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비판의 역사-

이지양의 논문을 빌려 1764년 5월 20일자 일기를 보면, 이 날 황윤석은 서울 선비 김원행과 만났는데, 김원행이 영호남을 비교하는 일화가 실려 있다. 김원행은 황윤석에게 박찬혁이란 선비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바탕이 돈실하니 영남 사람인 듯하다. 장래에 큰 일이 있으면 그것을 해낼 듯하다. 호남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속임수가 많다고들 하는데, 나는 군과 홍생 이외는 어떤지 알지 못하겠다.」

바탕이 돈실하여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곧 영남 사람이라는 당시의 세평이었다. 반대로 전라도는 ‘속임이 많다’라고 하여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믿을 수 없고 뒤통수 친다는 전라도에 대한 평판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평가 속에서 전라도는 당시 조선에서 완전히 내버려진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전라도에 대한 품평이 이어진다.

대체적으로 전라도는 사박(詐薄), 즉 속이고 경박하다는 것이 온 세상의 평가였다. 이는 완전히 반대의 기질을 가진 영남인과 특별히 비교되었다. 경상도는 질각근중(質慤謹重), 즉 진실하고 순박하며 무게가 있는 사람들이라 하여 최고의 호평을 받았지만 전라도는 부박하며 사박함, 즉 경박하고 속임이 많다는 악평을 듣고 있었다.

속임이 많다는 전라도에 대한 이야기는 그 후에 나타난 여러 자료를 보더라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황윤석 역시 전라도에 부박하고 분열된 기풍이 있음을 인정한다. 또한 전라도에 잡술류가 많다는 말도 일기에 등장한다.

그러나 사박하다는 말과 잡술류가 많다는 말은 전라도인의 문화에 대한 오해이다. 하긴 당시 엄격한 선비의 눈에는 판소리를 즐기고 창(唱)을 즐기는 전라도인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잡술류란 흥이 나면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흥 많은 전라도인에 대한 뻣뻣한 선비의 비판적 시각이었고, 이 모든 모습은 경박(輕薄)하고 사박(詐薄)함, 그런 것이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의 기록도 완전히 악의적인 기록을 남긴다. 성호 이익은 전라도에 대해,
「사람들은 방술(方術 방사 술법)을 좋아하고 과사(夸詐 큰소리치고 남을 속이는 것)를 잘한다」면서
「풍속이 사나워서 나그네가 잠자리를 얻을 수 없는데, 전주가 가장 심하고, 기질(氣質)이 나약해서 추위와 주림을 참지 못하는 것은 도내(道內)가 모두 마찬가지다」고 하였다. 근엄한 실학자 이익마저 이 지경이었으니, 일반인의 평가는 어떠했으리.

더 이해를 돕기 위해 1955년10월 22일자 중앙대 학보에 실린, 어느 전라도 출신 유학생의 글을 보자.
「나는 전형적인 전라도인이다. 정저지와(井底之蛙)란 말이 있듯이 전라도 내에서만 파묻혀 있으면 틀에 박힌 견문에 발전성이 없을 것 같기에 수륙천리의 길을 더듬어 양반님네들이 살고 계신 서울까지 더좀 배워보겠다고 찾아왔으나, 과연 양반들의 틈에 끼어 전라도인이 살기란 아주 힘이 들다.」고 고백한다.

이어 이 유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맞춤법이 무시된 원문 그대로 적음).
「 2,3일 전에도 S선생님이 소개로 서울 양반과 인사 한 적이 있다. 그는 인사가 끝나자 내가 전라도인임을 듯고서 몸을 움짓하더니 나에게 준 첫 말씀이, 자기는 그렇지 않은데 서울사람들은 어쩐 일인지 전라도인이라면 아주 질색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며 이 전라도 학생은 서울사람에 대해 한편으로는 분개하고, 한편으로는 차별적 시선에 매우 고통스러워 한다. 1955년이라면 6.25 남침전쟁이 끝난 지 불과 2년 후의 일이다. 그 폐허 속에서도 망국적인 지역감정은 존재했던 것이다.

그 무렵 유행했던,‘하와이 근성 시비’의 일부를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참고: 전라도를 하와이에 비유했음. 아마 하와이 사람들이 미국에 점령당하고 난 뒤, 전라도와 같은 핍박을 받은 것을 비유한 것으로 사료됨)

「전라도 개땅쇠는 간휼과 배신의 표상... 전라도놈은 송충이나 그 이하의 해충... 전라도 사람은 신용이 없고 의리가 없으며 잔꾀가 많아 깊이 사귈 수 없다. 사회 각층에서 말썽을 일으킨 부류는 모두 전라도 사람이 대부분이며, 군대에서 탈영한 군인도 이곳 출신이 거의 차지하고 있다.」
「거지나 깡패, 소매치기 등도 전라도 사람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깊이 사귀는 사이에도 이해관계가 얽히면 헌신짝처럼 차버리는 것이 그들의 생리이며... 뒤통수에 대고 욕설을 퍼붓거나 모략을 하는 데도 앞장서는 간사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며 악의적인 품평을 아끼지 않고 있다.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지경이니, 전라도 사람들이 어디 가서 고향을 밝히고 살았겠는가?

강준만 교수가 쓴 ‘전라도 죽이기’ (개마고원, 1995) 엔 이런 상황을 경험한 어느 전라도 청년의 글이 실려 있다. ‘대한민국을 위해 죽을 수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이 글은 당시 전라도인의 감정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교수님께서는 양심적인 언론과 지식인, 국민들이 나서면 지역차별 감정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해소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제가 겪은 바로는 해결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역차별 감정이 골이 깊으며 전라도 대 경상도의 문제가 아니라 호남 대 비호남이 대결로 되어있으며, 이 양쪽은 같은 민족 같은 국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 매체, 사람들을 통해서 순간순간 절감하고 확인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일본놈들보다도 전라도놈들이 더 밉고 싫으며 전라도 사람들은 악(惡) 자체라고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란 사실입니다. (중략)
저는 대한민국을 위해 죽을 수 없습니다. 어떤 놈들 좋은 일 시키라고요! 하지만 우리 전라도 독립투쟁을 위해서라면 앞으로 기꺼이 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이 개 같은 대한민국에 살면서 우리와 같은 차별과 모욕, 한 같은 것은 남겨줄 수 없으니까요.」

이런 상황이었으니, 전라도 차별이 망국적인 현상이 아니었겠는가? 필자(筆者) 역시 이런 전라도 차별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위의 전라도 청년과 같은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 살펴본 결과, 호남차별과 지역감정이 경상도 사람들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은 오해임이 밝혀졌을 것이다. 다만 현대 산업화 이후 호남지역에 대한 차별과 박대가 심화될 때, 그때 당시 집권세력이 영남정권이었기에 생성된 오해일 뿐이다. 그만큼 호남인에 대한 비하(卑下)의식은 오래된 역사를 지닌다.

저작권자 © 데일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