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군의회 박동인 군의원이 해촌서원 주변 잡초제거를 하고 있다.

최근 금강산성의 열쇠를 푸는 작업인 정밀지표조사에 들어간 해남의 진산 금강산.

이 금강산에 펼쳐진 여러 갈래의 등산로는 그 옛날 서울에 이르는 삼남길에 견주어도 충분한 매력을 품고 있은 명산으로 두 개의 만대산을 거느리며 일찍이 해남8경 중 ‘금강폭포’와 ‘미암청람’을 둔 해남의 보배로운 산이다.

일설에 의하면 해남의 금강산은 만대(1만개의 작은 봉우리)를 두개나 거느리는 산으로, 일만이천봉에 그친 북한의 금강산보다 팔천봉이나 더 많은 것 아닌가한다.

옛날 해남은 한양과 멀다는 이유로 귀양지로 이름을 날린 고장이다. 그래서 해남 금강산은 유배문화의 향기가 서린 곳이며, 금강산의 지명은 이쯤 귀양자들의 입에서 북쪽의 금강산에 비교될 만하다는 향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추측도 해 본다.

해남 관동에서 금강산성을 바라보고 오르자면 해남읍내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팔각정 공원에 이른다.

여기서 곧장 금강산 정상을 향하지 않고 조금 오르다가 이정표를 따라 바로 우회전하여 수양대군에 의한 단종애사, 당시 처절한 아픔과 충신 민신을 배향하고 있는‘ 미암서원’ 뒷쪽으로 난 ‘미암길’을 따라 금강곡까지 가다보면 금강저수지 둑 건너에 순간 ‘해촌서원’이 바라다 보인다.

해촌서원, ‘육현사’라고도 하는 이곳은 금남 최부, 석천 임억령, 미암 류희춘, 귤정 윤구, 고산 윤선도, 그리고 취죽헌 박백응 선생 등 6현을 배향하고 있다.

해촌사로도 불리는 해촌서원은 1652년(효종 3년) 임억령 선생 단독 사우로 건립됐으나 1689년(숙종 15년) 해남유림 중지가 모아져 최부 , 류희춘 선생이 추배되고 1721년 윤구, 윤선도 선생을 추배하여 5현사라 했다.

이후 조선말에 이르러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1년 지역유림에 의해 재 설립되어 제향하였고, 1922년 박백응 선생이 추배되었으며 원래는 구교리에 있던 것이 현재 이곳 금강골 저수지 옆으로 이설되었다.

먼저 금남 최부 선생은 김종직의 제자로 나주에서 태어나 처가 고을인 이곳 해남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뛰어난 학자 관료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춘추관편수관·예문관응교 등 여러 청요직을 거친 사람이었다.

1487년 제주 추쇄경차관으로 파견되었다가 제주도에서 아버지 상을 당하여 급히 귀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에까지 표류하여 해적으로 오인 받아 억류되었지만 조선의 고위층으로 밝혀지면서 중국을 유람하고 돌아와 그 유명한 ‘표해록’을 남긴 큰 학자였다.

이 책은 조선의 마르코폴로(동방견문록 지은이)라고도 불리는 최부의 ‘중국기행문‘을 이곳 해촌서원에 함께 배향된 외손자 유희춘에 의해 ‘표해록’으로 간행하였으며, 일본에서도 주자학자 기요다군긴이 번역하여 1769년 ‘당토행정기’라는 이름으로 간행되기도 했다.

연산군의 패정에 격분하며 공경대부들의 비리에 대해 통렬이 비판했던 그는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이른바 훈구파의 의해 김종직과 함께 사림파로서 배척되어 함경도 단천에 유배 되었다가 1504년 10월 24일 유배지에서 갑자사화를 맞아 결국 해배되지 못하고 51세를 일기로 참수되어 끝내 세상을 떠난 강직하고 청렴한 관료였다.

안타까운 그의 죽음에 대해 조야 모두가 애석해 하던 중 2년 뒤인 1506년 중종의 즉위와 동시에 신원되어 승정원도승지로 추증되었으며 문집에 ‘금남집’이 있다.

한편, 요즘 공무원 세계의 화두인 ‘청렴’을 이야기 하면 곧장, ‘최부와 송흠의 청렴’을 이야기 하는데 송흠의 선배였던 최부, 후배였던 송흠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요즘 말하면 관용차에 대한 것이리다.

송흠이 관직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에서 휴가차 귀향하는 관리에게 내주는 말을 타고 서울에서 고향 영광으로 왔을 때, 그 때 마침 최부도 귀향에 있음을 안 송흠이 선배 최부의 집을 찾아 선후배의 정을 나누고자한 자리에서 최부는 “우리 집까지는 어떤 말을 타고 왔느냐”묻고 같은 말을 타고 왔다는 송흠에게 “고향까지는 공무라 관계없지만 우리집까지는 사무인데 왜 나라의 말을 타고 왔느냐”며 크게 꾸짖고는 나라에 고발하여 송흠이 처벌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송흠은 그 때의 최부 선배의 꾸지람과 징계의 충고를 잊지않고 항상 초심을 기억하며 관료생활 내내 공사를 철두철미하게 지키며 모범적인 청백리가 되어 지금까지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로 세상에 높은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이는 요즘, 위정자나 공무원들에게  국민의 세금인 관용차 사용에 대해 큰 교훈을 던져주는 사례로서 청렴은 구호가 아닌 공사구분을 선택하는 사사로운 생각에서 부터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를 청백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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