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筆者)는 지금 시인의 가슴으로 글을 쓴다.

5.18을 향한 애증을 거두고 뜨거운 사랑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여, 필자(筆者)는 호남인이지만 호남과 비호남의 중립에 서서 5.18을 바라보고자 한다. 그곳은 좌와 우를 논하는 이념의 중립지대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시인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는 5.18에 관한 소인(小人) 정재학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셨으면 한다.

1980년, 대한민국은 격랑에 휘말리고 있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이 있고, 12.12 사태로 드러난 신군부의 집권 장악 음모가 진행될 무렵, 정치권도 신군부세력을 향한 민주화의 꿈을 터뜨리고 있었다. 물론 대학가도 이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필자(筆者)는 군을 제대하고 복학하여 3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3월 개학하자마자, 대학가는 데모열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처음은 학교와 교수를 향하여 어용교수를 처단하는 시위가 있었고, 결국은 총장 퇴진을 부르짖으며 데모를 확산하고 있었다. 4월에 이르기까지 광주의 대학가에 정치적 성향은 없었다.

5월에 이르러서야 도청 앞 분수대로 모인 학생들은 비로소 군부세력을 향하여 민주화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서울의 데모가 격렬해진 후의 일이었다. 서울은 학생들이 시내버스를 불태우는 등 피를 흘리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광주는 촛불을 들고 기도하는 식의 고요한 집회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고(故) 박관현 전남대 학생회장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지던 때, 조선대도 이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때가 5월 15일 무렵이었다.

필자(筆者)가 부모님 농사 일손을 돕다 친구들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고 달려가던 때가 바로 5월17일이었다. 버스 속 터미널 근처에서 돌을 던지는 학생들을 보았다. 그리고 사람 사냥을 하고 있는 공수부대원들을 보았다. 터미널 안에서는 이미 살육이 시작되고 있었다. 팬티바람의 학생 하나가 도망치고 있었고, 다수의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 중의 어떤 이는 벽에 기대어 멍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피는 머리에서부터 가슴까지 범벅이 되어 있었다. 첫 사망자가 난 날이었다.

학생가방을 들고 있던 필자(筆者) 역시 공수부대원의 표적이었을 것이다. 터미널 앞 대한극장 통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던 나는 젊은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났다. 시장바구니를 든 그 아주머니는 나에게 학생이냐며 묻고는 곧 바구니 속에 내 가방을 담았다. 양동에 산다는 동명이 엄마라는 분이었다. 우리는 부부행세를 하면서 광주교대 앞 하숙집까지 갔다. 그동안 내 시야를 가득 채웠던 것은 쓰러진 학생들과 분노하는 시민들의 얼굴들이었다.

필자(筆者)는 공수부대가 데모진압에 나선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사건을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군대를 다녀왔기에 공수부대원들의 전투력을 잘 알고 있었다. 북한 특수부대를 상대할 공수부대가 데모 진압에 나섰다? 이리 사건이 떠올랐다. 전북 이리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술을 마시다가 깡패들과 시비를 붙었던 사건이었다. 깡패들에게 술 취한 공수부대원이 맞자, 그 소식을 들은 공수부대장이 전 공수부대원을 풀어 이리 시내를 뒤집어 놓은 사건. 이리 깡패들은 물론 재수 없이 걸린 일반 청년들조차 모두 묵사발이 되었다. 따라서 공수부대원은 악과 깡으로 뭉쳐져 패배와 후퇴를 모르는 철저한 인간병기들이었다. 이들이 대모 진압에 나섰다면, 분명 처절한 폭력이 수반되는 진압이 될 것이었다.

예상대로 우린 광주시내 도처에 흐르는 피를 목격하였다. 광주시민들은 비극의 현장에서 우리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이 우리를 죽이는 이 아이러니에 대해 정신을 잃고 있었고,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시민들의 타오르는 분노뿐이었다. 5.18이 시작된 것이었다.

곧 광주는 모든 길이 차단되었다. 필자(筆者) 역시 아버지가 데리러 오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외곽으로 빠져나온 나는 곧 모든 방송과 언론이 광주를 폭도와 간첩들의 폭동도시로 몰아가는 것을 보았다. 시민들이 무장하고, 다시 무장을 풀고 무기를 반납하는 과정에서 단 한 건의 총기 사고나 강절도 사건이 없었던 보름 동안, 우리는 신군부의 음모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닌자의 암살법’을 이용한 정권 장악이었다. 닌자는 암살대상자의 위치를 파악하면, 대상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불을 지른다. 사람들이 불을 끄러 몰려간 사이, 즉 경호가 풀어진 사이에 조용히 목적을 달성한다.

신군부의 음모도 마찬가지 수법이 동원된 게 아닌가 싶다.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 데모가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을 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광주에 불을 질러 모든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폭도와 간첩들의 소행으로 몰고 간다는 닌자의 암살 수법.

광주를 폭도의 도시로 몰아간 결과 전국으로 퍼지던 데모는 순식간에 잠잠해졌고, 이어 광주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것을 이용하여 정치인들을 잡아넣고 국민들의 입을 막은 다음, 권력을 탈취한다는 것이 예상되는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였다. (이 시나리오는 진위를 떠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더구나 광주는 전라도였다. 특히 광주는 전라도 차별의 상징적인 곳이었다. 따라서 광주에서 사태가 일어나면, 대부분 국민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을 하리라는 것도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그래서 광주에 가혹한 진압을 유도하려고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공수부대원들도 피해자일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은 평소 후퇴란 있을 수 없는 일로 훈련을 받는 특수부대원들이었다. 그런 공수부대가 학생들 같은 훈련 안 된 무리들에게 밀린다는 일은 꿈에도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폭력적이었는지 모른다.

필자(筆者)는 5.18 후에 학교 문예부장이 되어, 또다시 5.18 이후를 서럽도록 체험하였다. 어떤 행사를 하려고 해도 도청에 가서 젊은 장교에게 원고 검열을 받았다. 그리고 전라도 사람이라면 밥도 안 주는 식당도 경험하였다. 하필이면 전라도 사람과 사귀냐는 젊음도 겪었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한 뒤, 필자(筆者)는 교원채용 순위고사에 응시하여 교단에 섰다.

탄압은 1997년 가을까지 무려 17년이 지속되었다. 5.18 유가족들은 죄인 취급을 받았고, 형사들이 따라붙었다. 행사를 하려고 하면, 모두 차에 태워 멀리 보내버렸다. 김대중 당선 후, 이 모든 것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까지의 일이었다.

그러나 필자(筆者)는 북한의 존재를 잊지 않았다. 북한이 분명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는 생각. 반드시 5열을 동원하고 사태를 확장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여순반란사건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당시 반란군은 서울로 진격을 꾀하고 있었다. 그렇듯이 무기 탈취와 교도소 습격, 그리고 서울로의 진격, 해남을 비롯한 전남 전역에서 올라온 무장시민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5.18 묘역에 묻힌 무연고 묘지였다. 유전자 인식기술이 세계 최고라는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연고 없는 묘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후(以後), 필자(筆者)는 북한 특수부대 출신 임천용 씨를 만났다. 북한이 광주사태라는 호기를 맞아 팔짱끼고만 있지 않았다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사진 한 장. 광주 시내에서 당시 장갑차 위에 탄 사람 이름이 광수였다는 것도 알았다. 북한 특수군이 광주를 빠져나가면서 데리고 간 학생들(이들은 광주사태의 증인으로서 선전용으로 쓰고자 데리고 갔다 함)이 따라오지 못하자, 죽여서 산길에 매장한 사실도 알았다. 다시 광주가 서러워졌다.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에 맞서, 내 자식들 같은 학생들을 보호해 주던 시민들. 부부행세를 하며 나를 하숙집 근처까지 데려갔던 동명이 엄마. 주먹밥을 나눠주던 양동 시장 상인들. 도망 친 학생들을 보름 동안 품어주고 숨겨주던 광주 황금동 술집아가씨들. 부모를 총탄에 잃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어린 눈동자. 북한은 이들의 눈물마저 가져간 것이었다.

그리하여 필자(筆者)는 두 번 다시 광주의 눈물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듯이 이제 광주도 변해야 한다. 1980년대식 원한 서린 관점과 시각으로는 미래 대한민국의 영광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광주의 아들과 딸들도 대한민국의 아들딸들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원망하지만 말고, 모든 것을 풀어놓고 내일을 바라보아야만이, 대한민국 국민들뿐만 아니라 광주시민들도 5.18의 족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피논객들도 광주와 북한을 분리해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지만원 박사도 경상도 전경을 숨겨서 살려준 ‘광주아버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5.18을 이용한 군사독재와 북한의 야만을 욕하더라도 광주까지 욕해서는 안 된다.

이에, 광주 역시 북한의 개입과 간첩들의 준동을 인정해야 한다. 사북사태 등 일련의 북한 도발과 적화 공작이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음은 북한의 5.18 개입에 개연성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한이 5.18을 이용하였음을 광주시민들이 인정할 때, 광주는 더욱 위대해질 수 있다. 대의(大義)를 위하여 나를 덜어내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비극을 광주시민들에게서 찾지 말고, 군부독재와 북한의 적화공작에서 찾아야 한다.

5.18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5.18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광주와 광주시민들이 비난을 받는다고 믿는다. 민주당과 종북세력들이 5.18을 떠받드는 행위 자체가 일반 국민들에게는 혐오감을 주는 일이기에, 그래서 5.18은 부정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전두환의 5.18 진압을 ‘위대한 결단’이라고 말한 박지원을 비롯한, 더러운 정치인들과 종북세력들이 5.18에 끼어드는 것은 치욕일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인들의 5.18 묘역 참배 행위도 막아야 한다. 5.18이 정치를 벗어날 때, 진정한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필자(筆者)는 믿는다.

아니, 5.18은 역사 속으로 조용히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5.18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지막 의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정치가 5.18을 잡고 있으면 있을수록 5.18은 난자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5.18은 역사 속에 있어야 비로소 작은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5.18을 역사 속으로 보내자. 정치의 이름으로 다시는 혼탁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지 말자.

필자(筆者)는 이 글을 마치면서, 호남인이 아니라 다시 대한민국의 논객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후, 두 번 다시 5.18을 찬양하거나 비난하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5.18을 고스란히 역사로 돌려주기 위하여, 5.18을 이용하는 정치세력들과 5.18을 곡해하는 무리들 모두와 맞서 싸울 것이다.

 

저작권자 © 데일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