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유지향(書遊之響), 선(線)으로 들려주는 자연의 울림 -
                               김찬호(경희대교육대학원 주임교수ㆍ미술평론가)

전원생활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목을 보지 않고서도 작가가 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설명하지 않아도 붓질의 톤이 그려내는 그림보다 더한 감정을 발견하게 된다. 전원교항곡은 그림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사람들 속에 깃들인 전원생활의 즐거움이 불러오는 감정이 표현되어 있고, 그 안에서 전원생활의 느낌 하나하나가 이름 지어진다.(베토벤,『베토벤 불멸의 편지』예담, 2000)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이 1807년 전원교향곡 스케치를 하면서 쓴 6번 교향곡 <전원>op.68을 위한 메모이다. 그가 점차 청력을 잃어가면서 극도의 혼란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머리속에 있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고, 자연과의 교감을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자연에 대한 정감을 음악가의 시선으로 읽어낸 전원교향곡을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로 들을 수 있다. 소리는 말하는 순간 사라지지만 악보를 통해 음악이 만들어지고 그 음악이 영원히 전해 지듯이 서예도 세상을 보는 작가의 자연에 대한 통찰이 작품을 통해 만들어 진다.

우연(偶然), 익숙함에서 나온다.

문정 송현수(文鼎 宋鉉秀, 1963~)는 선(線)으로 자연의 울림을 주는 작가로 예술로서의 서예가 지향해야 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장천비>, <석문송>, 안진경의 <제질문고>, <대우정>, <모공정> 등 수 많은 법첩을 만나면 설레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듯이 기뻐했고 철저히 임서했다. 이렇듯 작가는 고법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으며, 형태를 단순히 닮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문자가 가지고 있는 서체적 특징을 이해하고 그 바탕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이번 13번째 개인전은 창작 작품과 함께 두 점의 작품 <대우정(大盂鼎)>과 <찬보자비(纂寶子碑)>를 임서했다. 작가의  ‘글씨와 놀다’ 라는 서유(書遊)의 묘(妙)는 바로 고법에 대한 천착(穿鑿)을 통한 익숙함에서 나온 것이다.

작가는 1986년 서실(書室)을 열고 후학을 지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1994년 서협 초대작가가 되었고, 1996년 첫 번째 개인전을 시작으로 2014년까지 12회의 개인전을 하였다. 작가는 필자와 대담에서 작품을 하면서 항상 “새로운 시대적 조형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고 말한다. 이런 그의 서예철학을 이번 개인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996년 첫 번째 개인전을 시작한다. 작가는 개인전 작업노트에서“선인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 걷기도 해보고 나름대로 길을 찾아 헤매기도 하다가 문득 득의(得意)한 선(線) 하나를 찾고 기쁨에 춤도 춰보지만 이내 졸작으로 남으니 나의 한계성을 절감함과, 더 오를 곳이 있다는 기대감이 교차한다.”고 말한다. 예술의 길은 끝이 없다. 오직 최선을 다하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작가는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2001년 세 번째 개인전에서 변화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는 평면에 전각과 탁본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조형의 묘를 꾀하고 있다. 2003년 네 번째 개인전에서는 콜라주를 이용한 입체감을 보여주는 작업을 시도한다. 또한 석판(石版)에 문자를 새겨 전각과 필묵의 시각적 대비를 통해 적절한 긴장감과 함께 자연스러운 음의 흐름인 절주(節奏)감을 느끼게 한다.

2006년 디 아트 홀(D ART Hall) 개관기념 초대전에서 이명숙 관장은 “초대전 준비를 위해 선생을 모시고 대화를 해보니 그 분 만큼 간결한 이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람 부는 일상의 흔들림 속에서도 꼿꼿이 걸어가는 선생의 뒷모습이 불에 구워낸 글만큼이나 아름답게 느껴집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가 예술가로서 꿋꿋이 걸어가는 면모를 한마디로 보여준다.

특히 그의 전각은 독특한 풍격을 보여주고 있다. 해남에서 버려진 돌을 모아 전각 9점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시간이 나면 해남에 내려가 남들이 볼 때는 보잘 것 없이 버려진 돌을 만나고, 그 돌이 작가에 의해 위치를 바꾸면 작품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거칠고 갈라진 돌의 모양을 최대한 다듬지 않고 생긴 모습 그대로 살려 글자를 알맞게 포치(布置)하여 물상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놓치지 않고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전각 작품 속에서도 그의 예술 철학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2009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아홉 번째 개인전을 비롯하여 2014년 열 두 번째 개인전까지 화선지에 필묵과 도판, 석판의 작업을 함께하였다. 2014년 서예협회 대구 지회장을 맡으면서 대중들과 호흡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여 대구서예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선(線)으로 들려주는 자연의 울림

점(點)을 연장하면 선(線)이 된다. 글자를 쓰거나 형체의 윤곽을 그린다는 기본적인 기능 이외에 선은 예술적인 개념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끝없는 변화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이렇듯 서예는 선이 가진 표현적 효과를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서예는 모필과 먹을 통해 선을 기세화 하고 그 선이 모여 형을 만들어 조형화하는 예술이다. 특히 모필의 선은 쓰기와 그리기가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서예와 그림은 한 몸에서 나왔다고 한다. 작가 송현수의 글씨는 모필의 기세를 극대화하여 따삐에스Antoni Tapies, 1923~2012),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 잭슨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등의 문자추상을 보는 듯하다. 자연을 쓴다는 것, 자연을 그린다는 것, 자연을 노래한다는 것은 같다.

예술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 자유추구의 역사이다. 고대, 중세, 근대를 거치면서 종교의 위계에서의 해방을 외쳤고, 인간의 위계에서의 해방을 외쳤고, 동시대(contemporary)에는 창작과 전시와 감상이라는 종래의 예술형식을 넘어 새로운 지향(志向,Intention)을 꾀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달리고 있다.

작가 송현수의 작품세계는 형태를 닮게 쓰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쓴다. 그런 점에서 표현주의(表現主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임무는 결론이 아니라 문제제기에 있다. 작가에게는 결론보다 문제의식이 중요하다. 작가는 부단히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새로운 조형언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의우(蟻牛)>(2001)는 작가가 서실 바닥에 홀로 떨어져 있는 포도알의 움직임을 보고 이 작품을 하게 되었다.

<의우(蟻牛)>, 2001

밤늦게 까지 서실에서 작품을 하다 우연히 바닥에 떨어진 포도알맹이가 끄덕 거리는 것을 보았다. 지진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내가 작품하다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았나. 다시 포도알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또 포도알은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개미 수백 마리가 붙어 포도알을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이나 개미가 포도알을 옮기는 모습을 관찰했다. 아! 개미는 개미 나름대로 질서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듣지 못하는 세계가 있구나. 개미들은 자기들만의 언어로 소통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우주가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천하가 크다 해도 개미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 세계가 얼마나 큰지를. 지금 하늘에서 보면 지구도 하나의 점이 아니겠는가. 개미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뭐가 다르겠는가.(宋鉉秀)

작가의 이런 생각이 <의우>라는 작품을 낳게 된 것이다. 하나의 작품에는 그 작가의 학문과 철학이 이렇게 녹아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작가의 자연에 대한 관찰은 섬세하고 예리하다. 작가의 작품 속에는 삶에서 느끼는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울림의 진폭이 무한히 확장된다. 이런 예술에 대한 집념과 열정이 작가 송현수의 힘이다.

“개미의 꿈틀거림과 소 싸우는 것, 조용하기는 똑 같은 소리이다. 그 누가 알았으랴 고요한 이 속에도 땅을 울리고 바다 물결치는 소리 있을 줄을(寥寥同一聲 誰知淵默處 殷地海濤轟. 李珥,「蟻動與牛鬪」).”율곡의 이 말은 차별이 아닌 차이 즉 다름으로 상대의 특수성을 존중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작다, 크다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우리는 개미보다 작은 존재일 수도 있고 우주만큼 큰 것일 수 도 있지 않을까.

<사역(思繹)

<사역(思繹)>(2001)은 “생각하고 찾아서 구한다는 말로 탐구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學而時習之 不亦說乎『論語』, 程子曰 習 重習也 時復思繹 浹洽於中 則說也)”『논어』‘습(習)’에 대한 주자의 해석이다. 배움에서 기쁨[說]은 바로 내면의 기쁨을 말한다.

강하게 내리 때려서 화면에 부딪쳐 발생하는 파묵(破墨)의 역동성은 필연에서 우연으로, 다시 우연에서 필연이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칫 흘러버릴 수 있는 파묵의 효과를 사역(思繹)이란 글자가 새겨진 전각이 강한 필선을 보듬어 주는듯하여 움직임과 고요함, 흑과 백, 작은 전각과 큰 전각의 호응이 절묘하게 조응(照應)하여 공간에 긴장감을 주면서 감상자로 하여금 기운생동(氣韻生動)함을 느끼게 한다. 작가의 익숙함에서 보여주는 우연이 필연을 만들어 낸 작품이다.

작가는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은데 항상 벽에 부딪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럴 때 마다 ‘사역(思繹)’의 중요함을 느꼈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 서예세계의 뿌리는 사역(思繹)이고, 서유(書遊)는 사역(思繹)을 거치지 않으면 신명나게 놀 수 없다.

<수어(水魚)>(2004)는 흙을 이용한 도판작업으로 화선지가 가지고 있는 성질과 다른 흙의 성질을 이용한 작품이다. “물고기는 물을 얻어 살지만 물을 잊는다(魚得水逝而相忘(『菜根譚』)”화선지 바닥은 딱딱하다. 그래서 부드러운 붓의 완충작용을 통해 지면에 활력을 넣는다. 흙은 반대로 손으로 힘준 만큼 보여준다. 화선지에서의 붓의 역할을 흙이 대신한다.

<수어(水魚)>, 2004

<수어(水魚)>는 직접 흙을 반죽하여 원하는 형태를 만들고 붓으로 화선지에 글씨를 조형하듯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하여 흙에 글씨를 조형하고 있다. 흙과 돌, 화선지의 물성은 다르지만 드러난 작품은 화선지에 서사했던 필묵의 자연스러움이 살아나고 있다. 이런 시도는 오브제가 가지고 있는 물성의 성질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데서 출발한다. 화선지와 붓의 만남에서 느껴지는 필묵의 맛이 도판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유어(遊魚)>(2005)는 작가의 필법관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견유어득묘법(見遊魚得妙法)”이라고 했다. 즉 묘법은 바로 필법의 묘를 말하는 것이다. 작가는 물고기가 노니는 모습에서 필법(筆法)의 묘(妙)를 찾았다고 한다.

<유어(遊魚)>, 2005

80년대는 오로지 운필에 대한 고민이었다. 어느 날 찻집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다 어항에서 물고기가 꼬리지느러미를 부드럽게 흔들거리면서 유유히 멈춘 듯 움직이다 부지불식간에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았고, 필법에 대한 고민이 풀렸다.(宋鉉秀)

그의 필력은 필관과 손끝사이에서 이루어진 파장의 효과, 어떤 물체가 나타나면 벼락같이 치고 나가는 에너지를 물고기의 관찰을 통해 얻은 것이다. 그는 삶의 지혜를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찾아내고 있다.

<유어(遊魚)>는 문자와 비문자의 경계, 껄끄러움과 부드러움, 빠름과 느림, 짙음과 옅음, 굵고 가늠, 메마름과 젖음이 절묘하게 어울려 있다. 이 작품을 보면 물고기를 타고 바다 속을 유영하듯, 또 마치 하늘을 날 듯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아마도 작가는 환상 속에서 물고기를 타고 여행을 했으리라.

2019년 13회 개인전의 특징은 ‘사획(死劃)을 생획(生劃)으로’라고 할 수 있다. 서예에서 금기시되다시피 하는 사획(死劃)을 극단으로 끌어올려 다시 살아있는 획으로 드러내고 있다.

송현수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예술에서는 안 되는 것도 없고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가 항상 말했듯이 항상  “새로운 시대적 조형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는 그의 철학이 이번 전시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2019

<반야심경(般若心經)>(2019)은 사획(死劃)을 어떻게 살려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작가를 보는 듯하다. 초묵(焦墨)은 농묵보다 더 진한 먹으로 소위 ‘깡먹’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예에서는 탁하고 거칠어 쓰지 않는 방법이다. 초묵이 가지고 있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는 사획을 다시 생획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정말 죽기 살기로 덤비고 있는 듯하다. 물이 한 방울 섞지 않는 초묵의 못쓰고 버려진 획을 가지고 살아있는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발상의 전환이 새로운 조형 언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에는 전, 예, 해, 행초의 자형과 죽간의 필의가 자연스럽게 녹아져 흐르고 있다.

<환천하어천하(還天下於天下)>, 2019

<환천하어천하(還天下於天下)>(2019)는 행초에 전서(篆書)의 필의가 섞여 있음에도 자연스럽고, 사획을 다시 생획으로 만들어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천하를 천하에 되돌리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 세속에 있으면서 이상을 꿈꾸는 것이고, 작가가 현실 속에서 꿈꾸는 이상을 표현한 것이다.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2019)은 행초작품으로 그동안 내재되어 있는 필묵의 의취(意趣)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작가는 <오류선생전>을 쓰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어느 날「오류선생전」을 보고서 순간 나의 삶과 닮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는 행초서로 작품을 하고 싶었고, 10년 전에 초안을 잡았지만 쓰지 못하다가 이번 전시에 선보이게 되었다. 작품에 임하기 전에 항상 마음의 영상을 품고서 붓을 잡는다. 하늘에서 금가루가 내리고, 폭포수 떨어지고, 계곡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사이로 새들이 지저귀고, 물 흐르는 소리 잔잔히 들리는 풍경을 상상하면서 <오류선생전>을 썼다.(宋鉉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2019

<오류선생전>은 죽간(竹簡)의 필의와 장초(章草)의 느낌을 살리고 대소, 강약, 농담, 절주를 담아내어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 속 길을 걷다보면 작은 물안개와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로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도연명이 결코 세속을 떠나 은거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과 공존하지만 타협하지 않았듯이 작가 송현수도 현실 속에서 그가 꿈꾸는 이상향을 찾아 가고 있다.

작가 송현수는 자연을 담아내는 서예가이다. 작가의 자연관이 서예를 통해 드러난다. 그의 서예작업을 보면 마치 바이올리니스트가 현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듯, 빠르게, 느리게, 멈춰진 듯 이어지는 듯한 붓놀림을 통해 역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마치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과 흡사하다.

화선지가 갖고 있는 물성은 발묵에 있고, 화선지를 만나 화선지와 논다. 흙의 물성은 누르면 그 자리를 지키는데 있고, 흙과 만나면 흙과 논다. 돌의 물성은 변하지 않음에 있고, 돌과 만나면 돌과 논다. 작가의 언어는 작품이고,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작가 송현수의 작품은 그런 점에서 서유지향(書遊之響)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바람 부는 일상의 흔들림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기대는 끊임없이 이어져 현실에서 항상 미래를 꿈꾼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신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의식의 변화는 새로운 예술운동을 낳게 된다. 미술(Fine Art)은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미적 표현 일체를 말한다. 그런 측면에서 서예도 미술이다. 서예는 문자라는 소재를 시각화하기 위해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하는 미적 표현이다.

진정 매너리즘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극단으로 끌어 올려 작품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매너리즘을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르네상스 8등신의 이상화된 인물이 엘 그레코(El Greco, 1541년경~1614)로 대표되는 매너리즘 시기에 오면 9등신으로 변한다. 그런 의미에서 매너리즘은 단순히 부정적 의미보다 극단으로 끌어 올리면 거기에서 변화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매너리즘은 바로 변화의 시작인 것이다. 그런 작가가 바로 송현수 이다.

노신(魯迅, 1881~1936)은 소설 『고향』에서 “사실 땅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길이 만들어 진다.”고 말했다. 예술가는 늘 새로움에 대한 도전에 두려움이 없어야 된다. 땅에는 원래 길이 없다. 그러나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길이 만들어진다. 극단의 끝을 넘어 변화를 향해 매서운 채찍 휘갈기는 찬바람과, 비가 오는, 눈이 오는, 바람 부는 일상의 흔들림 속에서도 작가 송현수는 뚜벅뚜벅 그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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