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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해남 박승룡, "어란은 확실하고 분명한 실존 인물"나는 무엇 때문에 ‘어란’여인에 메달려 80의 중반에 이르도록 4년 반 동안이나 우직하게 외로이 어두운 밤길을 달려왔을까?

   
▲ "어란’여인이란 두 글자는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에도 없다. 그러나 김해인 ‘어란’은 확실하고 분명한 실존 인물이었다."는 박승룡 옹.
지금으로부터 4년전 저와 안면이 있는 일본의 히로시마수도대학 히구마다게요시(日隈健壬)교수의 부탁을 받고 임진왜란때 해남에 일본인 포로수용소가 있다는 기록이 담긴 문헌을 일본에서 구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 문헌이 일본 해남회에서 발간한 사와무라 하찌만다로(澤村八幡太郞)의 유고집입니다.
그 유고집을 읽다보니 놀랍게도 명량해전에 일본이 대패한 사유가 ‘어란’여인의 첩보전에 기인한 것으로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평문과 한시로 수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와무라는 우리말에 능통하며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연구하고 한시에는 일가견을 갖는 한학자에 많은 저서를 남긴 분이며 해남에서 19년 동안이나 공직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잡기록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가 일본사람이고 직업이 직업이어서 그 진위가 의심이 안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잡기록에 의하여 포로수용소 문제가 사실로 인정된 이상 그져 날조한 것이라고 무시할 수 없어 현장인 어란 마을에 가서 현지를 답사하여 주민들의 증언을 들었더니 사와무라 옹의 기록과 한 치의 차도 없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제가 방관해 버리면 영원이 감춰질 소중한 우리의 이 사실을 놓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한동안 고민도 하면서 역사에 무뢰한(無賴漢)인 이 사람이 고증 찾기에 나서보았습니다. 천만다행이도 【난중일기】에서 【왕조실록】에서 그리고 김 훈(金 薰)의 【칼의 노래】에서 근사한 고증을 찾는데 성공하고 비로소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로 작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언론, 특히 저명한 인터넷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자, 당시의 해남군수 권한대행께서 우리 후대를 위해 이것을 책으로 엮어달라는 청을 받았었습니다. 그 후 뒤늦게 전라남도가 알게 되어 도비로 제가 편저한 【어란 자료집】을 발간해 주고 또 많은 비용을 들여 뮤지컬을 두차례나 공연해 주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본인 교수들과 일본인 학생과 KBS MBC 보도진과 신문기자와 이웃 향토사학자들을 초청하여 유적 답사 행사도 베풀고, 명량대첩 축하 행사 때 많은 만장을 만들고 이순신 장군과 ‘어란’여인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학생150명과 주민들을 동원하여 해군 군악대와 시가행진도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과 제휴해서 【어란 자료집】 日語 번역본을 만들어 일본에 배포하고 도서관에까지 비치한 한 힘겨운 노력을 했습니다마는 시골 노인의 무력함에 몇 번이고 좌절도 했답니다.
제가 ‘어란’여인을 발굴한지 어언 4년반, 발상지 해남군은 아직까지도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못해 안타갑기만 합니다.

내가 어려웁고 벽에 부디칠 때마다 간절히 요구되는 것은 學界와 언론의 뒷받침이었습니다. 학계에서의 인정이 필요했습니다.

‘어란’여인이란 두 글자는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김해인 ‘어란’은 확실하고 분명한 실존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란 마을의 현지를 답사하게 되면 과연 그렇구나! 라는 탄성이 나온다는 말을 덧붙치고 싶습니다.
 

약 한달전 서울에서 국제라이온스 협회 某지구 국제관계 위원장과 일본의 某 라이온스 유력한 회원간의 만남에서 이 ‘어란’여인을 양국에 전파하여 한·일 친선을 도모하자는 진지한 자리를 가진 것으로 알고 있으며 또 某 인터넷 신문에서는 ‘어란’여인을 소개할 수 있는 수만명의 독자를 확보해 놓았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어란’여인의 소설이 등장하게 되어있습니다.

역사란 무엇이며 역사가의 임무란 어떤 것일까?

일인 사와무라가 말하는 국가와 개인사 사이에 고민하던 ‘어란’이라는 한 인간의 고뇌의 교차, 전쟁과 식민이라는 거대 담론에 반하는 개인적인 이 휴머니즘을 곱게 받아들여 이 자리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의미심장하게 풀어 갈 것인가를 마지막 결론을 도출 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몇 년전 해남군에서는 일차 간담회도 갖고 작년에 명지대학에 용역을 맡긴 것을 바탕으로 이번에 향토보호위 유적심의회에서 ‘어란’여인은 스토리텔링으로 관광자원화 하기로 하고, 어란당제는 향토 유적으로 지정, 금년 5월 27일자로 고시 했습니다.

   
▲ '어란'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지금 현실이 '역사'라는 것, 방송국 인터뷰중인 박승룡 옹.
고명하신 여러 교수님들의 선처를 바라면서,
오늘은 7월 1일, 명량해전의 하잘 것 없는 한 민초 ‘어란’이 호국의 여인으로 승화하고 나아가 아름다운 인간 사랑의 훌륭한 문화관광 자원으로 육성해 주는 뜻 깊은 자리가 되었으면 하면서 사족으로 몇마디 덧붙칠까합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어란’여인에 메달려 80의 중반에 이르도록 4년 반 동안이나 우직하게 외로이 어두운 밤길을 달려왔을까? 내가 썼다가 버리고 또 쓴 서류 봉투가 아마도 찝차로 가득 싣고도 모자랄 것이다. 일본으로는 월 평균 20회의 전화 통화에 하루 한 두차례의 메일이 일어로 왕래한다. 일을 하는데에는 돈이 들기 마련인데 무직인 나에게는 수입이 없다.

이것, 취미도 아니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더욱히 명예를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 무엇이란 말이냐? 그것은 ‘어란’여인에 대한 나의 믿음이요, 반성과 관용 정신의 제고, 나아가 평화를 희구하는 나의 갈망을 작은 힘이나마 한 일 양국에 널리 알리고자하는 “나도 모르는 무아의 행군”이였지 싶다.

‘어란’여인는 나라에 충성을 다했지만 인간적인 자책으로 바다에 투신했다는 사와무라 옹의 이야기에 대한 믿음이다. 사와무라는 전쟁에 임하는 일본 왜장의 치부를 솔직히 들어냈다. 일본 순사로서 하기 힘든 발언이다.

나는 사와무라의 딸 시마구라 미찌고 (島倉 郁子)에게 전화를 하여 이 말을 확인 해 보았다. 사실 여부는 자기로서는 환인해 줄순 없지만 평소에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해 왔기에 자기가 이 기록을 갖다가 일본 해남회에 출간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는 답을 들었다.

나는 진도의 왜덕산을 찾는 적이 있다.

명량해전 때 전사한 왜장 구루시마 마찌후사(來島通總)의 후예들과 함께하는 자리며 조선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헝크러진 풀밭에 명량해전 때 희생되어 떠 밀려온 일인 병사의 무덤을 찾는 것이였다. 나는 일행을 제치고 맨먼저 신발을 벗고 예를 올렸다.

모든 감정을 초월한 인간애의 발로였는지? 나도 모르지만.... 훗날 일인들은 나에게 많이 배웠노라고 편지를 보내 참회하고 반성해 주었다.

나는 왜장 칸 마사가게(菅 正陰)의 직계 후예 두 분을 찾아냈다. 한분은 언론계 출신인 칸 히로시(菅 宏)로 글을 잘 쓰며 수시로 나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

처음엔 조상의 부적절한 행위를 언급하는 것을 그 자손으로 당치 않다고 거절했지만 나중에는 “사실은 사실이니” 하고 자기의 홈페이지를 통해 대대적으로 ‘어란’의이야기를 소개해주었다. 또 한 분은 동경에 사는 50대 구마시로 히사시(神代久司)로 해남에 많이 오고싶어한다.

또 일본에서 많은 자로를 제공해 준 히구마다개요시(日隈健壬) 교수는 그 교수 정년 퇴직 논문으로 ‘어란’의이야기와 왜덕산 이야기를 나와의 협의 하에 192쪽을 제작하여 나에게 보내어 나는 그 책명을 두 사람의 발차취를 남기었다해서 족적(足跡)이라 명명 해 놓았다.

또 일본의 다나배 시(田辺 市)에서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시의회 의원과 유네스코 회원들간의 합동간담회을 열어 어란 자료집에 대한 번역본을 놓고 두 차례의 간담회를 갖아, 그에 대한 소감을 네 사람이 보내준 적이 있다.
“멀기만 했던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달리하게 됐으며 한국에 가게되면 꼭 어란 마을과 왜덕산을 가보고 싶다”라고 피력해 놓았다
.
또 향토 사학가 시가 가쓰노리(志賀勝則)는 【호국 여인 어란 자료집】을 【비화 실록 菅 正陰과 어란】이라는 제목으로 일어 번역본을 만들어 일본에 배포하고 매일처럼 인터넷과 통화로 깊은 신의를 가지고 끊임 없는 연락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어란’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한일 양국에 파급된 멋진 스토리텔링으로 발전하고 있다.

반성과 관용 그리고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의 소원과 황페한 전쟁속에서도 인간 본연의 보편적 휴머니즘이 소설로 영상화로 꾸며지고 제작 되어 한일 양국에 다 같이 받아 들여 우호 증진에 이바지 했으면 한다.

그리하여 명량대첩제에 어란의 이야기가 삽입되고 나아가 이 고장 어란 마을이 하루 빨리 관광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하면서 두서없는 제 말을 그칠까합니다..
 

손은수 기자  dmstn0467@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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