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 어란 여인 발굴과 현창에 온 힘 쏟은 열정...향우회로부터 공로패 수상한다

 
오는 4월 11일 해남 땅땅끝관광호텔에서 목포 MBC와 전남일보, 해남신문, 해남군민신문,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과 재광 향우 일동과 지역주민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특별한 행사가 마련되어있다. 

행사에 앞서 이들은 명량대첩과 관련한 해남군 송지면 어란 마을의 ‘어란’여인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그 간 그 호국여인의 현창을 위해 노고가 지대한 박승룡 선생에게 공로패를 전달 할 예정인 것이다.

박승룡 선생과 어란 여인의 관계를 돌아다보면, 지난 2007년 박승룡 씨는 처음 한 일본인의 책에서 ‘어란’ 이라는 여인을 발견한다. 그 책은 일본 해남회(일제시대때 해남에서 살았던 일본인의 모임)에서 발간한 사와무라 하찌만다로(澤村八幡太郞)의 유고집이었다.

박 선생은 그 유고집을 읽다가 크게 놀라게 된다. 그것은 133척의 압도한 위치의 일본수군이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12척에 불과한 조선수군에 대패한 사유가 ‘어란’여인의 첩보전에 기인한 것으로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평문과 한시로 수록이 되어 있었다.

어란 이야기의 스토리는 정유재란시 명량해전을 앞두고 어란진에 정박한 일본군, 일본군 장수 칸이 이순신 장군이 보낸 간첩, 어란 여인에게 잠 자리에서 명량해로의 출정기일을 발설, 이순신 측에 전달, 어란은 자신의 밀고로 애인 칸이 죽은 것을 비관, 여낭터에서 투신자살, 이튼날 동네 어부가 어란의 시신을 바닷가에 묻고 석등롱을 세움, 석등롱은 최근까지도 매일저녁 불을 밝힘, 지금도 정월 초 하루 어란 당집에서 제를 모시고 있다로 집약된다.

명량해전, 즉 1592년 일본군의 칩임으로 발발한 임진왜란, 그리고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던 때를 틈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재차 침범한 정유재란, 남해안을 거쳐 1597년 9월 14일 해남 어란진에 진을 친 일본수군.

일본군은 이때 진도 벽파에 진을 치고 있던 이순신 수군을 몰살하고 북서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강경으로 가려던 계획이었다.

명량대첩의 현장, 울돌목은 해남군 문내면(우수영) 학동과 진도군 고군면(벽파진) 녹진을 잇는 총길이 484m연륙교(사장교)인 진도대교(제1, 제2대교)아래를 명량해협이라 하고 이 해협을 따라 흐르는 조류는 국내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D-DAY, 일본군이 어란진을 떠난 지 이틀 뒤인 1597년 9월 16일 명량해로 들어왔다. 일본군의 출발일시와 도착 상황을 파악하고 이미 벽파에서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다.

이순신 장군 스스로도 ‘천행 이었다’고 한 명량대첩은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굳은 의지로 조선군은 단 한 척의 손실도 없이 이순신의 완벽한 승리로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군의 조선침략을 후회하게 만드는 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해 준다.

박승룡 선생은 2007년 어란 여인을 발굴하고 이어, 2008년 어란 보존 현창회 구성하여 본보 등 신문, 방송과 인터뷰, 취재에 응하면서 ‘어란’은 세상에 ‘이슈’로 나타나고, 같은 해 일본 히로시마 대학 히구마 교수 등 30여명의 일행이 어란마을 현장을 찾았으며 이후 해남군 향토유적 보호위원회에서 어란 당집 등에 대한 향토유적 지정을 위한 현장 조사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박 선생이 밝힌 사와무라 유고집에 나타난 ‘어란’ 여인의 줄거리는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을 이틀 앞두고 왜장 ‘칸 마사가게’ 와 ‘어란’ 은 통정하는 사이로 명량해로 진군 날짜를 알게 된 ‘어란’ 여인이 이 사실을 이순신 장군 측에 전달하면서 명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끌 수 있는 원인이 됐다고 쓰여있다.

이 후 어란 여인은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왜장 ‘칸 마사가게’ 의 소식을 듣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 했지만 인간적인 자책으로 달 밝은 밤 명량해를 바라보며 투신 자살하자 마을사람들이 어란의 시체를 수습하여 소나무 밑에 묻어주고 마을에서 그 영을 위로하는 석등롱을 세워 매일밤 불을 밝혔다고 기록되어있다는 것이다.

박 선생은 “사와무라는 일제강점기 해남에서 19년 동안이나 순사로 지내면서 수많은 잡기록을 남긴 사람으로 우리말에 능통하며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연구하고 한시에 일가견을 갖는 한학자였으나 그가 일본사람이고 직업이 직업이어서 그 진위가 의심되기도 하지만, 그 잡기록에 의하여 해남 삼산면 포로수용소 문제가 사실로 인정된 이상 만양 날조한 것이라고 무시할 수 없어 현장인 어란 마을에 가서 현지를 답사하여 주민들의 증언을 들었더니 사와무라의 기록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졌다”는 것.

이와관련, 박 선생은 지난 2011년 어란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일 때 본보에 보내 온 기고에서 “제가 방관해 버리면 영원이 감춰질 소중한 우리의 이 사실을 놓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한동안 고민도 하면서 역사에 무뢰한인 이 사람이 고증 찾기에 나서보았다”며 “천만다행이도 ‘난중일기’에서, ‘왕조실록’에서, 그리고 김 훈의 ‘칼의 노래에서 근사한 고증을 찾는데 성공하고 비로소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로 작심했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의 박 선생의 어란 여인의 실존 주장은 “확인되지 않은 인물인 '어란'을 끌어들여 충무공의 전승을 폄하려는 또 하나의 역사 왜곡과 역사 부정에 대해 박 선생은 "명량대첩, 그리고 ‘어란’여인, 이는 이순신의 전략에 기인한 만큼 오히려 이순신의 높은 지략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말한 바 있다.

덧붙여 박 선생은 “이와 같이 ‘어란’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한일 양국에 파급된 멋진 스토리텔링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그리하여 명량대첩제에 어란의 이야기가 삽입되고 나아가 이 고장 어란 마을이 하루 빨리 관광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고 밝혔다.

이와관련, 목포대 강봉룡 교수는 2011년 07월 어란 마을에서의 워크숍에서 “결국 실존한 사실만이 사실인 것이 아니라 거듭 새로 만들어지는 사실도 사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만큼 역사 인식의 폭은 확대될 수 있다”고 밝히고 “사와무라는 어란을 문학화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 냈고 그 사실은 박승룡 선생의 재 발견으로 역사화 되고, 재 문학화되는 과정을 밟고 있는 셈이다”며 “알고 보면 역사도 문학인 것이다”라고 했다.

 

한편, 이날 공로패를 받게 될 박승룡 선생의 ‘어란’ 여인이야기에 관한 그간의 행적을 돌아보면 2006년 9월 해 ‘어란’이야기 발견, 2008년 3월 28일 ‘어란’ 보존 현창회 구성, 2008년 4월 28일 유적 답사 행사(일본 히로시마 대학교 히구마 교수외 30명, 진도군 문화해설사 16명, KBS MBC 보도진과 지방 신문 기자와 군민 등), 2008년 5월 22일 의인 ‘어란’ 저작권 등록, 2008년 5월 28일 의인 ‘어란’에 대한 간담회를 개최했다.

또한, 2008년 10월 11일 명량대첩제 행사에서 뮤지컬 홍보, 2008년 10월 12일 일본인 ‘어란’ 유적 현장 답사(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왜장 구루시마의 후손 등), 2008년 12월 6일 울돌목에 핀 해당화 ‘어란’ 뮤지컬 공연, 2011년 5월 27일자 어란당제 향토유적으로 지정, 2011년 7월 1일 어란 마을에서의 워크숍, 2012년 12월 20일 ‘어란’여인 이야기 표시비 건립, 2013년 1월 30일 ‘여낭터’표시비와 ‘어란’여인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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