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 팔마체육관 부지위에 세워진 여순사건 위령탑 중앙에 새겨진 당시 추모비

박근혜 대통령이 내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놓고 좌우진영이 확연하게 각을 세우고 있다.

31일에는 서울도심 한복판에서 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세싸움이 벌어지는 공방전으로 치닫고 있다.

한쪽에선 역사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한쪽에선 우리자식들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역사관을 가르쳐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언듯 둘 다 맞는 말 같은데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올바른 주장일까?

노무현 정권 당시인 지난 2005년 순천 팔마체육관에 세워진 여순사건 위령탑과 안내판에 새겨진 비문을 둘러싸고 전남 순천에서 벌어진 일련의 역사왜곡 논란에서 그 정답의 실마리를 찾을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전남 여수 순천은 지난 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 이란 오명(汚名)의 역사를 뒤집어 쓴 채 살고 있는 지역이다.

한때는 ‘반란’ 이란 용어가 혐의스러워 ‘여순사건’ 이란 명칭으로 그 치부를 가리기도 했지만 나이든 분들에겐 여전히 '반란사건'이란 용어로 통칭된다.

이곳에 지난 2005년 순천시의 예산을 지원받은 이른바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지고 순천역 등 10여곳에 여순사건 안내판이 세워지는가 하면 순천시 주요 도로 곳곳에 위령탑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세워졌다.

당초 여수14연대 반란군이나 진압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민간인을 추모하기 위한 차원에서 시작된 이 사업이 누군가에 의해 여수14연대 반란군을 추모하고 그들을 옹호하는 역사왜곡의 현장으로 변질된 것이다.

말하자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을 ‘성역화’ 하는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2009년 철거전까지 순천시민단체가 순천역 앞에 세운 여순사건 안내판. 반란군을 봉기군으로 경찰을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기술했다.

다음은 당시 순천역 앞에 서있는 여순반란 사건 안내판 내용 전문(全文)이다.

순천역은 여수의 봉기군이 인근 지역으로 진출한 첫 번째 지역이었다. 통근 열차와 차량에 나누어 탄 1천여 명의 봉기군은 1948년 10월 20일 09시 30분 경 수천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는 중대 병력의 합류로 더욱 사기가 올라 광양 삼거리와 동천 제방에 배치된 경찰을 잇달아 물리치고 시내로 진격하였다. 따라서 순천역은 여순 사건 봉기군의 확산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며 순천역 공격의 중요 거점이었다. 현재의 역 건물은 1960년에 세워진 것이므로 여순사건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장소는 그대로이다.<여순사건 관련지 - 순천역>

반란군을 봉기군으로 표현한 순천역 앞 ´여순사건 관련안내판´ 본지의 보도로 지금은 철거되고 없지만 수년간 순천역을 오가는 수많은 관람객과 학생들에게 14연대 반란군의 실상을 왜곡시켰던 전형적인 역사왜곡 현장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위 내용엔 참으로 반민족적이며 반국가적인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반란군을 ‘봉기군’으로 표현한 회수가 무려 3회, 그리고 반란군의 반국가적인 순천 점령을 ‘진출’로 표현하고 있다. 경찰을 물리친 것을 자랑스럽게 표현 대목도 있다. 홍순석의 합류로 사기가 올랐다는 것도 역시 반란군에 대한 동지(同志) 의식이 반영된 표현이다. 더구나 ‘반란’이란 말을 빼고 ‘여순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도 좌시할 수 없다. 반란이 아니라는 좌익들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난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안내판 내용은 좌익들의 시각을 그대로 쓴 것이며, 순천시는 이에 동조하여 예산을 주어 안내판을 세우도록 협조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순천역 광장 여순사건 미화 안내판과 순천시 여순사건 위령탑에 이어 2009년 당시 순천지역 고등학교 교지에도 좌편향된 ´여순사건´ 관련 안내판이 여과없이 그대로 노출된 채 특집기사 형태로 실려 지역에서 논란이 일었다.

순천고등학교를 비롯한 순천관내 고등학교들이 중심이 된 < 해아료-ㅁ > 이라는 교지 편집 연합동아리가 올초에 ´여순사건 인터뷰내용 및 장소별 사건´이라는 제목하에 여순사건 특집기사를 각 학교의 학생 교지에 실은 것이다.

순천고등학교를 비롯해 순천 관내 고등학교 교지에 실린 여순사건 관련 내용
순천관내 고등학교 교지에 실린 순천 장대다리 밑에 세워진 여순사건 안내판. 이곳 역시 반란군 대신 봉기군이란 표현을 적시해 논란이 되고 있다

다음은 교지에 실린 내용중 일부를 그대로 발췌한 내용이다.

2 동천(순천교 제방/장대다리)편이다.-

있는 곳;순천시-찾아가는 길: 안내판-순천교 광양쪽 동천 진입 계단 아래(동쪽 제방 교각 아래)

순천교(별칭:장대다리)와 동천제방은 봉기군과 경찰사이에 최초로 치열한 접전이 벌여졌던 곳이다. 1948년 10월 20일 순천 경찰과 인근 지역에서 지원나온 경찰 우익 청년단원 수백명이 봉기군을 저지하기 위해 광양삼거리와 동천제방에 방어선을 구축하고서 공방전을 벌였으나,봉기군에 격퇴당하였다.

교지 인터뷰부분에서 여순사건 유족회장은 ´반란군´이라는 용어를 수십차례 써가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지만 여순사건 발생배경에 대해서도 반란군을 통일세력으로 진압군을 반통일세력으로 언급했다.

다음은 교지에 실린 여순사건유족회장의 여순사건 발생 배경에 대한 발언내용이다.

"제주 4.3사건 즉 이승만 정권반대, 남북통일로 가자는 뜻을 품은 시위를 정부로부터 진압받았는데 출동을 하지 않은 거야. 같은 동족을 죽인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 군인들이 여수와 순천으로 올라와 반란을 일으킨 것이야"

문제의 핵심은 논란소지가 있는 ´여순사건´에 대해 누가 어떻게 학생들에게 기획취재를 하기로 결정했느냐에 관한 것.

학생들이 기획취재물로 다루기엔 다소 무거운 소재인 여순사건에 대해 다른 제3자의 권유나 개입이 있었느냐에 대한 것도 의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취재를 주도한 순천고등학교 J 학생은 <본보> 와의 통화에서 기획취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 " 우연히 인터넷에서 우리 고장 소식을 접하다보니 여순사건에 대해 알게됐고 다른 학교 학생들과 공동취재를 통해 특집기사를 냈다"고 털어놨다.

이렇듯, 당초 여수14연대 반란군이나 진압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민간인을 추모하기 위한 차원에서 시작된 이 사업이 누군가에 의해 여수14연대 반란군을 추모하고 심지어 학생들에게조차 14연대를 옹호하는 등 역사왜곡을 통해  좌파사관(史觀)을 감염시켜 활용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는게 지금의 현실이다.

지난 10월 15일 전남교육희망연대(이하 희망연대)와 한국사국정화반대전남도민모임(이하 국정화반대모임)은 순천시청앞에서 개최한 국정화반대 기자회견 모습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들이 역사왜곡을 거론하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비난할 자격이 있나?

결론적으로,

지금 여수 순천 지역 사람들은 1948년 10월 19일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에서 ‘반란(叛亂)’이란 용어에 대해 엄청난 거부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반란(叛亂)이었다.

만약 여수순천 지역 사람들이 이러한 과거의 오명(汚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당시 이 모든 비극이 남로당과 좌익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만천하에 밝혀야 한다.

그래야 대다수의 사람들이 좌익이 아니었고, 극히 일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발생한 비극, 즉 참담한 한반도 공산화(共産化)) 과정에서 발생한 선량한 피해자로서, 여수 순천 시민 모두 그 신분과 명예가 회복되어 불량한 공산(共産) 비극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도 좌익들은 여수 순천 시민들을 끌어들여, 48년 반란 이후 60년 동안 중단된 대한민국 공산적화를 진행하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여수 순천 시민들을, 민주화라는 이름의 ‘민중 민주(民衆 民主) 동지’로 삼아, 끝까지 이용할 목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선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디 오늘날 여수순천 지역 시민들은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좌익들의 거대한 음모로부터 벗어나,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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