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의 고택과 더불어 고가가 즐비한 마을 전체에 대한 문화 관광지화 필요성 '대두'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의 주인공, 공재 윤두서를 만나는 특별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해남지부 주최로 지난 9월 1일부터 오는 10월 5일까지 제9회 공재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본지가 지난 2011년 보도한 '[문화탐방]해남 백방포, 공재 윤두서 고택을 찾아서'를 다시 돌아다 본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 천재화가 공재 윤두서의 고택에서 그를 만나다.

고산 윤선도가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지었다는 공재 윤두서의 고택, ㄷ자형 안채 한쪽의 아름다운 모습.

해남 윤씨 공재 윤두서(1668∼1715), 그는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이며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외증조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화가다.

겸재 정선·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후기의 삼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를 대표하는 그림 ‘자화상’ 하나로도 그의 명성을 덮고 넘친다.

숙종19년(1693년) 진사시험에 합격했으나 당시 당쟁으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그는 특히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다.

해남윤씨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481호인 ‘해남윤씨가전고화첩’에는 그의 대표작품 ‘자화상’을 비롯 ‘채애도’·‘선차도’·‘백마도’등이 들어 있으며 이 화첩은 산수·산수인물·영모·화조·초충·도석인물·화훼도등 60여점의 소품으로 꾸며져 있다.

또한, 그의 또다른 걸작 ‘노승도’, ‘심득경초상’, ‘출렵도’, ‘우마도권’, ‘심산지록도’는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남인계열이었던 집안의 사정으로 당쟁에 막혀 벼슬로 가지 않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 보냈다.

곳간과 안채 사이로 좁은 통로가 있고 곳간 오른쪽에 돌계단을 앞에두고 사당이 있다. 사당앞에 핀 꽃이 건물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다.

주택 오른쪽에 위치한 공재의 사랑채 전경.

공재는 시·서·화는 물론 음악 공예 등 다방면에 능통했고 지리 천문 수학 등 폭넓은 학식을 지닌 실학자였다. 성호 이익(李益)은 공재의 제문(祭文)에서 자신의 형제가 공재로부터 박학다식한 면을 배웠고 그가 세상을 떠나 더 이상 배울 수 없는 아쉬움을 이야기했다는 데에서도 공재의 유식을 알 수 있다.

서울에 집을 두고 생활하던 윤두서는 46세 때 (1713년) 서울 생활을 버리고 해남으로 돌아왔고 2년 후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전남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이곳에는 공재 윤두서의 고택이 있다.

입구에서 바라본 공재의 고택 전경.
마을호관 옆에 위치한 모선당 모습.

이 고택은 공재 윤두서의 증조할아버지 고산 윤선도(1587∼1671)가 자신이 살기위해 지었으나 바닷가 바로 언덕위에 위치하여 백포만에서 밀려오는 바닷바람이 심해 결국 고산은 해남읍 연동으로 들어가고 훗날 서울서 귀향한 그의 증손인 공재, 곧 윤두서가 말년에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해남문화원 기록에 따르면 이 집은 안채 종도리 장여밑에 중수상량명문 '경술후백사십이년신미운운(庚戌後百四十二年辛未云云)'이 있는데 윤두서의 생존연간과 비교해보면 현종 11년(1670)에 지어 후에 윤두서가 살게 되었고, 순조 11년(1811)에 수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안채지붕의 회첨골 암막새에 적힌 명문 '동치십년신미구월중수(同治十年辛未九月重修)'를 근거로 할 경우 동치 10년은 1871년(순조 11) 신미(辛未)에 해당되므로 이 '신미'년이 안채 장여의 명문중의 '신미'년과 같은 해라면 현 건물의 건립연대는 윤두서의 사후(1715)인 1730년경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 고택의 위치는 뒤로 북쪽의 망매산을 주봉으로 하였고 앞으로 백포만 넓은 남쪽의 바다로 훤히 트이며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뚜렷한 그야말로 윤선도에 의한 풍수지리상의 명당터라고 할 수 있는 곳이라고 다들 입을 모은다.

윤두서 고택은 윤선도의 작품이며 윤선도의 집답게 그의 철학이 곳곳에 배어있는 듯했다.

문제의 폐가, 서당으로 쓰였다가 마을 공회당으로 사용했다는 이 건물은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지만 복원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공재 고택 바로 옆집은 크라운제과 창업주 고 윤태현 회장의 생가였다.

결국 이집은 윤선도의 작품이며 윤선도의 집답게 그의 철학이 곳곳에 배어있는 듯하다. 또한, 증손자 윤두서가 들어와 살면서 더욱 유서 깊은 전통주택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기법이 잘 남아있다고 한다.

역시 해남문화원의 기록에 의하면, 건립당시 이 집은 전체 48칸 규모였다고 전하나 지금은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지고 안채 13칸, 곳간채 3칸과 안채 오른쪽으로 사당과 헛간 등이 남아 있는데 ㄷ자형의 안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고, 동쪽 광의 남측지붕은 앞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우진각지붕이다.

정면에서 바라본 집의 형태는 해풍을 피하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었으며, 벽은 방의 용도에 따라 회벽과 판자벽으로 되어있다. “이는 조선 후기인 1700년대의 건축수법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평면구성, 두리기둥과 구부러진 퇴보나 대들보의 견실한 결구등이 특이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택을 정면에서 바라다보면 안채와 곳간 사이로 400여년 전 윤선도가 집을 짓고 윤두서가 이 집 안채의 한가운데 쌍여닫이 정자살문이 있는 대청에 앉아 그림을 그렸던 당시의 모습을 저절로 떠올리게 한다.

공재 고택 오른쪽으로, 사당 뒷편으로 그의 무덤이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450년이라는 해송이 백방포 전체를 내려다 보고 있다. 마을 전체에 걸쳐 해남 윤씨 일가들의 기와집 10여세대가 더 있다. 공재 고택 사당 뒤편으로 크라운제과 창업주인 고(故) 윤태현 회장의 생가가 있고 그 생가 앞에는 이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또, 윤회장의 생가 터 우측으로, 즉 공재 고택 오른쪽에 있는 사당 뒤편으로 지금은 간척으로 바다가 멀어졌지만 백방포만을 바라보는 공재 윤두서의 묘가 자리하고 있으며 비문에는 진사시험에 합격한 이 후 생에 대해 자세하게 씌어져 있다.

서당으로 짐작되는 폐가는 공회당으로 썼다고 하나 손끝으로 건들어도 쓰러질 것 같아 안타까웠다.

공재 고택에서 내려다본 백방포, 지금은 간척으로 인해 바다가 멀리 보인다.
신방리에서 공재 고택이 있는 백포리로 가는 옛길 옆으로 국내 최대 연방죽인 신방저수지의모습.

윤두서 묘지 입구 아래로는 다 쓰러져 가는 한 채의 집이 나오는데 당시는 서당으로 썼음직한 이 건물은 그야말로 폐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고, 이 건물에 대해 촌로에게 물으니 예전에 마을회관이 생기기 전에 공회당으로 썼다고 한다.

건물의 모양이나 석가래, 기둥의 형태로 보아서 윤두서 고택과 거의 맞먹는 아름다운 모습이며 이 공회당에서 글 읽는 아동들의 목소리와 훈장으로 버티고 있는 윤두서의 모습,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촌로들의 모습이 다가오는 듯했다.

마을 입구 마을 회관 바로 우측으로 윤두서의 해남윤씨 후손들이 재실로 쓰였다는 윤두서의 모선당 건물이 있다. 모선당 오른쪽으로 돌아가 보면 지붕이 내려앉은 것을 막기 위해 막대를 덧붙여 석가래를 받치고 있어 개보수가 급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고담 삼거리를 지나 신방리에 접어드러 백포리로 넘어가는 옛길, 그 옛길은 신방리 끝자락에서 공재 윤두서 고택을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가면 좁았다가 넓어졌다하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가게 되는데 왼쪽으로 국내 최대의 연방죽인 신방저수지를 끼게 된다.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 이들은 이 곳 백방포와 해남 연동을 수없이 왕래 하였을 것.

신방저수지에서 백포리 가는 옛길의 복원과 함께 백포리 전체에 대한 윤선도와 윤두서의 스토리텔링이 엮이는 문화관광지로의 복원이 아쉽다.

고산 윤선도는 물론, 이 길을 따라 천재 화가 공재 윤두서 또한, 현산 만안리를 거쳐 연동까지 수없는 발길을 옮겼으리라 짐작이 간다.

해남 현산의 백포리, 윤두서의 고택과 즐비한 고가들, 분명 이제는 사유물을 떠나 해남의 향토문화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훌륭한 관광지가 될 수 있다는 것에서 이 마을의 복원이 아쉽다는 것은 한번쯤 와본 사람이면 누구나가 느낄 것이다.

신방리 저수지를 지나 백포리로 가는 잔등에 앉아 있으면 꼭 한번은 긴 수염 얼굴의 도포자락 휘날리는 누군가를 만날 것 같은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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