서 일어나,

다시 또 나라를 지키는 신령(神靈)한 수호신(守護神)이 되고,

옥룡(玉龍)은 남해바다 깊은 물길 속을 박차고 다시 날아올라,

백운산(白雲山)에서 백두산(白頭山)까지

우리민족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주체가 되고

백계(白鷄)는 다시 해뜨는 부상(扶桑)의 가지로 날아올라

힘찬 목소리로 동방의 나라를 새 세상으로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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