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에게 물어보십시오. 왕재산 간첩단 속에 민주화유공자가 있는 이유가 뭐냐고.)

서울 양평동의 한 빌딩 근처에서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은 오래 기다렸다. 여름날 오후였다. 드디어 외출한 총책 '관덕봉'(북한에서 부여한 암호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뒤따라 수사관들이 9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주차장용 차량번호 인식 프로그램을 파는 IT업체였다. 기술은 북한에서 온 것이었다.

국정원은 일 년 전부터 이 업체 동업자 3명의 뒤를 쫓아왔다. 북한 대남공작부서인 '노동당 225국'의 지령으로 남한에 지하당 '왕재산'을 결성, 20년째 활동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이들이 중국에서 북(北)의 공작원과 접선하는 장면도 포착됐다. 증거 확보를 위해 여섯 차례나 동영상을 찍어놓았다.

이날 압수수색 팀은 서른 명이 넘었다. 수사관과 보조수사관 외에 사무실 사진을 찍는 직원, 동영상을 촬영하는 직원, 압수물만을 찍는 직원, 신변보호를 맡는 직원 등으로 구성됐다. 압수물을 봉인할 때마다 본인의 서명을 받았다. '관덕봉'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의 아파트에서는 10년도 더 된 문건도 발견됐다. 방 금고에는 돈 대신 USB(휴대용 데이터 저장장치) 등이 보관돼 있었다. 압수수색은 새벽 3시까지 진행됐다. 그 직후 '관덕봉'은 긴급체포됐다.

수사관이 "오랫동안 활동했으니 할 말이 많을 건데"하고 말을 걸자, 그는 "할 말은 많다. 정리를 해서 얘기하겠다"고 답했다. 그가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조사를 위해 구치소에서 데려 나왔을 때, 그는 "변호사가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며 버텼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인이 다녀간 뒤였다. "그럴 사안이 아니다"고 달래자, 그는 "하루 더 말미를 달라"고 했다. 다음 날 두 번째 변호사를 접견한 뒤로 그의 눈빛이 달라 보였다고 한다.

구속된 다른 피의자는 "조사를 받지 않겠다"며 구치소에서 나오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수사관들은 구인장을 발부받아 데려와야 했다. 변호인들은 "강제로 조사하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따졌다. 국정원으로 들어갈 때 거치는 보안검색 절차에 대해서도 "변호인의 소지품을 검색하는 것은 변론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수사가 진행되던 시점에 변호인단은 14건의 '준항고'(수사기관의 처분에 대해 취소와 변경을 법원에 청구하는 것)를 제기했다. 법원에서 기각되자, 대법원에 재항고했고 또 기각됐다. 국정원에서 20일, 검찰에서 30일 조사하는 동안 피의자들로부터 한마디도 얻어듣지 못했다.

증거는 압수물 밖에 없었다. 이 중 USB에 저장된 파일은 암호가 이중으로 걸려 있어 이를 푸는 데 열흘이 걸렸다. 암호 중 하나는 김일성을 접견해 '왕재산'이 남조선 지하당으로 인정받은 날짜였다. 파일 중에는 '올봄 패션트렌드' '가정 방범 상식' 등 신문기사도 있었다. 이는 위장 파일이었다. 암호 해독 프로그램에 집어넣으면 지령문이 보였다. 압수 열흘 전에 받은 지령문에는 'XXX를 지도해 등록금 투쟁을 할 것' '어느 정당을 죽이고 어디와 연합할 것'이라고 나와 있었다.

법정에서도 '간첩단 왕재산'과 관련된 피의자의 육성 진술은 없었다. 변호인단은 증거물의 위법성 여부를 물고 늘어졌다. "수사기관이 증거물을 몰래 심어놓았다" "파일 내용은 뒤에 조작됐다"…. 파일 하나하나마다 검증 공방이 붙었다. "조작은 불가능하다"는 디지털 전문가와 압수수색 현장에 있었던 제3자도 불러야 했다. 해외에서 북한의 '225국'과 접선한 동영상에 대해서도 "해당국 사법당국의 허락을 받고 찍었느냐. 주권 침해를 한 것이 아니냐"고 따졌다.

간첩단 사건의 '내용'에 대해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단 한명의 참고인만 비공개로 "왕재산은 실체가 있다"고 진술했을 뿐이다. 당시 그는 평양으로 가 김일성에게 '접견 교시'를 받은 당사자였고, 그 뒤로 조직을 떠났다. 수사가 시작되자 변호인단은 그를 두 차례 만나 "혹시 수사관이 찾아오면 함구해달라"고 요구했다. 통화 내역에서 이런 접촉이 잡혔다. 두 달 뒤 수사관들이 그의 존재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 뒤로도 변호인단은 증거물을 붙잡고 있다. 이런 재판이 30회나 열렸다. 다음 달 이들의 구속기간이 끝난다.

간첩단 수사가 마치 인권이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처럼 돼버렸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해온 민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피의자들은 법적인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 우리 사회에서 '간첩 잡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이번 사건의 한 피의자는 면회 온 가족에게

"정권만 바뀌면 나온다. 장차 민주화운동 대상자로 보상받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 그렇게 될지 모른다.

이들 중 두 명은 이미 김대중 정부 시절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돼 각각 420만원, 14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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