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계(玉溪) 유진산의 아들, 유한열!

어린 그에게 비춰진 1945.8.15 해방정국은 큰 충격이었다. 3년간의 극심한 좌우(左右) 대립속에 골육상잔(骨肉相殘) 의 비극, 그리고  이어진 6.25 전쟁, 그러나 70년이 되가는 지금도 그 상흔(傷痕)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지금 보수-진보 진영간의 싸움을 지켜보자면, 그 때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유한열, 그가 몸소 겪은 현대사를 수기(手記)형식으로 적어봤다. 

 

<1>어린 나의 눈에 비쳐진 8.15 해방

해방 당시 나는 8세 였다.

충남 금산군 진산 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우리 집안은 선친이 일본 사람들로부터 쫒겨 다닌 신세였다.

선친이 가끔 우리 집안에 나타날 땐 나운규(아리랑 작곡가) 전진한 ( 경북 상주 출신 초대 사회부 장관), 김산(제헌 국회 당시 이기붕과 맞선 인사) 4분이 같이 집에 나타났다.

그러고 난 뒤 대둔산 밑에 옥계천 계곡에서 천엽을 하시면서 비운의 나라현실을 걱정하시면서 시간을 보내고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어버님이 사라진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일본 헌병이 3~4명이 집에 찾아와 선친의 행방을 추궁하곤 했다. 당시 대동아 전쟁기간 일본인들은 우리 국민에 갖은 고통을 주며 못살게 굴었다. 당시 나도 8살 이었지만 산에 가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소나무 진액을 수거해 일본군에 군납도 하기도 했다.

식량이 부족하니 콩을 볶아 부셔서 덩어리를 만들어 배급을 주곤 했다. 우리 집안에는 선친이 독립운동 한다는 이유로 그나마도 배급이 돌아오지 않았다.

먹을 게 없어서 20리나 떨어진 친척집에 가서 보리쌀을 형님들과 둘째형과 같이 얻어다가 삶아 먹기도 했지만 일본인들이 우리 집에는 동네사람들이 협조도 못하게 감시했다,

할아버지는 형제들이 많았지만 우리 아버님들이 외동아들이라, 6촌 큰아버지가 계셨는데, 진상의 면장을 했다. 세도가 대단했다. 그들이 징병도 보내고 정신대도 보내기도 했다.

면장 하던 그 분은 당시 일본 중앙대를 졸업하고 아버님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선친은 일본에서 유학당시 할아버지가 돈을 대줘 신주꾸에 한옥을 지어 한옥이름을 ‘태백가’ 로 명명해 신익희 양일동 등 일본서 학교 다닌 정치인들을 기숙하게 했다. 오히려 일본 사람 종을 둘 정도였다.

큰 아버지가 일본서 새로운 문물을 많이 배워왔다. 그래서 복숭아 나무 열매가 많이 열리는 과수농장을 했다. 하루는 동네 애들과 복숭아를 따러갔는데, 산지지가 쫒아와 모망가다 붙들리기도 했다.

큰 집에 갔더니 냉장고가 있었는데 오렌지나 바나나가 있을 정도였다. 보리밥도 못 먹을 정도인데, 세상이 이렇게 틀리구나 생각을 했다.

8월 15일 아침, 해방된 날 초등학교 입구에 일본 천황폐하 동상에 동네사람들이 몰려들어 동상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해방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곧이어 큰 아버지 면장 집으로 몰려갔다. 가보니, 오래된 살구나무에 큰 아버지 목을 매달아 몽둥이로 패고 있었다. 그 가운데 친척중 담배가계 한 분이 제일 세게 패 놀랬다. 300명이나 되는 인원이 그렇게 해도 제지를 못했다.

그 순간 갑자기 어디에선가 우리 아버님이 나타나 “그러면 안돼” 라며 풀어주었다.

그런 뒤 둘째 형님과 할아버지만 남겨주고 서울 종로 충신동으로 올라왔다.

해방직후 서울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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