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의 국민당이 모택동의 공산당에 무너진 것은 국공합작 때문이었다. 모택동은 국공합작 기간에 수많은 간첩을 장개석 휘하에 심었고, 그 간첩을 이용하여 장개석의 모든 움직임, 군사기밀부터 장개석의 의중까지 파악하게 되었다. 

결국 장개석의 몰락은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이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알려주는 사례가 되고 말았다. 다시 이 국공합작은 베트남에서 재현되어 월남의 패망을 가져왔고, 이 국공합작은 세대를 이어 오늘날 한반도에서 또다시 전개되고 있다. 북한과의 6.15선언, 혹은 연방제 통일은 시대를 달리한 국공합작이었다. 

6.15선언이 있은 뒤, 김정일은 이런 지시를 내렸다.

“이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말 하지마라. 곧 우리 것이 된다.” 

우리 것이 된다는 것은 국공합작의 결과를 너무도 잘 아는 자의 자신감 넘치는 표현이었다. 인간을 총칼로 다루는 자들이 무엇을 못하랴. 친북좌익들이 활개 치는 대한민국과 김정일이 6개월씩 대통령을 나누어서 한다면, 김정일의 6개월 통치기간에 대한민국의 애국인사들은 모조리 수용소로 갈 것이다. 김정일을 반대하는 애국인사들이 사라지고 난 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서 곧 우리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대북유화정책의 결정판인 ‘연방제’를, 우리가 그토록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국공합작의 전례(前例)를 본 까닭이었다. 

이 국공합작이 한반도에서는 좌우합작으로 나타난 적이 있다. 이승만은 그가 겪은 공산주의자들을 통해 좌우합작, 남북협상의 위험성을 너무도 잘 안 지도자였다. 상해임시정부가 분열된 것도 공산주의자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너무도 비인간적인 공산주의자들의 행태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대동단결’이라는 너무도 달콤한 미명(美名)에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좌우합작을 찬성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구와 김규식이었다. 백범 김구는 1942년 김원봉의 좌파세력을 받아들여 임시정부를 좌우합작 조직으로 바꾸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국도 한반도에서 좌우합작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1945년 샌프란시스코 유엔창립총회에서 전후(戰後)의 문제를 소련과 협조해 처리한다는 좌우합작 노선으로 굳어졌다. 그 결과 동유럽국가들은 대부분 공산화의 길을 가고 말았다. 그리고 40년 후 모두 공산주의를 버리고 자유민주국가로 돌아왔다.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김일성은 좌우합작론자인 김구와 김규식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4.30 공동서명’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남한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위해 제주4.3폭동을 일으키고, 여순반란사건을 촉시켜 남한을 혼란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끌면서 김일성은 전쟁 준비를 마치고 있었고, 마침내 6.25를 일으켰다. 

전쟁 기간인 1950년 말 유엔은 휴전3인위원회에게 공산 측에 어떤 조건을 제시하면 휴전에 합의해 올지 조사하게 하였다. 위원회는 대한민국을 해체한 다음 4대국(미,영,소,중)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분명한 좌우합작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결사반대하였고,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 체제를 유지하면서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10년 동안, 대한민국은 다시 좌우합작 망령에 시달리게 되었다. 연방제 통일이라는 적화통일의 전 단계까지 우리는 논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정일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서울불바다란 말을 꺼내지 말라고 지시하게까지 된 것이었다. 

지금도 ‘6.15 선언’ 실천을 촉구하는 친북좌익들이 민주당과 민노당, 좌파시민단체에서 발호하고 있다. 총과 포탄을 맞고 죽어가도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하고, 금강산 관광을 계속해야 하고, 천안함 침몰도 따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냥 따지지 말고 북한에 나라를 넘기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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