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을 이야기 하려면 목민심서보다 먼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청백리의 대명사인 ’백비‘다.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호사마을 묘소 앞에 가면 청백리(淸白吏) 박수량의 백비(白碑)가 있다.

호패형 무서백비(無書白碑)인 이 비는 전라남도 기념물 198호이며, 박수량 선생의 청렴(淸廉)을 기리는 비석으로 무서백비, 말 그대로 하얀 비석에 아무런 글씨가 없다.

이 백비의 사연을 들어보면 박수량의 임종을 지키던 자식들에게 유언으로 “내가 시골 출신으로 외람되게 판서(判書)의 반열에 올랐으니, 영광이 분수에 넘쳤다. 내가 죽거든 절대 시호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아 달라” 하였다한다.

박수량은 1515년(중종 10년)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시작으로 1552년(명종 7년) 우참찬, 호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하기까지 40여년의 관리 생활을 하면서 집 한 칸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박수량은 곧으면서 신중하고, 예법(禮法)을 잘 지켰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박수량은 1539년(중종 34년) 호조참판으로 있을 때 어머니 봉양을 위해 자청하여 담양 부사로 나가갔는데 이때 어머니가 이질을 앓아 위독하자 몸소 약을 달이느라 수십일 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대변이 단지 쓴지 맛보아가며 약을 써서 병환이 나았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기고된 [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백비의 깊은 뜻… "맑고 텅 빈 마음을 기억하라"에서 이 교수는 박수량에 대해 ‘청렴 근면한 남녘의 으뜸 선비’로 존중받았다고 했으며 그리고 끝내 한 섬도 못 된 곡식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며 “겉은 깨끗해도 속이 더러운 자들이 식은땀을 흐르고도 남을 청빈 이었다”고 적었다.

이 교수는 또한, 곧고 신중했던 품성, 예법(禮法)을 잘 지키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 또한 문장이 있었으나 드러내지 않았고 술은 정해진 양이 없었으나 강하게 자제하여 혼란에 이르지 않았으며, 사람과 사귈 때는 지나치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고 향리에 있을 때에도 근신하여 항상 만족할 때 그치는 것으로 경계를 삼았다고 덧붙였다.

백비, 그리고 박수량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착한 선비가 쓰러지고 휘어지는 오욕의 세월, 정경 벼슬이 무슨 광영이며 청백리가 무에 대수롭겠는가? 혹여 벼슬과 명예에 기대지 말고 나의 마음을 기억하라, 하였음이 틀림없다”고 청백리, 이 교수는 그 의의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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