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비극-

3부에서 살펴본, 지역혐오감과 차별에 대한 역사성이 거의 유전적이며 진화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황윤석 이후 나타난 고매한 학자 성호 이익마저 그런 평을 했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은 서적과 구전(口傳)을 통해 얻어들은 것들이 악의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호 이익이 전라도에 대한 악평을 쓴 근거를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주장이라면, 성호 이익이 전라도 사람 누군가를 만나서,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를 주장의 근거로 제시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익 선생은 그 근거를 대지 못했다. 그러니 누구한테 얻어들은 풍월을 기록한 것이다. 옛사람들은 선조(先祖)들의 기록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싶다. 어린 시절 필자(筆者)의 경험으로 전라도 사람 한번 만나 보지 않은 사람들이 욕을 하는 경우를 많이도 보았었다.

그리하여 지역혐오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전라도 사람이라면 모두 박멸시켜야 할 사람들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악의는 직접 체험이 아니라, 전설의 고향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口傳) 속에서 더해지고 입혀진 오해들로 발생된 것이었다.

따라서 전라도 사람이라면, 이 지경에 이르러 누군들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겠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영조 대에 호남인들의 이주정책도 그런 차별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일이다. 지금 울릉도 인구 중 영조시대 이주해온 전라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오죽하면 독도도 전라도 방언(전라도는 돌을 ‘독’이라 함. 그래서 전라도 이주민들이 독도를 독섬이라 불렀고, 후일 한문 표기를 위해 섬을 ‘섬 도(島)’자로 바꾼 것임)에서 나왔을 것인가.

그러나 조선말에 이르러 전라도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1589년 정여립의 난 이후 250여년이 흘러갈 때까지, 호남선비들은 등용에 제한을 받았으니 위로는 출세길이 막히고, 아래로는 부패한 관리들에게 뜯어 먹히는 신세가 되었다. 호남의 곡창지대로 뇌물을 바쳐가며 자리를 차고 들어온 관리들은 말 그대로 탐관오리들이었다.

학정(虐政)과 수탈이 얼마나 극심하였는지, 정약용은 유배지 전남 강진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애절양(哀絶陽)

노전에서 젊은 부인 울음소리 길고 긴데 /관청 문을 향해 울부짖다 하늘 향해 부르짓네
남편이 출정 나가 돌아오지 않음은 오히려 있을 수 있지만
예로부터 남자가 스스로 생식기를 잘랐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소
시아버지 돌아가 이미 상복을 입었고 갓난 아이는 아직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삼대 이름이 군적에 올랐다네
짧은 언변으로 하소연하러갔더니 범같은 문지기 버티고 있고
이정이 호통치며 마굿간에서 소마저 끌고 갔지요
칼을 갈아 방에 들어가자 피가 자리에 흥건한데
아이를 낳아 이런 재난을 당한다고 스스로 한탄하더이다
- 하략 -

이재(李齋) 황윤석의 집안도 무려 5백석을 거두는 부농(富農)이었다. 그때는 농업기술과 수리시설이 등이 낙후하여 쌀 수확량이 200평 한 마지기에 한 가마 정도였으니, 500석지기 부농이란 논을 약 10만평을 갖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일기를 보면, 보릿고개에 이르러 황윤석은 집안의 식량을 걱정하고 있었다. 훗날 동학혁명의 발단이 된 조병갑 고부 군수 같은 이들의 수탈이 없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전라도인들의 참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다. 1894년 고종31년에 일어난 동학혁명은 탐관오리의 착취와 동학교도 탄압 및 외세(外勢)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그리고 군주(君主)와 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보인 농민혁명이었다. 보국 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며 나라를 보위하고 백성을 폭정으로부터 구하여 편안하게 하던 동학농민군은 일본의 침탈과 외국 세력의 내정간섭에 대한 정체를 파악하고, 드디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제창한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의로운 깃발과 목소리는 일본군에 의해 짓밟히고, 전라도는 일본군과 관군의 동학교도 색출을 위해 무자비하게 자행되었던, 살인과 방화로 초토화된다.

그렇게 수탈당하고, 벼슬길마저 막혀 한이 깊은 백성들이었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 1차 봉기를 접었고, 이어 일본과 외국세력에 의해 나라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자, 다시 창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전쟁터로 나아갔던 것이다. 공주 우금치의 전투에서 피를 뿌리며 죽어갔던 흰옷 입은 우리 전라도 백성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선다.

그러나 비극은 뒤를 잇는다. 나라가 망하고 일제강점시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은 호남평야의 기름진 쌀을 수탈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필두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땅을 빼앗아갔고, 그리하여 호남인들은 땅을 빼앗기고 일본인들의 소작인으로 전락하였다. 결국 수탈을 견디지 못한 전라도 사람들은 만주로 간도로 건너갔다.

그러나 전라도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해방 후, 제주 4.3 폭동 진압을 거부하는 14연대 좌익 군인들과 지방 좌익들이 일으킨 여순반란사건은 호남 지역에 ‘빨갱이 고장’이라는 오명(汚名)을 하나 덧씌운다. 그러니까 사기꾼 반역자들이 사는 고장이라는 전통적인 지역혐오 현상에다 이제는 ‘빨갱이 고장’이라는 붉은 색깔까지 덧칠해진 것이다.

당시 여순 반란군과 이에 합세한 지역빨치산들은 토벌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이후 약 2년 동안 야산대, 구(舊)빨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고. 이들이 오랫동안 군경과 대립하여 죽고 죽이는 참상을 일으켰고, 이 묵은 원한이 수많은 빨치산 동조자를 양산하였다. 또한 땅을 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공산당에 가입한 소작인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그리하여 전라도는 한 많은 ‘빨갱이 지역’이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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