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이야기 담은 국립 진도자연휴양림에 '어란여인 안내판 세운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전쟁은 1597 정유년 전열을 다시 정비한 일본군이 조선을 재 침범한 전쟁, 정유재란이다.

1597년 7월 7일에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의해 400여명이 전사하고 200여척의 파선되는 대참패를 당하였는데 이때 기세등등한 일본수군은 남해안을 따라 서해안까지 노도와 같은 진격이 시작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조정은 7월 23일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재임명하여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하도록 명하게 된다.

8월 3일부터 8월 17일까지 이순신은 장흥 회령포에서 패잔선 12척을 수습하여 일명 남도수군재건길 330여km를 따라 후퇴하면서도 4회에 걸쳐 왜 수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한편으로 명량에서 일본 수군과 결전을 모색한다.

그렇게 패잔선 12척과 전라우수영에 계류중이던 전선 1척을 포함하여 총 13척의 전선으로 겨우 선단을 구성하게 이른다.

완도 고금을 거쳐 이순신 수군은 8월 29일 명량 입구에 위치한 진도 벽파진에 주둔하고 9월 15일 벽파진에서 싸움이 불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일본 수군을 유인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다.

이때 일본수군은 어란진에서 정박하면서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이미 궤멸 하다시피 한 조선수군을 명량에서 완전히 궤멸시키고 서해안을 무인지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강과 대동강, 압록강까지 도달하여 명나라의 지원을 단절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선을 점령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에 몇 안 되는 조선수군을 명량해전에서 완전히 궤멸시킨다는 장담을 하고 있었던 반면, 조선수군은 절체절명, 이 해전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마련할 수가 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결국 1597년 음력 9월 16일에 이순신이 거느리는 조선수군 13척은 울돌목 즉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3척과 접전을 벌여 그 중 31척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자랑스런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은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 이후 수륙병진 전략으로 호남을 석권하고 한성으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의 의도를 좌절시킴으로써 정유재란의 흐름을 뒤바꾸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명량대첩, 이순신이 불과 13척으로 133척이나 되는 일본의 함대를 격멸한 것은 그의 뛰어난 전쟁 지휘 통솔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세계 해전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사례이며 의로운 전라도민들의 구국정신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천재적인 지략과 독보적인 전략이 만들어 낸 이 명량대첩에는 이순신 장군의 전술에 결정적인 정보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는데...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대장을 한 일본군은 어란포로 몰려들기 시작하고 이순신은 진도 벽파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이순신은 명량해전 하루 전인 9월 15일 갑자기 진을 해남 우수영으로 옮긴다. 첩보에 의한 것으로 벽파에서 대적하기엔 역부족으로 판단한 것 같다.

드디어, 1597년 9월 16일 133척의 왜선이 명량해로 공격해 들어오고 이른바 13대 133의 전쟁, 세계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이 전쟁, 이 기적과도 같은 전쟁은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심경으로 부하들을 독려하며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전쟁에 임했던 이순신 장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이순신 장군은 이 승리한 전쟁을 두고 스스로도 “명량해전은 ‘천행이었다’”고 했다. 그만큼, 힘든 전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전무후무한 전쟁의 승인을 돌아보면 충무공의 충정과 구국의 일념, 그리고 그의 뛰어난 지략과 여기에 잘 알려진 정보력(첩보전)이 뒷받침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정보력을 말해주는 한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의 경우 정보에 목숨을 걸었다. 관할구역이 아니었던 경상도의 물길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인재를 보내고 부산으로 스파이를 잠입시키고 출격 시에도 항상 현지민을 통해 적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다. 그 결과 1,2차 출격 때에는 모두 적의 배후를 기습해서 압승을 거두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명량해전 이틀 전 난중일기(1597년 9월 14일자)에서 (어란진에서 있었던 일로 김중걸이 왜에 붙잡혀 왜선에 감금될 때 ‘김해인’ 이라는 여인이 결박을 풀어주며 기밀을 제공했다)와 조선왕조실록 기록(선조 30년(1597년) 이순신은 왜선 중에서 여인으로부터 정보를 탐지하여 곧장 장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순신은 이 난중일기에서 “(김중걸의)말이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을 듯해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란민들을 육지로 피하라고 타이르도록 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해전 하루 전 9월 15일 갑자기 벽파에서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 것은 그의 정보력을 말해 주는 하나의 대목이다.

이와 연관되는 것은 일제강점기 해남에서 순사를 지낸 사와무라 하지만다로의 유고집 48,49쪽에서 ‘어란진에 주둔한 스가 마사가게는 이순신군의 간첩인 미기(美妓) 어란과 애인관계로 사랑에 빠져 명량해 출전기일을 발설한다. 어란은 이를 이순신군에 연락한다’라고 적었다.

즉, 조선인 김중걸이 왜군에게 붙잡혀 마사가게 앞으로 끌려왔는데 죽임직전에 누군가의 구명으로 김중걸이 풀려난다. 이 누군가는 김중걸이 떠나기 전 “나는 김해인”이라고 안심시킨 뒤 “‘왜놈들이 배들을 모아 조선 수군을 모두 몰살한 뒤 바로 경강으로 올라가겠다고 말하더라.’는 말을 우수영에 전하라.”고 귀띔했다는 것.

명량해전의 또 하나의 승인이라는 구국의 여인 ‘어란’은 이렇게 등장한다.

지난 7월 전남 진도군 임회면에 울돌목에서 펼쳐진 명량대첩을 모티브로 한 숲 속의 집 등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의 이야기를 담은 휴양림으로 산림청에서 '주제가 있는 숲'을 부각시키는 휴양시설 ‘국립 진도자연휴양림’이 조성됐다.

이곳 국립 진도자연휴양림에 '어란 여인' 안내판이 세워진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량해전과 '어란 여인' 이야기

명량해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97년 9월 16일, 진도와 해남 사이의 좁은 해협인 명량에서 단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에 맞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7년간의 임진왜란에 종지부를 찍은 기념비적인 싸움이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명량(울돌목)에서 30km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해남 어란진에 주둔하며 출병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포로로 잡혀가 왜장 칸 마사가게(菅正蔭)의 연인이 된 ‘어란(於蘭)’은 그에게 명량해전의 출병 기밀을 전해 듣고 이를 이 충무공에게 알림으로써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이후 어란은 자신의 첩보로 인해 적장 칸 마사가게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명량이 바라다보이는 여낭터 벼랑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듯 조선 여인 어란은 나라에는 충절을, 사람에게는 한없는 인류애를 발휘해 평양의 계월향, 진주의 논개와 더불어 임진•정유재란의 '3대 의녀'로 추앙받아야 할 역사적 인물이다.

자칫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호국 여인 어란을 해남의 향토 사학자 박승룡(朴昇龍, 1927년생) 옹이 국내는 물론, 일본에 드나들며 10여 년간의 고증 끝에 역사의 전면에 모셨음을 알린다.

2017년 9월 8일
자료 제공 : 한국문화재보호연구회

이 같은 사실은 숲속의 전남 이근배 사무국장은 이와 관련하여 SNS를 통해 밝혔는데 “완도 넙도가 고향인데 박승룡 어르신의 평생의 소원을 들어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신다며 순천대 김도균 교수님과 여러분들의 의견을 받아 수차례 수정보완해서 완성했다”고 전했다.

덧붙여 “이글(안내판)은 정영덕 소장님의 도움으로 국립자연휴양림에 안내판으로 서게 된다”고 밝혔다.

또 덧붙여 “해남사람일수록 복잡한 한일관계 때문에 어란여인을 거론하기를 꺼려하는데 이런분들의 관심과 인간적 배려가 부끄럽기만 하다”는 의견을 내 놓았다.

이에 박승룡 옹은 <데일리저널>과 통화에서 “그냥 지나쳐 버리면 영원이 감춰질 소중한 이 사실을 놓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밤잠 설치며 매달려 왔는데, 이번 진도 국립자연휴양림에 어란여인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진다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해남에서 발굴되고 알려진 ‘어란여인’의 이야기가 진도로 건너가 진도여인 ‘어란’이 되는 것은 아닌지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간의 노력에 대한 ‘애증’이 남아선지는 모르지만 소중한 해남의 문화 역사가 해남에서 더욱 크게 자리했으면 한다”는 생각을 전했다.

박승룡 옹

박 옹은 ‘어란’여인의 등장에 대해 “취미도 아니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면서 “그것은 ‘어란’여인에 대한 나의 믿음이요, 반성과 관용 정신의 제고, 나아가 평화를 희구하는 나의 갈망을 작은 힘이나마 한 일 양국에 널리 알리고자하는 ‘나도 모르는 무아의 행군’이였다”고 술회를 반복했다.

한편, 어란 여인이 투신한 여낭터 인근에 <어란여인이야기>를 담은 비석이 세워져있으며 그내용은 아래와 같다.

어란여인이야기

'정유재란 때에 일본장수 칸 마사가게(菅正陰)는 송지면 어란진에 주둔하던 어느 날 그의 여인인 ‘어란’에게 출병의 기일을 발설했다. ‘어란’여인은 그 사실을 이순신에게 전하여 명량해전의 중요 승인이 되었다. 이로써 ‘어란’여인은 나라를 구했으나 자신의 연인이 해전에서 전사한 것을 비관하여 여낭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어느 어부가 그 시신을 거두어 바닷가에 묻어주고 석등롱(石燈籠)을 세워 그녀의 영혼을 위로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해남에 근무했던 모 순사의 유고집에 나오는 이야기는 많은 언론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국악뮤지컬과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 등, 새로운 이야기들로 발전해 가고 있다. 어란마을의 당집과 여낭, 석등롱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를 이룬다

글 국립목포대학교도서문화연구원 강봉룡 원장
2012년 12월 20일
해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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