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13대 133 명량대첩 승인의 한편에 어란 여인의 정보가 있었다"

10월1일 해남군문예회관에서 있었던 ‘어란 노래 음반 발표회’ 무대에 선 구순의 박승룡 옹(중앙)

 지난 10월 1일 18시 해남군문예회관에서 ‘어란 노래 음반 발표회’가 있었다. 이날 행사에는 ‘어란’을 세상에 내 놓으며 10여년을 ‘어란 여인’을 발굴하며 연구해 온 박승룡 옹도 함께 했다.

‘어란’ 노래는 정유재란 당시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의 13대 133 명량대첩의 승인의 한편에 어란포에 정박해 있던 일본군의 명량해로의 출정기일의 첩보를 임준영을 통해 순신 장군에게 전달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충기 ‘어란’ 여인을 기리는 노래로 이날 정의송 작곡가가 직접 불렀다.

해남 송지면에서 10년에 걸쳐 ‘어란’ 연구에 매달리고 있는 박승룡 옹(‘어란애’노래 작사)은 “‘어란’여인은 사와무라 하찌만다로(1898년 생으로 일제 강점기에 해남에서 약 25년간 순사를 지낸 인물로 한학자임)의 유고집에서 고니시 일본수군이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사유를 어란진에서의 간첩사건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옹에 따르면 지난 2007년 일본의 히로시마수도대학 히구마다게요시(日隈健壬)교수의 부탁을 받고 지인을 통해 임진왜란 때 해남에 일본인 포로수용소가 있다는 기록이 담긴 문헌을 일본에서 구해 준 적이 있었는데 그 책은 일본 ‘해남회’(일제시대 해남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의 모임)에서 발간한 사와무라 하찌만다로(澤村八幡太郞)의 유고집이었다.

그 유고집에는 놀랍게도 명량해전에 일본이 대패한 사유가 ‘어란’여인과 관련한 이순신 장군의 첩보전에 기인한 것으로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평문과 한시로 수록이 되어 있다고 박 옹은 맗했다.

박승룡 옹은 사와무라는 일본사람이고 당시 직업이 직업이어서 그 진위가 의심이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잡 기록에 의하여 그 책에 수록된 포로수용소 문제가 사실로 밝혀졌고 해서 ‘어란’의 이야기가 그저 날조한 것이라고 무시할 수 없어 현장인 어란 마을에 가서 현지를 답사하여 주민들의 증언을 들었더니 사와무라의 기록과 일치한 것을 알고 본격 ‘어란’연구에 돌입하게 된다.

‘어란’여인에 대한 연구와 관련 박 옹은 지난 2011년 본보에 기고한 글에서 “제가 방관해 버리면 영원이 감춰질 소중한 우리의 이 사실을 놓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한동안 고민도 하면서 역사에 무뢰한(無賴漢)인 이 사람이 고증 찾기에 나서보았다”며 “천만다행이도 ‘난중일기’에서 ‘왕조실록’에서 그리고 김 훈(金 薰)의 소설‘칼의 노래’에서 근사한 고증을 찾는데 성공하고 비로소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로 작심했다”고 밝혔다.

박 옹의 ‘어란’에 대한 연구는 ‘어란 자료집’을 발간하면서 본격적인 결과를 만들어갔으며 전남도의 후원으로 ‘어란’여인 뮤지컬을 두 차례 공연을 치렀으며 여러 차례 언론 보도와 방송 인터뷰, '시사르포'가 나가면서 세상의 관심을 받으면서 결국 해남군의 지원으로 <어란여인 이야기>의 비석도 세워졌다.

2011년 당시 목포대 강봉룡 교수는 도서문화연구원의 ‘어란 마을과 어란 이야기’란 주제의 ‘찾아가는 마을포럼’에서 “어란과 어란 이야기가 그 자체는 역사적 사실은 아닐지라도 사와무라가 ‘어란’이란 캐릭터를 만들어 내고 ‘어란 이야기’를 창작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이 사실을 재발견하고 그 원천소스를 알려서 다양한 문화콘덴츠로 표출될 수 있게 한 박승룡 선생의 열정적 활동 역시 엄연한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결국 실존한 사실만이 사실인 것이 아니라 거듭 새로 만들어지는 사실도 사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만큼 역사 인식의 폭은 확대될 수 있다”며 “사와무라는 ‘어란’을 문학화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 냈고 그 사실은 박승룡 선생의 재발견으로 역사화 되고, 재 문학화 되는 과정을 밟고 있는 셈으로, 알고 보면 역사도 문학인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어란애’

작사 박승룡, 김문규
작곡 정의송
노래 정의송

매봉에 초생달이 떠오른 밤이면
여낭터에 산새소리 고요히 우네

가슴속에 한가득 오직 내나라
님의 곧은 그 절개 어이 헛되리

파도치는 물결위에 고이고이 떠가라
청순한 님의 향기 천년만년 흘러 흘러라

갈매섬 저녁노을 붉게불든 밤이면
만호바다 격랑소리 메아리 치네

끊어오른 분노를 바다에 던진
님의 곧은 그 충정 어이 헛되리

넘실대는 물결위에 고이고이 떠가라
님을 향한 모종소리 온누리에 울려 퍼지네

(후렴)청순한 님의 향기 천년만년 흘러라.

위 글이 바로 ‘어란애’라는 정의송 작곡의 노랫말로 서두에 밝힌 바처럼 10월 1일 해남문예회관에서 발표했다. 박 옹은 이 가사를 쓰면서 “나는 무엇 때문에 ‘어란’여인에 매달려 90에 이르도록 어두운 밤길을 달려왔을까?”라며 “그것은 취미도 아니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명예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박 옹은 지금도 ‘어란’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멋진 스토리텔링으로 ‘명량대첩제’에 어란의 이야기가 추가되고 나아가 이 고장 어란 마을이 하루 빨리 관광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하면서 ‘호국 여인 어란 자료집’외에도 ‘비화 실록 菅 正陰과 어란’ 등 어란 관련 추가 책자를 발간을 계속하고 있다.

박 옹의 책 ‘전쟁과 휴머니즘’에서 ‘어란’의 추정부분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속에서 찾는다면 “[정유년 9월14일(맑음)]임준영이 육지를 탐지하고 달려와 보고하되 적선 200여 척중에 55척이 이미 어란을 앞바다에 들어 왔다하고, 이달 초 6일 달마산으로 도망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결박당해 왜선에 실렸는데 김해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 묵인 것을 풀어 주었고, 그날 밤 김해인이 김중걸의 귀에 대고 “조선 해군 10여척이 왜군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조선해군을 전부 몰살하고 경강으로 올라가겠다고 왜놈들이 말 하더란 것이다” 이 말이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을듯하여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 피난민들에게 곧 육지로 올라가라고 타이르도록 했다“라는 부분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선조실록[선조30년(1597년 1월27일)]에는 “그 때에 왜선안에서 여인을 얻어 사실을 탐지하고는 곧장 장계했다고 합니다”라는 부분이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첩보, 즉 사전에 적의 동태를 파악하며 이 정보를 바탕으로 전쟁을 대비하는 이른바 정보전에 능통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또, 김 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조선 여자 세명이서 적장 구르시마의 몸시중을 들었는데 한명은 해남에서 출항할 때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썼다. 여기서 한 여인을 박 옹은 ‘어란’이라고 말한다.

박 옹은 위 기록과 소설에서 등장하는 여인이 ‘어란’이라고 확신하고 그 외의 사실을 확인하고자 어란 마을에 있는 여낭터(여인이 투신한 자리), 동네 어부가 어란의 시신을 바닷가에 묻고 세운 석등롱, 매년 정월 초 하루 제를 모시고 있는 어란 당집 등을 찾아 고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박 옹의 어란 여인의 실존 주장은 “확인되지 않은 인물인 '어란'을 끌어들여 충무공의 전승을 폄하려는 또 하나의 역사 왜곡과 역사 부정이 아니냐”는 따가운 시선에 대해서는 명량대첩에 승리한 이순신 장군은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근거로 전쟁에 임한만큼 오히려 이순신의 높은 지략을 재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박 옹은 “이제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관심은 ‘어란’여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을 엮어 문화 콘텐츠화 하여 지역 관광의 소재로 삼느냐”라는 것이라며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한 ‘논개’, 적장의 목을 베게 한 후 자결했던 ‘계월향’은 사실의 역사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 적의 출정일을 알려주고 투신한 ‘어란’의 이야기는 “410여년 이라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그 여인의 현창을 위해 10여년의 세월을 바쳐 헌신했던 박 옹에게는 ‘어란애’의 노래가 기쁘면서도 슬프게만 들렸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나 애국지사를 발굴하고 선양하는 화서학회의 원로 재야사학자 이종립 선생은 지난해 2015년 ‘명량해전과 충기어란’이란 책자를 펴냈다. 이 책에서 이 선생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삼대 기녀는 평양의 계월향, 진주의 논개, 호남의 어란 이라고 한바있다. 이종립 선생은 2014년 4박5일 간 2차례에 걸쳐 해남 어란 마을을 찾아 어란의 흔적과 사료를 대조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또한 이에 앞서 지난 2015년 4월 11일 동강대학교 정두례 교수는 어란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해남과 송지, 어란 마을을 살릴 수 있는 좋은 관경을 목격했다”며 “‘어란’ 여인과 연계하여 얼마든지 스토리텔링을 살려 아름다운 관광자원화의 길이 있으며, 하나의 문화, 하나의 사적들이 얼마나 많은 경제적 이익으로 돌아오는지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이 큰 가치를 ‘어란’이라는 여인은 갖고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정 교수는 “‘어란’ 여인의 이야기가 팩트냐 아니냐는 문제되지 않는다”며 “심청이, 홍길동 등이 알마나 좋은 관광자원이 되었냐?, 없어도 만들어가는 것”이라며 자신도 기회가 주어지면 ‘어란’의 관광화에 일익을 담당하고 싶다고 밝힌바 있다.

 

석등롱에서 어란여인에 대한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박 옹.

박 옹은 “어란의 이야기는 이제 정설로 상당히 굳어져 갔다”고 말하고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 앞에서는 소신없는 부평초는 함께 흘러가기 마련이다’”며 “이제 저는 90의 나이로 힘이 없어 어려움이 뒤 따르기 때문에 새 사람들이 나와서 새 바람을 주입시켜야 하고 모든 애향 인들이 나서서 우리고장 해남 어란 마을을 명실상부한 역사의 명승지로 만들어 가는 게 소원이다”고 ‘어란’의 현창사업을 당부했다.

한편, ‘어란’ 노래 발표회가 끝난 뒤 박승룡은 “그렇지만...이제 마음이 오히려 가볍고 홀가분하다, 나는 이제 애증이 담긴 ‘어란’ 여인에 대한 작업은 여기까지”라고 말하고, “이제 이 공을 여러분에게 넘긴다”는 말로 그간의 굴곡에 대해 한참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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