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호 (경희대 교육대학원 주임교수ㆍ미술평론가)

1. 소암(素菴), 이것이 문제다

어떻게 하면 노래가 될까. 노래도 서툰 노래도 아닌 익숙한 노래, 익숙한 춤이 될까 이것이 문제다.

결국 춤과 같이 쓰고, 노래와 같이 쓴다면 참 좋아요. 아는 사람이 보면 글자는 가만히 있지만 춤추는 것처럼 노래 부르는 것처럼 활동해요. 나는 한라산 넘어갈 때 올 때 다 공부해요. 초록과 모든 것이 아 이렇구나 생각해요. 쑥대나무, 백양나무, 이건 쭉 올라가고, 소나무 같은 것은 구불구불하고, 그러니 이걸 배우다 보면 자연히 통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들에 가는 것을 좋아해요.(현중화)

“익숙한 노래, 익숙한 춤 이것이 문제다.”이 말은 소암의 삶과 서예세계를 한마디로 보여준다. 붓이 노래하고 묵이 춤춘다[筆歌墨舞]는 것은 바로 익숙한 노래와 익숙한 춤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동양예술에서는 생ㆍ숙ㆍ생(生熟生)의 과정을 중시한다. 처음의 생은 날것 그대로의 생(生)이고, 숙(熟)은 학문과 예술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천착(穿鑿)의 단계를 말한다. 이 단계를 지나면 다시 생(生)이다. 숙의 단계를 지난 생(生)은 절대자유의 경지인 흉무성죽(胸無成竹)의 단계이다. 소암은 평생을 걸쳐 임서와 창작을 함께 했다. 소암이 말하는 “이것이 문제다”라는 말은 바로 숙(熟)을 통해 자연스러움의 경지로 나아감을 말한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먼저 나의 그림을 꿈꾸고, 그 다음 그 꿈을 그린다(First I dream my painting, then I paint my dream).”고 말했다. “먼저 나의 그림을 꿈꾸고”의 말은 학문과 그림에 대한 공부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고, “그 꿈을 그린다.”는 것은 작품을 통해 자기의 언어로 삶의 축적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고흐도 세상을 뜨기 전까지 그가 존경한 화가 밀레(Millet, 1814~1875)의 그림을 그렸다.

현중화, <山房春事>, 1987

소암 현중화(素菴 玄中和, 1907~1997)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마츠모토 호스이(宋本芳翠, 1893~1971)와 츠지모토 시유(辻本史邑, 1895~1957)와 역대 명비첩을 탐구하여 소암체를 만든 서예가이다. 제주 서귀포에 소암기념관이 있다. 소암이 평생 쌓아온 예술 흔적을 제주도에 기증하게 되고, 제주도는 소암기념관을 세워 예술혼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청대 양수경(楊守敬, 1839~1918)은 1881년 청나라 공사 수행원으로 일본에 와 해서인 북위서풍을 일본에 소개한 인물이다. 양수경의 제자가 쿠사카베 메이가쿠(日下部鳴鶴, 1838~1922)이고, 그 제자가 콘도 세츠치쿠(近藤雪竹, 1863~1928)이고, 그 제자가 마츠모토 호스이(宋本芳翠)와 츠지모토 시유(辻本史邑, 1895~1957)이다. 마츠모토 호스이(宋本芳翠)와 츠지모토 시유(辻本史邑)는 바로 소암의 스승이다.

마츠모토 호스이(宋本芳翠)의 서풍은 북위서와 구양순 해서의 영향을 받아 절충된 단아(端雅)한 특징을 보여준다. 츠지모토 시유(辻本史邑)는 졸박(卒朴)하면서도 자유스럽고 활달한 특징을 보여준다. 소암은 두 스승의 서풍의 영향을 받아, 첫째, 정제되고 단아한 해서풍의 글씨 둘째, 거칠면서도 강하고 절주가 있는 행서풍의 글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소암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선진시기 청동기명문(靑銅器銘文)과 대전(大篆), 소전(小篆)의 전서(篆書)를 임서하고, 한대 예서와 죽간(竹簡), 위진남북조 해서와 종요(鍾繇, 151~230)와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해행서, 당대 구양순(歐陽詢, 557~641), 저수량(褚遂良, 596~658), 안진경(顔眞卿, 709~785)의 해서와 행서를 끊임없이 임서하고 장점을 변용(變容)하여 소암풍의 글씨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단순히 드러나 있는 형태적인 것만 보고 소암의 작품을 일본풍이니, 중국풍이니 하는 것은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다양한 서풍과 우리 서예정서가 녹아져 소암풍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의 한글 서예는 한문의 필법과 조형을 융합하여 개성적인 소암체 한글이 탄생하게 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

 

2. 역동적 필치(筆致)와 절주(節奏)

언어는 소리에 해당하는 음성언어와 글자에 해당하는 문자언어로 구분할 수 있다. 말하는 순간 사라지는 언어를 형상화 시키는 것이 문자이고, 문자의 예술적 표현이 서예이다. 그래서 서예는 공간성과 시간성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공간예술은 회화ㆍ조각ㆍ건축이고, 시간예술은 문학ㆍ음악ㆍ무용을 말한다.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Simonides, 기원전556~468)는 “그림은 말없는 시요,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라고 말한다. 송대 소식(蘇軾, 1037~1101)은 “시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말한다.  이는 시와 그림의 두 예술 표현의 유사성을 말한 것이다.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어와 문자이다. 서예는 자신의 작품에서 텍스트(Text)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을 통해 개념을 보여준다. 그래서 서예는 서구 현대미술에서의 말하는 개념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개념미술은 1961년 헨리 플린트(Henry Flynt, 1940~)가 자신의 행위예술에 대해 언급하며 처음 사용했다.(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그는“개념들은 언어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개념예술은 언어를 재료로 하는 예술형식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언어를 예술형식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문자가 가지고 있는 기호성, 상징성을 작품 속에 담아내고 있다.

소암의 서예는 시간과 공간 안에 규칙적인 음의 흐름을 보여주는 절주(節奏)를 통해 개념(槪念)을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 계해년 겨울밤에 잠삼(岑參)의 시를 쓴 <산방춘사(山房春事)>(1983)를 보자.

梁園日暮亂飛鴉(양원일모난비아) 양원에 해지고 까마귀 어지러이 날고
極目蕭條三兩家(극목소조삼양가) 눈에 보이는 건 두세 채 집 뿐
庭樹不知人去盡(정수부지인거진) 뜨락의 나무는 사람 떠난 줄 모르고
春來還發舊時花(춘래환발구시화) 봄이 오면 다시 또 꽃을 피우네

양나라 효왕이 잔치를 베풀던 화려했던 양원(梁園)도 세월이 흐른 지금 까마귀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두서너 집만이 처량하게 보인다. 그러나 자연의 나무는 인간사와 관계없이 자연의 순환을 이어간다. 소암은 이 작품 속에 담긴 인간의 유한성과 자연의 무한함을 말하고 있는 잠삼의 시를 음미하면서 역동적 필치와 절주로 담아내고 있다.

<산방춘사>의 조형을 보면 판소리 장단 중에서 가장 느린 진양조에서 중모리, 자진모리, 휘몰이 장단이 한 화면에 담겨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침착통쾌(沈着痛快)하다고 할 수 있다. 침착통쾌는 상반되는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표현 하는데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소암의 글씨를 찬찬히 드려다 보면 머무른 듯 느린 듯하고 안온(安穩)하나 이내 튀어 오르고 있다. 명대 풍방(豊坊, 1493~1566)은 “옛사람은 시의 묘함을 논하면서 침착통쾌를 말한다. 서예 또한 그렇다. 침착하기만 하고 통쾌하지 못하면 살찌고 혼탁해서 풍치와 운치가 부족하고, 통쾌하기만 하고 침착하지 못하면 시들어 버리는 풀과 같아 법도가 없다(古人論詩之妙 必曰 沈着痛快 惟書亦然 沈着而不痛快 則肥濁而風韻不足 痛快而不沈着, 則潦草而法度蕩然)”豊坊『書訣』고 말한다.

침착은 용필이 무겁고 중후하여 가볍고 경솔하지 않는 것이고, 통쾌는 용필을 간결하고 예리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침착은 법도와 필력이 힘차고 굳센 것을 중시하고, 통쾌는 운치와 필세의 유창함을 중시한다. 침착통쾌는 서로 대립적 요소이지만, 자신의 작품 속에 통일시켜 나타냄으로써 작품을 격을 높인다. 소암의 <산방춘사>는 역동적 필치와 절주로 침착통쾌함을 드러내어 작품의 묘리(妙理)를 드러내고 있다.

고향 제주의 풍경을 담은 <영주십경(瀛洲十景)>(1975)의 작품을 보자. 이 작품은 매계(梅溪) 이한우(李漢雨)의 영주십경을 쓴 것이다. 성산일출(城山日出), 사봉낙조(紗峯落照), 영구춘화(瀛邱春花), 정방하폭(正房夏瀑), 귤림추색(橘林秋色), 녹담만설(鹿潭滿雪), 영실기암(靈室奇巖), 산방굴사(山房窟寺), 산포조어(山浦釣漁), 고수목마(古藪牧馬)로 전해진다.

현중화, <영주십경(瀛洲十景)>, 1975

<영주십경(瀛洲十景)>은 갈필과 발묵의 효과를 살려 역동성과 절주를 담아내고 있다. 종이의 표면적 효과는 시간의 속도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새로운 현상을 드러내며 드리핑(dripping)의 흘러 떨어짐의 효과는 화면에 농축된 공간을 만들어 준다. 획에 의한 표현은 단순한 대상의 재현을 넘어 그 자체로서 리듬감과 생명감을 갖는다.

송대 조구(趙構, 1107~1187)는 “침착통쾌하면 준마를 탄듯하여 나아감과 물러남에 넉넉하고 조화로워 채찍이나 고삐가 없어도 사람의 뜻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다(沈着痛快如駿馬 進退裕和 不煩鞭勒 無不當人意) 趙構『翰墨志』고 말한다. 이는 침착통쾌하면 말[馬]과 내가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이 작품에서도 농담(濃淡), 소밀(疏密), 대소(大小), 장단(長短), 비수(肥瘦), 기복(起伏) 등이 어울려져 준마를 타고서도 고삐가 없을 정도의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다.

제주의 해풍을 맞은 나무는 드러나 있는 부분은 거칠고 바람에 흔들리지만 그  뿌리로 인해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그의 글씨도 해풍을 맞은 나무와 같이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보여준다. 소암의 필획을 보면 부드러울 때는 한 없이 부드럽고, 마르고 단단하기는 쇠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산방춘사>와 <영주십경>은 먹물이 떨어질 듯 화면에 닿으면 진양조에서 휘몰이까지 역동적 필치와 절주로 펼쳐진다.

 

3. 소암체의 원형을 드러낸 한글서예

서예는 문자를 통해 작가의 사상과 사회적 의미를 조형

화하여 담아내는 예술형식이다. 소암의 한글서예는 한문의 필법과 조형성을 한글작품에 녹여내어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소암의 한글서예는 소암체의 원형성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중화, <석양에 취흥을>, 70×200cm, 1992

조선시대 한자서예는 한글 서예의 변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서체가 趙孟頫(1254~1322)의 송설체이다. 송설체는 훈민정음 창제이후에 한자와 한글이 혼용되면서 한글의 자형․서체․필법 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한글창제이후 한글과 한자의 혼용이라는 상황 속에서 송설체의 영향은 불가피한 것이다. 글쓰기 과정에서 한글과 한자의 혼용은 동일한 필체로 서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자 필사가 손에 익은 당시의 지식계층에 의해서 주류서체로 자리 잡은 것은 송설체의 영향하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거치며 하나는 궁체로 다른 하나는 민체(일반체)로 변화해 나가게 된다. 그 변화의 분기(分岐)가 최초의 한글 필사본인 <상원사중창권선문>이고, 그 중심에는 송설체의 이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소암의 한글서예는 전형적인 한문의 필법을 한글에 전용하고 있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1989)는 음력 7월 15일 여름철 휴한기 백중(百衆)에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전래동요로 민중들의 희망을 노래한다. 조형적 특징을 살펴보면 매 글자의 자법(字法)의 변화를 통해 전체적인 조형공간을 이질감이 없이 자연스럽게 구성하고 있다. 매 글자를 미리 구상하면 제대로 된 조형은 이뤄지지 않는다. 작가는 보름날 이 동요를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 가는 데로 붓이 가고, 또 붓이 가는 데로 마음이 따라가는 자연스러운 하모니(harmony)를 이루고 있다.

제자 소현 유봉자(素玄 柳鳳子, 1946~)는 “언젠가 선생은 취흥(醉興)에 병풍을 쓰게 되었다. 18개의 바람풍(風)자가 있었는데 다 다르게 나왔다”고 하였다. 소암은 의도적으로 다르게 쓰려고 하지 않아도 조형변화의 묘를 찾고 있다. 이 말에서 그의 지난(至難)한 학서의 과정이 내면에 녹아져 작품 속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중화, <석양에 취흥을>, 70×200cm, 1992

<석양에 취흥을>(1992)의 작품을 보자. 우재 조준(趙浚, 1346~1405) 시를 임신년 가을 술에 취해[驪背醉興] 쓴 글이다.

석양(夕陽)에 취흥(醉興)을 계워 나귀등에 실려시니
십리계산(十里溪山)이 몽리(夢裡)에 지내여다
어디셔 수성어적(數聲漁笛)이 잠든 날을 깨와다.

저물녘 취흥을 이기지 못해 나귀 등에 올라탔으나 십리에 뻗힌 계곡과 산길을 오는 동안 깜박 잠이 들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부의 피리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 시속에 화자도 취하고, 글씨를 쓰고 있는 이도 취했다. 여기서 취함은 바로 정내교(鄭來僑, 1681~1757)가 『金明國傳』에서 말한‘욕취미취지간(慾醉未醉之間)’의 경계(境界)이다. 술이 너무 취하면 그릴 수 없고, 또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리지 않는다는 말로 아주 취하지 않는 적절한 상태에서 명작이 나온다는 말이다. 김명국을 두고 한 말이지만 소암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석양에 취흥을>의 조형적 특징을 보면 한자와 한글이 이질감 없이 한 화면에 잘 어울려져 있다. 궁체는 중성의 세로획을 일정하게 맞추지만 소암의 한글서예는 글자의 전체적인 중심만 맞추었을 뿐 중성의 획을 가지런히 하지 않고 있다. 이는 한문의 조형성이 한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소암의 한글서예는 한문서예에서 드러난 소암체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소암의 한글서예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해 소암체가 재조명되기를 기대한다.

 

4. 나는 지금 들에 가는 걸 좋아해요

한대 채옹(蔡邕, 133~192)은 서조자연(書肇自然)을 말했다. 이는 문자가 자연의 물상을 본뜸으로서 시작된다는 말이다. 청대 유희재(劉熙載, 1813~1881)도 서조자연(書造自然)을 말했다. 이는 자연의 물상을 본떠서 나온 문자가 다시 서예가의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말한다. 소암은 끊임없이 자연 속에서 서예의 본질을 찾고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소암의 서예는 외형의 닮음에 있지 않다. 문자에 대한 이해와 철학이 그의 내면속에 들어와 녹여져 다시 서예작품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소암은 바로 흉유성죽(胸有成竹)에서 흉무성죽(胸無成竹)으로, 서조자연(書肇自然)을 통해 서조자연(書造自然)의 경지로 나아갔다.

소암이 말하는 ‘들’은 자연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그는 자연에서 서법의 묘를 배우고 다시 자연 속으로 돌아갔다. 그 자연 속에 소암이 있다. 지금도 그는 작품을 통해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저작권자 © 데일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