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청암대 사태를 영화로 제작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여기저기서 반응이 나온다. 일부에선 아직 사건이 진행중인데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부터 또다른 쪽에선 벌써부터 관심을 갖고 여러 얘기가 오간다.

筆者는 사실 지난해 초 이 사건을 처음 접하면서 그때그때 상황에 대해 나름의 소회를 기사와 여러 다른 형태로 기록을 해놨다.

기회되면 나중에 책으로 엮을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월 청암대 여교수로부터 억울한 사연을 접한 필자가 이 사건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청암대가 느닷없이 필자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가하면서 시작됐다.  

언론은 어느 한쪽 말만 듣고 쓸 수 없기 때문에 제보한 측은 물론이고, 제보한 측과 반대입장에 서 있던 청암대 강 총장의 입장을 듣길 원했지만, 강 총장 측에서 인터뷰 자체를 거부한 탓에 반론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던 차에 인터뷰 대신 느닷없이 법적소송으로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한쪽 말의 진위(眞僞)를 가려내기 위해선 여러 집요한 취재과정이 필요했다. 때론 내 자신을 속여가면서까지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숨죽이는 여러 상황이 있었다. 한때 女교수와 뜻을 같이했던 동료교수와 제자들의 배신이 속출했다. 학교매각 대금 10억원의 행방을 둘러싼 배신행위는 가관이다. 아니 코메디에 가깝다.

물론 사건의 당사자들은 서로 배신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솔직히 누가 누굴 배신했는지는 검찰조사 외엔 알길이 없지만, 조만간 검찰수사의 최종 결론이 내려질 것으로 기대한다.

'배신(背信)'의 사전적 의미는 신의(信義)와 의리(義理)를 져버린 행동을 뜻한다.

흔히 자기들만의 사적이익을 위해 음모를 꾸미고 은밀한 불법행위를 숨겨주는 것을 마치 의리로 여기고, 이를 외부에 폭로하는 것을 배신으로 착각하지만, 의리와 배신은 정의와 진실을 핵심가치에 두고 설정 해야 맞는 용어다.

즉, 배신은 당사자간 사적이익보다는 사회공익을 위한 정의롭고 올바른 일에 대한 도모(圖謀)를 전제한 개념이다.

신의와 의리는 합법적이고 공익적 차원의 보편타당한 사회규범을 전제로 한 서로간의 동맹(同盟)이어야 한다.

공익(公益)을 위해 내부비리를 고발한 자를 '배신자(背信者)'라 부르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적관계로 보자면 내부고발자는 해당 조직이나 단체의 배신자이지만, 공익을 위해 내부비리를 과감히 고발한 자를 우리는 반대로 "용기있는 내부고발자"라 부른다.

하지만, 청암대 사건에 등장한 여러 인물들의 배신행위는 공익과는 별반 무관하고 사건의 실체적 진실(眞實)과 정의(正義)와는 아랑곳없이 '내편이면 동지(同志)고 네편이면 배신자' 인 패거리 문화의 전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지탄받아 마땅하다.

사실 청암대 사건의 본질은 '배신'이다. 영화 소재가 되는 이유도 배신과 배신을 반복하는 반전(反轉) 때문이다.

특히 강제추행 사건을 둘러싸고 등장한 여러 인물들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군상들은 영화의 백미(白眉)일 것이다.

배신은 서로에 대한 불신(不信)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서로가 배신했다고 주장한다.

같이 도둑질 할땐 내 편이고 동지였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서로 배신자로 몰아세운다.

배신은 또다른 배신을 낳은 법.

영화 시나리오에선, 2012년 전남도경의 총장수사 사건 이후 그때그때마다 자기들 이익을 위해 뭉쳤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는 배신과 이합집산(離合集散)의 과정에서 기득권에 취한 지방사립 전문대 교수들 패거리 문화의 단면이 여실히 보여질 것이다.

알량한 지방 사립전문대 교수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간의 동료나 사제관계를 헌신짝처럼 버린 인간들의 다양한 군상(群像)도 조목조목 드러날 것이다.

지방사립대 교수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아양과 돈, 심지어 성상납까지 마다하지 않은 추태까지 가미된다.

지금도 배신이 진행중인 청암대 사건.

"한번 배신한 자는 또다시 배신하고, 그 배신의 끝은 파멸이다"

배신에 관한 '불멸(不滅)의 진리(眞理)'가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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