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 그는 조선중기에 나라가 낳은 절대적인 대시인이다.

현재 해남 향현사인 금강곡에 자리한 해촌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고산 선생은 성품이 강직하고 지성의 선비로서 전란과 당쟁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오면서도 정성을 다하여 국가를 경영하였고 백성의 편에서 의로움을 실천한 시대의 인물이었다.

고산 선생은 학문을 뛰어넘어 철학과 경사서 제자백가를 익혔으며 천문, 음양지리, 복서, 의약 등 다방면에 걸쳐 통달한 다재다능한 천재의 위품이었다.

고산 윤선도를 이야기할 때 부용동과 금쇄동 등 원림과 고천암 등 간척을 빼놓을 수 없는 것도 인생의 덕목을 벼슬에 두지 않고 수신과 근행 및 적선에 두고 있고 이 같은 사고와 재능을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사용했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고산의 학문은 국가와 백성의 관계를 형상화하여 나타내게 되면서 우리는 고산 선생을 국문학의 비조, 국문학의 보배, 조선 시조문학의 대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보길도 부용동의 '세연정'

완도 보길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윤선도의 세연정이 있는 부용동 원림을 떠 올리는데 이 원림은 자연을 거의 손상하지 않고 최대한 순수자연 상태를 변형하지 않고 약간의 인공을 보태 조화를 창출한 정원으로 생활공간이자 놀이공간으로 당시 대표적인 별서정원에 속한다.

여기 누정과 별서에서 고산의 ‘어부사시사’가 탄생한 것이다.

금쇄동의 절경과 해남윤씨 고산 윤선도의 제각 모습

한편, 윤선도가 1642년(인조 18) 그의 나이 54세 때 해남 금쇄동과 수정동의 첩첩산중에 머물면서 자연 속에 인공적인 조형공간으로 원림을 조성하게되는데 이곳이 바로 하늘이 다듬고 귀신이 감춰 온 곳이라는 금쇄동이다.

이곳에서 그는 ‘산중신곡’과 ‘오우가’ 등의 작품을 만든다.

윤선도는 당쟁에 몰려 해남으로 돌아와 녹우당에 거주하면서 부용동과 금쇄동을 등 초야를 왕래하며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이 시기에 보길도 부용동에 세연정, 낙서재, 동천석실 등을 지었고, 해남 현산 만안리 뒷산 현산고성에 금쇄동과 수정동 등 원림을 조영했던 것이다.

윤선도는 1671년 보길도 낙서재에서 85세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묘소는 금쇄동에 모셔져 있다.

그의 묘소 위치와 관련해 재미있게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그가 잡은 묘 터는 인척관계였던 당시 유명한 지관인 이의신이 잡아놓은 터였는데 이의신은 자신의 묘 자리로 쓰기위해 말을 타고 매일 금쇄동을 찾았다고 한다.

이상하게 생각한 윤선도는 기회를 보던중 어느날 이의신이 낮잠을 자는 틈에 이의신의 말에 오르니 그 말이 습관적으로 금쇄동으로 갔는데 그곳을 윤선도가 보니 그 자리는 지세를 보아 천하의 명당자리였다고 한다.

고산은 이 곳을 자신의 묘자리로 삼기로 하고 말뚝을 박고 묘 자리를 표시 한 후 이의신에게 자신이 보아둔 묘자리가 있다며 이의신을 데려가니 이의신이 웃으면서 ‘자리에는 임자가 모두 따로 있는데 자신이 괜스레 헛고생을 했다’ 며 포기했다고 전해진다.

금쇄동이란 명칭은 윤선도가 금쇄석궤(황금의 자물쇠로 잠긴 궤)를 얻는 꿈을 꾸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꿈과 부합되는 이곳을 찾아서 그 이름을 금쇄동이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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