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천재 최치원이 창건했다고 전해져, 행여 그의 말년 행적 찾을까...

▲ 통일신라의 천재 최치원.
통일신라 후기 진성여왕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최치원은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이 즉위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했다.

최치원(857∼?)은12살 때 당나라에 가서 18세 때 외국인을 상대로 한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일으킨 ‘황소의 난’ 때 도통사 고변을 대신하여 지은 격문, ‘격황소문’으로 일약 스타가 됐다.

최치원은 그리운 고국을 못잊어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마무리하고 28살에 귀국해서 병부시랑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그의 정치개혁안인 시무 10여조가 진성여왕에 의해 발탁 되었으나 진골이 장악한 신라의 계급에 막혀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말년에 이르러 결국 떠돌이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의 말년 행적은 경주의 남산, 합천의 매화산 청량사, 하동의 쌍계사 등을 즐겨 찾았다고 하며 부산의 해운대라는 지명도 그의 자(字) ‘해운(海雲)’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함께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이 후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한 사상가이자 당대 최고의 천재 최치원, 그의 말년 행적이 베일에 가려진 까닭에 정확한 사망 날짜가 확인되지 않고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결국에는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까지 생기기도 했다.

▲ 서동사 대웅전, 신라 진성여왕때 최치원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1870년 의철, 진일, 정기 세 스님이 다시 지었다. 이 후 1924년, 1945년, 1946년에 청학스님에 의해 다시 지어져 최초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 서동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본존불상은 석가모니불이며, 좌측불상은 약사여래불, 우측불상은 아미타불인 삼세불)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7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남 해남군 화원면 사동리 뒷산인 운거산에 이르면 이 산 아래 기슭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해남 대흥사 말사의 하나인 ‘서동사’가 자리한다.

그 규모가 아주 작은 대웅전(정조3년/1779년에 복원)과 종각,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만이 남아있는 절로 최근까지는 그 존재마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암자보다 작은 규모의 절, 서동사이다.

서동사가 최근 유명하게 된 것은 서동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본존불상은 석가모니불이며, 좌측불상은 약사여래불, 우측불상은 아미타불인 삼세불)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715호로 승격 지정되고 나서다.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서동사의 대부분 건물이 불탔으나 대웅전만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이는 칡덩굴 등이 대웅전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절에는 현재 칠나무로 만든 칡북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범종과 범종각이 대웅전 왼쪽 아래에 자리하고 있으나 현대에 와서 만든 것 이라고.
또한, 이 절에는 지름이 약 50cm 가량인 거대한 칡 나무로 만들어진 칡북이 오래 전부터 내려왔는데 이 북이 문화재적 가치를 가지면서 서동사에 관심이 쏠린 것이다.

이 보다도 더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서동사의 창건과 관련한 최치원의 흔적에 관한 것이다.

이 서동사의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80년 대웅전 보수 시 발견된 1870년 중수 때 기록인 ‘서동사중수상량문’과 대웅전 입구 현판기록을 볼 때 통일신라 진성여왕(887∼896)대에 887년 무렵 최치원이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으며 다만, 그 창건 시기가 전해진 바와 같다면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지방 관직에 있을 때로 추정되거나 알려진 대로 당나라로 오가는 길에 잠시 들렀던 것은 아닐까 정도가 된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유적와 유물은 조선시대 후기 것으로 대웅전, 종각, 요사채가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약간 경사진 지형을 3단으로 정지하고 두 번째 단에 대웅전과 요사를 배치했고 경내에는 석조와 용왕상이 있으며 예전에는 오층석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약탈당해 없어졌다고 한다.

또한 이 절에는 <상용권공문>이라는 책이 전한다. 책 끝부분에 1849년(현종)에 해당하는 연도가 적혀있어 (범자다라니경목판)보다 시기가 빠른 고서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관직을 그만두고 신라의 앞날을 예견한 그가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에 들어갔던 최치원이 말년에 경상도 경주를 시작으로 부산을 거치며 하동 그리고, 섬진강을 건너 두루두루, 결국 이 곳 해남 화원반도에 이르러 젊은 시절 자신이 창건한 이 곳 서동사에서 말년을 조용히 지낸 것으로 미뤄 짐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의 행적에 대해 그 어떤 기록도 없다는 데서 확실치 않은 이야기일 뿐, 그래서 더욱 구전과 전설이 만들어진 그의 말년과 죽음에 관한 관심이 더욱 커가는 것에 대한 역사적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어떻든 최치원의 이 서동사는 불행하게도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으나 대웅전만은 칡뿌리 등이 건물을 감싸고 있어 화를 면하였다고 하여 이후 갈천사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최치원의 말년 운둔생활을 행여 이곳 서동사에 찾고자 하지만 찾을 길 없다.

▲ 서동사 창건에 대한 안내판, 최치원이 창건 했다고 전해지고 대웅전의 중수 내용을 알 수 있다.
한편, 서동사 대웅전은 고종 7년(1870)에 새로 고쳐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맞배지붕이고 현재 절 아래쪽으로 일주문이 중수되어 그 규모를 확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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