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 때 해방정국을 맞이한 유한열 前 의원이 해방정국 당시 선친 유진산 선생의 활약상에 대해 얘기중이다.
해방직후 서울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선친이 그때부터 청년애국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흥국사’라는 애국단체를 만들었다.

선친은 당시 인촌 김성수 등과 활동하던중 종로 가외동 일대에 발에 밟힐 정도로 많은 삐라가 뿌려져 있어, "큰일 났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흥국사' 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당시는 창랑(滄浪) 장택상 씨가 영국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뒤 이승만 박사와 친하다 헤어지고 미 군정 하지 정부하에서 시경국장과 의기투합 하던 시기였다.

장택상 집이 당시 종로구 수표동에 있었는데, 선친은 조병옥씨, 장택상씨와 같이 세 분이서 자주 만났다. 그때 서울 분위기가 험난했다. 테러도 하고 좌익세력들 활동이 눈에 띄게 많았다.

그런데 당시 이강국씨가 좌익의 거물이었다. 그는 보성고등학교를 다녔다. 경기고등학교 다니다 퇴학당해 보성고등학교로 전학 가서 다시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만주를 오가며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당시 할아버지와 대구 칠곡 장택상씨 등의 지주들이 모여서 돈을 모금해 선친에게 주면 지인들과 같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했다. 선친은 그 과정에서 일본 헌병에서 잡히면 안되니 열차 밑에 매달려 가기도 했다. 만주와 중경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해방이후 좌익들이 훨씬 강했다 종로바닥에 삐리가 뿌려질 정도였다. 그래서 흥국사를 만든 것이다.

보성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이강국은 당시만해도 남로당 대부 박헌영 보다 뛰어난 이론가 였다.

김두한 등 젊은이들이 이강국이 밑에 있었다. 당시만해도 박헌영과 이강국이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고, 김두한은 이강국을 수행할 정도밖에 안됐다.

김두한이 주로 이강국을 수행했는데, 당시 이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이 오갈데 없어 김두한을 따라다니기도 했다.

어느 날 선친이 종로여관에서 이강국을 만나자고 제안해 이강국이 겁이 났는지 김두한과 그 수하 서북청년단원 수십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강국과 논쟁 끝에 바깥에 있던 김두한 등이 둘간의 10시간의 논쟁을 경청하고 난 뒤, 공산주의가 좋지 않다는 것을 판단하고 이강국과 선친이 같이 바깥으로 나오는데, 김두한과 서북청년단이 이강국을 따라가지 않고 선친을 따라왔다.

그때부터 선친이 대한청년단을 창당해 김두한에게 감찰부장을 시켰다.서북청년단 행동대원이 가세해 대한청년단이 창단된 것이다.(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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