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계올림픽과는 달리 동계올림픽은 거친 열기 대신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얼음과 눈 위에서 맨몸이 아닌 도구를 사용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겠다. 한국으로선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아 쥐었지만 러시아에 귀화해서 4개의 메달을 거머쥔 빅토르 안에겐 인생 최고의 무대였다.

불똥은 고스란히 한국으로 튀었다. 올림픽 기간 내내 그가 러시아로 귀화한 배경을 두고 온갖 소문과 억측이 난무하고 대통령까지 나서 한 마디 거드는 바람에 솔직히 이번 소치 올림픽에 대해 개운한 기억을 가진 한국인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토르 안은 진정한 올림픽 영웅이 되었고 러시아는 종합우승으로 개최국의 체면을 살렸다.

만약 빅토르 안이 이번에 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했다면? 당사자로선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겠다. 그런 무거운 강박증을 극복하고 일궈낸 성과이기에 그 어떤 메달보다도 값진 것이겠다. 무엇보다 그의 선택이 지혜로웠다. 하필이면 생소한 러시아! 개최국의 이점과 적극적인 후원을 노린 것이겠다. 아무렴 한국이 내다버린 퇴물을 가져다가 3관왕으로 길러낸 러시아가 위대했다. 신뢰가 가장 큰 힘임을 증명해준 사례였다.

新고려인, 빅토르 안의 탄생

한국인에게 빅토르 안의 러시아로의 귀화는 아직도 생소하기만 하다. 그가 비록 4개의 메달을 러시아에 안겨줬다고 해서 진정한 러시아인으로 받아들여질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작은 반도에서 누천년 이민족과의 섞임 없이 살아온 한민족에겐 ‘귀화’란 단어는 언제나 어색할 수밖에 없겠다. 실은 미국으로의 ‘이민’과 다를 바 없는 데도 말이다.

대체로 작은 나라의 민족들은 포용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인종적 문화적 포용력은 대국만이 가질 수 있는 중력이자 관성이기 때문이다. 해서 대국적 관용과 포용력을 배우고자 하지만 여간해서 그게 잘 안 된다. 한국인의 배타적인 기질이 반드시 굴곡진 역사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만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빅토르 안이 첫 우승을 했을 때 빙판에 엎드려 키스를 했다. 한국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그가 너무 기뻐서 저러나보다 했지만 러시아인들은 그걸 단순한 세리머니로 보지 않는다. 러시아인들의 대지에 대한 애착은 다른 어떤 민족보다 강하다. 절체절명의 찬스에서 대지에 입맞춤으로써 러시아인들과 완벽하게 소통을 해낸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우리 러시아인 빅토르 안!’으로 모든 러시아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예전에 교황으로선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요한 바오르 2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키스한 것을 연상하면 되겠다.

▲ 소치 동계올림픽, 러시아에 금메달 안긴 안현수 빙판에 키스 장면

빅토르 안이 러시아에서 경기력만 키운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엄청난 성장을 한 것이다. 입맞춤 하나로 진정한 러시아인으로 받아들여짐은 물론 주류사회로 곧장 진입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한러관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다. 한국에서 그만한 인물을 어느 세월에 길러내겠는가? 아무렴 그로 인해 러시아 연방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들도 큰 자부심을 얻었으면 좋겠다.

열린 세계관으로 빅토르 안을 끌어안아야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일본의 아베 총리는 소치 개막식에서 치열하게 외교전을 펼쳤지만 한국은 다음 개최국이면서도 대통령이 가지 않았다. 겨우 축제가 다 끝나갈 무렵 국무총리가 한국 선수단과 방송팀을 격려차 둘러보고 폐회식 리셉션에 참석하는 게 고작이었다.

미래를 내다보고 역으로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그 답은 명확하게 나온다. 승자가 답이다. 이젠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 아니 그에게 빌붙어 러시아를 배우고 러시아와 가까워져야겠다. 체면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소모적 논쟁은 이제 젖혀두고 보다 적극적이고 우호적으로 그를 키워나가야 한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겠다.

그는 다음 평창 동계올림픽에도 선수로든 코치로든 참가할 것이다. 한러 간에 그의 영향력은 한국의 그 어떤 IOC위원보다 크다. 대통령은 기회가 되면 그를 청와대에 초청해서 오찬을 나누는 등 진정한 영웅으로 대접했으면 한다. 그가 빙상계를 넘어 문화, 정치적으로도 큰 힘을 지니도록 밀어줘야 한다. 그리하면 언젠가는 그가 이번에 러시아에 헌납한 금메달들보다 훨씬 더 값진 일을 모국을 위해 해낼 것이다.

편파 판정과 스포츠 외교 부재 타령

완벽한 기술 구사와 뛰어난 예술미! 솔직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아가 안일했다고 볼 수 있다. 무난한 곡에 무난한 동작들로 구성된 프로그램. 속도나 파워, 창의적인 새로운 동작이 없이 예전의 것들을 단지 실수 없이 해냈다는 안도감만 남겼다. 아델리나 소트니코바나 아사다 마오와 같은 절박함이 없어서였겠다. 게다가 우아미(優雅美)만 예술미가 아니다. 스피드와 역동성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동안 아사다 마오와 김연아를 주축으로 한 피겨스케이팅이 지나치게 예술적 기교로 흘러왔다고도 할 수 있다. 아무리 피겨라 하지만 본색은 체육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갈라쇼적인 동양적 취향의 피겨스케이팅이 진부했다는 심판진들의 논리도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아무튼 이번 소치올림픽을 계기로 피겨스케이팅의 주 무대가 아시아에서 다시 서구로 넘어가버렸다.

문제는 시합이 있기 전부터 편파판정에 대한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한국측의 선제적 대응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가령 김연아가 경기를 마치자마자 링크 중앙에서 관중을 향해 스테이지 바우로 절을 하고 몸을 일으키면서 불어로 “메르시 보끄, 주템므!”라고 감사와 사랑의 인사말을 던졌어야 했다. 분명 카메라가 클로즈업하기 때문에 그 입모습만으로도 불어권 관중들은 다 알아차린다.

이어 사방 네 곳을 돌며 불어, 영어, 러시아어로도 인사해서 관중들의 환호를 유도해 심판진들을 압도시켰어야 했다. 그랬다만 당황한 심판들이 자칫 관중들의 몰매라도 맞을까봐 두려워 그런 판정을 못 내렸을 것이다. 참고로 이번 소치 올림픽에서의 공식 언어는 불어, 영어, 러시아어 순이었다. 그리고 심판진들은 모두 불어가 모국어(mother tongue)이거나 모국어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설마 그깟 인사말로? 지난 날 개최권을 두고 소치와 평창이 경쟁할 때 노무현 대통령 다음으로 나선 푸틴 대통령은 먼저 불어와 스페인어로 인사말을 해 전세를 역전시켰었다. 교황이 각국 언어로 성탄 메시지를 읽어주는 것과 같다 하겠다. 무슨 사고가 터지고 나면 으레 억울하다며 스포츠 외교 부재를 탓하지만 정작 이런 예상 가능한 일에 닥치고서도 선제적 콘티 하나 짜내지 못해 고스란히 당하는 체육계 인사들과 감독, 코치의 무능을 먼저 탓할 일이겠다. 빅토르 안처럼 상대의 가슴 깊은 곳을 두드리는 창조적 솔루션이 없었던 거다.

현대의 스포츠는 체육이자 소통과 교감, 사교의 도구다. 올림픽은 웃고 놀면서 세계인들과 소통하는 축제다. 아무렴 이제 한국인들도 지나치게 국가주의적 강박증으로 승부에만 집착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즐겼으면 한다. 메달만 보지 말고 선수들의 매너와 품격, 인간적 성숙도까지 함께 살피는 안목을 지녔으면 싶다.

김연아의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오심이든 편심이든, 아무리 억울해도 승부는 승부다. 그마저도 스포츠다. 금메달보다 더 값진 말 한 마디! 기왕지사 김연아는 보다 적극적이고 분명하게 소트니코바의 우승을 축하해줬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축하의 말과 함께 언제 갈라쇼에서라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사람은 자기를 이길 때 부쩍 성장한다. 그런 게 진정한 도전이다.

언젠가 김연아는 IOC위원이 되고 싶다고 밝힌 적이 있고, 이번 소치올림픽 참가도 그 요건을 갖추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준비해 나가야 하는데, 처음부터 호랑이를 그려야 한다. 스포츠인에게 IOC위원이란 더없는 영예이기는 하지만 기실 IOC위원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건 아니다. 김운용 전 위원처럼 이너써클인 집행위원회(Executive Board)에 입성해야 명실상부한 권력과 명예를 지닌다.

노벨상이 문(文)의 축제라면 올림픽은 무(武)의 제전이다. 노벨상위원회가 지성의 사교클럽이라면 IOC는 야성의 사교클럽이다. 박사학위나 금메달 순으로 집행위원이 되는 것 아니다. 인기가 아니라 매너와 품격으로 승부하는 곳이다. 고품격 테이블 매너와 불어 없이는 본선 데뷔 자체가 불가능하다.

IOC를 창설한 피에르 쿠베르탱은 프랑스인. IOC의 모국어는 불어다. 불어 없는 스포츠 외교란 있을 수 없는 이유다. 현재 김연아의 내공수준으론 자질 부족이다. 이 일은 체육계나 김연아 개인에게만 맡길 일이 아니다. 5-10년을 내다보고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육성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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