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공과(功過)

전두환은 재임 시절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였고, 연좌제를 폐지하였으며, 사교육을 금지시키는 한편, 적자투성이 무역수지를 흑자로 전환시킨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완벽한 인간은 없다. 나 또한 너 또한 부족한 인간이다. 전두환 역시 이 인간의 부족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다.

그리하여 내가 부족한 인간일진대, 전두환의 부족함을 지나치게 탓하지 말라. 그의 공(功)과 과(過) 역시 한편으로만 치우쳐 바라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한다. 공(功)은 공(功)대로 과(過)는 과(過)대로,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우리는 부족함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것이다.

(1) 5.18

5.18의 위대함은 불법적인 폭력에 굴하지 않는 불굴(不屈)의 정신이었다. 필자(筆者)가 목격한, 특전사로 알려진 공수부대의 공격성은 극렬한 것이었고, 이에 굴하지 않는 광주시민들의 정신은 위대한 호국(護國) 호남의 정신이었다. 일제 치하, 무려 한일합방 20여년이 지나간 그때에도 광주는 한 여학생의 모욕을 참지 않았다. 1929년 11월 3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 일어난 광주학생의거를 생각해 보면, 5.18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筆者)는 그때 대학 3학년이었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나는 공수부대의 전투력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쫓기는 학생들은 대부분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어린 대학생들이었다. 학생가방만 들고 다녀도 곤봉으로 치던 무도함을 나는 직접 목격하였다. 그리하여 필자(筆者)는 이 모든 것을 압축하여 ‘이 글을 읽기 전에 5.18을 말하지 말라’는 글로 5.18의 논란에 개인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 글을 이해하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5.18을 확대하여 호남 전체를 싸잡아 증오하고 조롱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5.18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 의한다면, 나 같은 전라도 사람, 나 같은 전라도 사람을 아버지로 둔 나의 자식과 다정한 고향마을 사람들, 그리고 내가 기르고 가르친 학생들 모두 조롱받아야 할 전라도 사람이었다.

5.18이 북한군 개입에 의한 사건이라는 점을 진실 규명의 차원에서 노력한다면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전라도 전부를 비하하는 행동은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필자(筆者)는 지만원과 같은 부류의 인사들과 결별하였다. 그리고 전두환의 ‘폭동’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다. 5.18은 폭동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5.18을 묻고자 한다면, 그건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직을 맡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도 역시 특전사 출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특전사는 무엇인가? 어떤 성격의 부대이며, 어떤 능력을 지닌 부대인가? 만약 대한민국 국군 중 최고의 전투력을 지닌 특전사가 군 훈련도 받지 않은 어린 학생들에게 밀린다면, 그건 특전사이겠는가? 그런 특전사가 어찌하여 광주에 투입되었는가? 그리고 그 처참한 시위진압을 하였는가? 또한 특전사 출신인 당신이 5.18 당시 무엇을 했기에 5.18 민주화유공자가 되었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어떻게 답할지, 필자(筆者)는 모른다. 다만 5.18을 이용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추악한 행태만을 기억할 뿐이다.

필자(筆者)는 5.18 당시, 폭력에 맞서는 광주시민들의 용기를 보았다. 또한 수많은 총기를 반납하고자 하는 광주시민들의 의로운 모습도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총기가 돌아다니는데도 금은방을 비롯하여 어느 상점 하나 털리지 않는 자랑스러운 질서를 보았다. 주먹밥을 안겨주던 양동시장 아주머니들의 모습도 보았으며, 병원으로 달려가 헌혈을 하던 시민들도 보았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것이 5.18의 정신임을 ale어 의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 역시 가슴에 담고 있다. 총기 탈취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무려 6차례에 걸친 교도소 습격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대 운동장 지하통로에서 살고 있던 넝마주이들도 합류했다고 하나, 지금까지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더구나 특전사가 소지하던 총기는 M16이었다. 필자(筆者) 역시 전방 군부대에서 다루던 총기였다. 그러나 사살된 사람들 중에는 M1이나 칼빈 의해 당한 희생자가 많았다는 점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광주민주화유공자 중에는 광주 근처에도 오지 않은 사람들, 이해찬이나 추미애, 문재인과 통진당 이석기 같은 인물도 유공자라는 소문에 기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진정 잘못한 일은 5.18 유족들에 대한 탄압이었다. 모여서 추모식이라도 갖고자 하려면 일일이 붙잡아다 함평이나 구례 어디 먼 길에다 부려놓고 간 짓은, 비록 형사들이나 부하들이 한 짓이라고 하지만, 그건 잘못된 일이었다. 그렇게 5.18 이후를, 전두환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였고, 끝없이 ‘폭동’이라는 말로 광주의 분노를 산 것이 오늘날 자서전조차 마음대로 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물론 특전사의 명예를 지켜주고자, 부하들의 명예를 챙겨주고자 했다 하더라도, 솔직담백한 전두환의 모습은 아니었다. 솔직한 사과와 상처를 치유하는 노력을 했더라면, 오늘날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이 유공자가 되는 현실은 없었을 것이다.

광주를 폄훼하고 모욕하기에 광주는 도와줄 사람을 필요로 했고, 그 도움을 준 사람들을 유공자로 선정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 선 국민들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며, 다시 광주를 조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극과 극이 부딪치는 이 시점에 못된 정치인들은 광주를 찾아가 정치적인 이용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화해와 해원(解寃)이 이루어지지 않는 지금의 평행선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사회에 떠도는 5.18의 의문을 이용하여 어떤 변명도 만들어 내거나 섞지 않았다. 북한군 침투에 대해서도 전두환은 ‘처음 듣는 소리’라며 일축한다. 역시 돌 같은 성격의 위인이었다. 그리고 전두환은 5.18 이후 광주에서 대구를 잇는 88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영호남을 잇는 도로를 만든 것이었다. 5.18의 죄책감에 대한, 전두환다운 최소한의 성의였을지 모른다.

다만 5.18 이후 즉시 이러한 비극의 원인과 과정, 무력진압의 필요성과 해원(解寃)을 위한 노력을 다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싶다. 목포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박지원은 지난 시절, 전두환의 5.18 광주 진압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전두환의 위대한 결단이었다.”

전두환을 살인마라고 하는 견해와는 완전히 다른 판단이며 평가일 것이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를 진압하여 더 이상의 혼란을 막고 국가를 정상화시켰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박지원은 다시 5.18특별법을 말하고 있다. 광주시민들에게 아부하여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정상모리배의 태도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 제정하고자 하는 5.18특별법이란 5.18에 대한 비판 자체를 막겠다는 의도를 지닌 법이다. 그러나 이는 다시 국민적 의혹과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이 법으로 인해 다시 광주가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면, 박지원은 간신(奸臣)의 전형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두환이 살인마일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5.18 당시 전남도청 지하에 설치된 60톤의 TNT를 폭파전문가 배승일을 급파해서 4일에 걸쳐 뇌관을 제거한 일과 총을 쏠 수 없도록 총의 노리쇠 방아공이를 제거한 일이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그 노력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2) 삼청교육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전두환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삼청교육대를 말한다. 맑고 깨끗한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동경(憧憬)이었을 것이다. 특히 전과 10범, 20범들이 활보하는 사회에 대한 반감이 더욱 전두환의 삼청교육대를 말하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인권탄압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지만, 집행과정에서 실무를 맡은 경찰이나 정보원들의 실수나 전횡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전두환의 3청교육대는 분명히 공(功)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필자(筆者) 역시 시내나 거리에서 깡패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거리를 깨끗하게 하고, 사회를 깨끗하게 하며, 경제를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로 시작된 삼청(三淸)교육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부랑자, 폭력배, 경제사범 등을 삼청교육대에 입소시켜 순화교육을 시켰으나, 당시 교육대의 1/3은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삼청교육대는 1981년 1월까지 총 6만 755명을 체포하고 보안사령부·중앙정보부·헌병대 요원과 검찰·경찰서·지역정화위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A·B·C·D의 4등급으로 분류하여 A급 3252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였고 B·C급 3만 9786명은 4주 교육 후 6개월 복역케 한 다음 2주 교육하여 훈계 방면하였으며, D급 1만 7717명은 경찰에서 훈계 방면하였다.

삼청교육대 순화교육은 연병장 둘레에 헌병이 집총(執銃) 감시하는 가운데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가혹한 방법의 훈련을 감행하였다. 1988년 국회의 국방부 국정감사 발표에 의하면 삼청교육대 현장 사망자가 52명,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3백 97명, 정신장애 등 상해자 2천 6백 78명이 발생하였음을 보고하였다. 오죽했으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느니 자살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겠는가.

1988년 노태우 정부 시절, '삼청교육 피해보상계획'을 통해 피해자에 대한 보상계획을 수립하고 삼청교육대 입소 피해자 3,226명의 보상신청을 받았다. 그리하여 39,000여 명의 피해자 중 신청자는 4,600여 명에 불과했고, 보상금액도 몇 십만 원에서 몇 백만 원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골동네까지 득실거리던 거지가 사라지고 부랑배나 불량배들이 활개를 치지 못하고 조용히 숨어들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간첩이나 용공주의자들이 발을 못 붙이는 세상이었다. 사실 좌익들뿐만 아니라, 학교 학생들도 끌려갔으니 깡패, 양아치, 학교 일진 등도 무서워하던 시절이 바로 전두환 시대였다.

무고한 인권탄압이나 침해만 없었다면, 전과 10범, 20범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살인범들이 감옥에서 인권을 말하는 지금, 더구나 민주시민의 질서가 사라진 지금 누가 전두환 시대를 마다하겠는가.

그러므로 한 인물의 평가는 어느 단면만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 인물이 갖고 있는 모든 다면에서 평가를 하는 종합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합리(合理)다. 그런 의미에서, 전두환은 ‘살인마’나 ‘독재자’라기보다는 ‘권위주의적 지도자’라고 해야 옳을 것이라 믿는다.

2017. 10. 28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

 

저작권자 © 데일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