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그 늠름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쓸쓸히 아주 없어져서 뒷 세상에 알려지지 못할까 애통하다"

▲ "필시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다. 만일 내가 죽더라도 적이 알지 못하게 하라" 고 했다는 고사는 잘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묘소는 두륜산 오소재에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서울 점령을 목전에 두고 있을때 경상우수사 원균이 도망하여 곤양 부근에서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은 관할론(館轄論)과 부원론(赴援論)으로 대립되고 이에 이순신은 출전을 주저하고 이억기 수군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며 주변상황 파악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보다 못한 녹두만호 정운이 나서 이순신에게 말한다.

“나라가 위태로운데 군인에게 자기 관할이 어디 있겠소. 경상도가 무너지면 전라도라고 무사하겠으며 적이 밖에 있을 때에는 막기가 쉽지만 일담 안으로 들어오면 막기가 어려운 법, 영남을 도와 호남을 보호해야지 어찌 목전에 편안함만 찾는단 말이오” 라고.

결국 이순신은 경상도로 출병하고 그는 이순신 군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적진포·당포·당항포·한산도 해전에서 분전했다.

8월 24일 전라좌수영군은 경상좌수영군과 합동하여 부산포를 공격할 것을 결정하여 9월 1일 이른 아침 부산포를 향하고 8시경 몰운대를 화준구미(花樽龜尾)에 이르렀을때 왜선 5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서는 왜선 8척, 서대포 앞바다에서는 왜선 9척, 절영도에서 왜선 2척을 만나 모두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우부장이던 정운 장군이 이어 부산포로 돌진하였을때 적선 400여척이 선창 동쪽의 산기슭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부산포 몰운대(부산 다대포) 전투가 시작되고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분전, 이때 적선 100여척을 격파하여 많은 적군의 군기를 노획하는 한편 적군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으나 정운은 회군할 때 적탄을 맞아 전사했다. 이때가 1598년 6월 그의 나이 50세였다.

사후 정운 장군은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충장(忠壯)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해남 오소재 고개에 그의 묘가 있으며 부산 다대포 몰운대에 그의 순절을 기리는 유적비가 있고 옥천면 대산리 생가 인근의 충절사와 부산 충렬사 등에 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충장공 정운 장군(1542-1592)은 1542년 9월 10일 해남 옥천 대산리에서 공조판서 정응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정운 장군은 어려서부터 힘이세고 성품이 곧았으며 용맹스러웠을뿐 아니라 활쏘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지며 장군이 7세때에 큰칼에 ´정충보국´이라는 칼 이름을 새겨 스스로 나라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28세때(1570년)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만주의 국경지대 수비대 장교로 임명받아 그해 10월 두만강을 건너 침략한 외적 20여명과 맞서 싸워 전멸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 거산도찰방·웅천현감·제주판관을 거쳐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는 녹도만호였다.

▲ 당시 영암현에 속했던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 위치한 숙종때 이르러 사액을 받은 충절사
▲ 선조 41년에 충신문을 건립토록 하는 어명을 받들어 충절사 바로 옆에 모셔져 있다.
그가 전사하자 정묘년 9월 11일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녹도만호 정운은 세번 승첩을 했을 때 언제나 선봉에 섰고, 이번에 부산포해전에서도 하루 종일 교전하면서도 어찌나 힘을 다하여 쏘았던지 적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는바 이는 정운의 힘이 컸다. 그런데, 그날 돌아올 무렵에 철환을 맞아 죽었지만, 그 늠늠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쓸쓸히 아주 없어져서 뒷 세상에 아주 알려지지 못할까 애통하다’ 라고 적고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죽음을 앞두고 남긴 "나의 죽음을 적이 알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부산포해전 중 몰운대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은 그의 우부장 정운 장군이 먼저 이 말을 남기고 전사했다는 고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9월 1일 몰운대 싸움을 앞두고 정운 장군은 몰운대의 ´운(雲)´자와 자신 이름의 ´운(運)´자가 동일한 음이라는 것을 알고 "필시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다. 만일 내가 죽더라도 적이 알지 못하게 하라" 며 부하에게 일러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다고 한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두고도 어찌된 일인지 선조의 공신록에는 등록되지 못한 정운 장군은 후일 1605년(선조38)에 가서야 선원종 1등훈에 책해지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선조 41년에는 충신문을 건립토록 하여 현재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충절사에 모셔져 있다

또한 효종때에는 지금의 자리에 사당을 세웠고, 숙종때 이르러 충절사라 사액 하였으며 다시 정종때에는 병조판서와 이윽고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한편, 충장공의 고향인 해남에서는 정작 그와 연계된 어떤 행사도 없지만 옥포, 사천, 한산도 등 임진왜란의 유명한 해전에서 언제나 선봉장으로서 왜적선 500여척과 맞서 100여척을 쳐부수고 몰운대에서 전사한 장군의 용맹성을 높이 기려 지난 2008년부터 부산 사하구 다대포해수욕장에서는 ´정운 장군배 전국 카이트보딩 대회´를 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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